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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Jul 20. 2024

인간관계

살아갈 준비, 죽을 준비

다시 또 휴직을 하게 되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기억력은 점점 더 떨어져 갔고 나는 넋이 나간 사람같이 행동했다. 휴직 후 목디스크 물리치료를 받으러 이틀에 한번 꼴로 정형외과에 다녔는데 어느 날은 그동안 타고 다녔던 버스의 번호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아 멍하니 서서 버스를 보내고는 결국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버스 번호를 물어보고 탔던 적도 있었다. 이런 상태로 내가 다시 복직을 하게 될 수 있는 날이 있을런지, 앞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사람구실을 제대로 하고 살 수는 있는 건지 앞날이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휴직을 하게 된 상황과 힘든 내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가까운 친구와 지인에게 상황을 알리게 되었는데, 건강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복직을 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친구와 지인들은 이런 나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며 그래도 힘들게 공부해서 들어간 곳이고 건강이 호전될 수도 있으니 섣부르게 그만둘 생각은 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그런데 오래전 사회에서 만난 친구 한 명은 마치 내가 그만두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위한다며 하루라도 빨리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말을 같은 자리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 친구는 인연을 맺고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내가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던 친구였는데, 그 남다른 감정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 친구는 내가 안되길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런 느낌이 나의 오해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유일한 미혼의 친구로 공감대 형성이 잘 되어 만나면 대화가 잘 통하고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점점 좁아지는 인간관계로 인해 불안감을 느낀 데다 어느 정도의 인간관계는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여러 번 진심이 의심되는 상황이 있었지만 인연의 끊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떨어졌던 공인중개사 시험에 내가 합격을 하고, 그 친구가 먼저 시도를 했다가 포기했던 공무원 시험에 내가 합격을 한 상황이었기에 질투라는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나는 사실 ’ 질투‘라는 감정을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래전에 봤던 어떤 심리학 프로그램에서 ’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 질투‘라는 감정을 너무 부정적으로 인식을 한다면서 그 당시 인기 있었던 미국 드라마에서는 좋은 일이 생긴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나를 질투해 줘”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을 거론하며 외국 사람들은 ’ 질투‘라는 감정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타인이 나를 질투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됐다는 뜻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사실 질투라는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질투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질투를 하는 것과 내가 안되길 바라는 마음과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만 살아온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도 큰 질병을 진단받아 1년도 채 근무하지 못하고 건강악화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친구였는데,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내가 이보다 더 안되길 바라는 그 마음이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제는 이 인연을 끊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진단을 받고 지금까지 힘든 시간을 겪어 내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봤던 어떤 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글쓴이는 겨우 고난을 극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되자 자신이 힘들었을 때 옆에서 가장 많이 위로해 주었던 친구가 자신이 잘된 것을 시기하며 배 아파했다는 사연의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심리학 책을 광고하는 글에서 친구관계에 관한 문장을 보다가 “너까지 행복해지면 안 되지. 최소한 너는 나보다 불행해야지”라는 문구를 보고 경악을 했던 적도 있었다. 과연 정말로 내가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진정한 친구가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시기를, 힘들게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 이들을 통해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기에 일부 이해도 되었고, 내 고통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나를 보면서 뒤돌아 미소 짓는 이들까지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고,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부질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다양한 심리학 강의를 찾아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연인, 동료, 친구 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에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일지도 모른다. 특히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 내에서의 인간관계는 내 삶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관계에도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말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타인에 대한 뒷담화인데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휴직 전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다른 부서 직원에게 고충을 토로한 것을 내가 우리 부서직원들의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인사팀장이 그 얘기를 우리 부서 직원들 모두와 과장님께 내용을 전달하면서 

모두가 나한테 등을 돌리고 급기야는 휴직을 재촉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내가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든, 험담을 한 것이 든 간에 내가 성숙하지 못해서 나의 힘든 상황을 그렇게 해소했겠지만, 사실상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체 타인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누구나 자기가 믿을만한 누군가에는 자신의 고충을 얘기하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상급자에 대한 뒷담화를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 나는 절대 타인의 험담을 하지 않을 거야!‘라는 결심을 했다 한들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까칠한 상급자에 대해 직원들이 모여 뒷담화를 하는 자리에서 혼자 입을 꾹 다물고 호응조차 하지 않고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없는 데서는 대통령도 욕하는 세상인데 어찌 사람 사는 세상에 남의 얘기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발설한 타인의  이야기를 그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전달될 때는 전달자를 통해 재구성된 내용으로 전달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휴직 전 근무지에서 mbti 검사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테스트의 진행과 해석을 전문가가 도와주는 고가의 mbti 검사였다. 테스트는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본격적인 테스트에 앞서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성향을 먼저 적어내고 테스트 후에 자신이 적어낸 것과 결과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했다. 나는 내가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외향적인 성향에서 내향적인 성향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성향을 내향적이라고 적어냈다. 하지만 테스트결과 나는 다분히 외향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얼마 후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며 역시 타고난 성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는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또 그 친구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mbti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친구는 나한테 “너는 결과가 외향적이라고 나왔는데 너가 내향적이라고 우겼다면서”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간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그 친구한테 해줬던 나의 이야기를 그 친구는 재구성하여 다시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검사결과를 부정하며 테스트를 진행했던 전문가에게 따져 물은 것처럼 말이다.     

 

내가 복직을 했을 때 내가 사용할 공간이 매우 지저분한 상태였다. 나는 지저분한 사무실을 조금씩 정리해 나갔고 금세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깨끗해진 사무실을 본 동료 여직원은 전임자와 매우 친한 직원이었는데 전임자는 깔끔하게 정리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면서 내가 와서 사무실이 너무 깨끗해졌다며 웃으며 좋아해 줬다. 하지만 그 상황은 누가 봐도 동료여직원이 전임자의 험담을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만약! 어떤 누군가가 전임자에게 “있잖아. ○○가 사람들 앞에서 너가 사무실 정리를 잘 못했다고 그렇게 말을 하더라”라고 은밀하게 말을 전한다고 해보자. 그 순간 동료여직원은 전임자를 험담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전임자가 동료여직원한테 “너가 사람들 앞에서 내 얘기를 그렇게 했다며?”하고 따진다면 반박을 할 수도 없다. 자신이 한 말은 맞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 전달자‘를 조심해야 한다. 가볍게 한 말이 전달자로 인해 재구성되고 뉘앙스에 따라 험담이 아닌 것이 험담이 되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타인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이 너무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우리는 나의 힘든 부분을 누군가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의 환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의 험담을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을 때는 그렇게 하되, 반드시 믿을만한 사람한테 털어놓을 것을 당부했다.  

   

사기업에서 만났던 동료들과는 달리 공직생활에서 만난 동료들은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고 타인의 평판에 매우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하며 조심스러워했는데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모습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누군가에 대한 타인의 평판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 것인지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우리 부서뿐 아니라 타 부서도 많이 오고 가며 소통할 일이 많았는데 이 부서, 저 부서를 다니며 소통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람들이 하는 타직원들에 대한 평판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똑같은 A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이는 너무나 성품 좋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했고, 누군가는 치를 떨며 싫어했다. 이렇듯 자신의 경험에 따라 같은 사람에 대한 평판이 판이하게 갈리기도 하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저 그 사람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생각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손잡이 달린 컵에 손잡이가 없는 부분을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컵이 손잡이가 없는 컵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고, 손잡이가 달린 부분 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컵을 손잡이가 있는 컵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이렇듯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다 다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너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모든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쓴다. 하물며 부처님이나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삶을 사셨던 성인들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마음을 쓰고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또한, 타인에 대한 평판을 전해 들었을 때는 참고는 하되, 그것으로 그 사람을 단정 지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경험한 것은 그 사람의 일부일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컵의 손잡이가 없는 부분만 보았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도 잘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아직도 나를 알아가는 중인데 어찌 남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요즘 들어 각종 매체를 통해 인간관계의 방법론에 대한 내용을 자주 접하게 된다. 시대에 따라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도 변하는 걸까?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내용들은 나로 하여금 ’ 내가 인간관계를 잘못하고 있는 걸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했다. 그동안의 나는 친한 관계일수록 많은 것을 공유하고(소위 말해 상대방 집에 밥 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알 정도) 마음속 깊은 얘기들까지 다 드러내며, 서로의 슬픔까지도 공유하고 위로하는 사이가 진정한 인간관계라고 생각했었다.      


이민으로 인해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고등학교 때부터 오랜 기간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그 친구와 나는 서로 많은 것을 공유했다. 그 친구의 친어머니는 친구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가셨고, 지금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셨는데 동화 '콩쥐팥쥐'에 나오는 그런 어머니셨다. 그로 인해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 결핍이 있었고, 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20대 중후반 무렵이었나. 그 친구가 1년 정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는데 연수를 다녀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가 친구한테 어떤 질문을 했었는데 그 친구는 버럭 화를 내며 “너는 그런 개인적인 질문을 왜 하냐”면서 캐나다 사람들은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는다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라는 식으로 말을 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니며 모든 것을 공유했던 나로서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발끈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매체에서는 느슨한 인간관계가 바람직한 인간관계라고 말하며 상대와 많은 것을 공유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얼마 전에 봤던 심리학 강의에서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하소연을 하는 친구는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하는, 당장 끊어내야 할 인간관계로 규정짓고 있었다. 처음 그런 내용의 영상을 봤을 때는 '서로 힘들 때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하고 그러는 게 진짜 친구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영상에 공감하는 댓글이 많이 달린 것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비슷한 내용의 영상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상대방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에 소심해지게 되었다.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된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니 인간관계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인가.  

   

40대의 늦은 나이에 공직사회에 입문을 한 나는 처음 발령지에서 20대 어린 친구들과 근무를 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 나의 환영식은커녕 그 흔한 회식 한 번 하지도 못했는데, 그러던 중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던 시기가 있었다. 오랫동안 모임은 일절 없었던 터라 이 기회에 여직원들끼리 간단한 식사자리라도 갖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회식 얘기가 나오자 같이 근무하는 여직원들이 회식자리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내비치며 극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오랜 기간 사기업에 다녔던 나는, 다른 팀 회식자리까지 다 참석하며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직장생활의 묘미라 생각했는데 나와는 다른 요즘 친구들의 태도에 이질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쩌면 저 친구들의 태도가 훨씬 더 현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직장에서 만난 동료는 그저 동료로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관계가 어쩌면 더 현명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서로 서운한 일도 생기게 되고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 있는데 오히려 단순히 업무적인 협력관계로서만 대한다면 굳이 서로 감정 상할 일이 없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예전에 방영했던 어떤 TV프로그램을 통해 회식자리에 대한 요즘 20대 직장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역시나 회식을 업무의 연장선으로 보고 굉장한 스트레스와 부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이 부쩍 많아진 요즘. 다양한 매체들에서는 느슨한 인간관계의 필요성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지인들과 대화를 할 때 내가 나의 힘든 상황에 대해 과도하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점검을 하게 된다.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 어쩌면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관계에 대한 정서가 변화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고독한 1인세대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즘.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더욱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면서 이러한 정서의 변화가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힘든 마음을 타인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마음의 환기가 될 수도 있는데 세상이 점점 삭막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웃사촌의 정을 느낄 수 있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그 옛날 그 정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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