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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Jun 22. 2024

복직

살아갈 준비, 죽을 준비

신체증상은 계속됐지만 휴직상태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낫는 병이 아니었고 언제까지 경제활동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복직을 해서 동료들과 어울리고 일을 다시 시작하면 오히려 건강이 호전될 수도 있다는 작은 기대감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을이 다가올 무렵 복직을 결정했다. 처음 임용 때처럼 내 건강상태에 대한 고지를 하지 않았다가 혹시나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곳에 발령이 날까 싶어서 복직 전 내 건강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알렸다. 수시로 기운이 빠지는 등의 신체증상도 힘들었지만 극심한 청각과민증과 이명, 한쪽 귀의 청력상실로 인해 사람을 대면하는 업무를 제외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발령을 부탁드렸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내 의견이 잘 반영되어 업무시간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낼 수 있는 곳으로 발령이 났다. 보통은 동시발령으로 인해 업무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이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복직을 했을 때는 잠시나마 그곳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분께서 나에게 업무를 가르쳐주셨다. 그 직원분은 나보다  두기수 정도 선배였는데 강박적인 업무스타일과 독특한 성격으로 유명한 분이셨다. 업무를 가르쳐주는 과정에서 메모를 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배운 것을 혼자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일이 있었고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배우는 과정이라도 실수가 발생하면 동네방네 모든 직원에게 내 실수를 알리고 일을 크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일부러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해 의도된 행동이라기보다 4차원 같은 독특한 성격에서 나오는 행동들이었기에 크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고, 불편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해 주었다. 그리고 부서의 다른 여직원들과는 점심시간에 휴게실에서 소통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직원들이 성격이 밝고 명랑해서 대화가 잘 통했고 매일 점심시간이면 그들과 정신없이 수다를 떨곤 했다. 사실 나는 반응성이명으로 외부 소리에 따라 이명이 더 심해지고 청각과민증으로 인해 모든 소리가 증폭되는 것은 물론 내가 말을 하면 내 목소리까지 귀에서 울리기 때문에 대화를 하게 되면 귀증상이 더 심해지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아예 교류를 안 하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들과의 대화는 너무나 신이나다보니 대화를 하는 내내 머리에서 온갖 종소리, 둥둥 북 치는 소리, 매미소리, 밥솥 김 빠지는 소리 등의 복합음이 정신없이 울려댔지만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가 충전되는 외향적인 성격 탓인지 그런 증상들을 모두 참아내면서 그들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점심식사 후 여자 팀장님과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한 번씩 균형감각이 떨어져서 걷는 중에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수다를 떨 때나 산책을 할 때 내가 불편한 상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싫어서 복용하던 약의 효능이 최대로 오르는 시점이 점심시간이 되도록 시간을 맞춰먹고 최대한 동료들과 즐겁게 휴식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했고 일도 차츰차츰 배워나가고 있었지만 한 가지 생각 못한 복병이 있었다. 나의 건강상태를 생각해서 혼자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발령을 내주셨지만 근무하는 곳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소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귀증상은 점점 심해져 갔고 심하게 기운이 빠지는 증상은 여전히 강도를 달리하며 계속되어 갔다. 그리고 근무를 하면서 심각할 정도로 내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애초에 항암제 복용을 시작하면서부터 부작용으로 기억력 저하가 나타나긴 했지만 귀증상이 심해지면서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용량을 늘린 신경안정제 때문인지 기억력 저하는 더 심각해졌고 집중력마저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학도 아니고 산수도 아닌, 그저 숫자를 셀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물품의 수량을 파악하는 단순 업무에도 실수가 잦았고 실수가 반복되다 보니 자존감은 한없이 떨어졌다. 그동안 사회생활에서 업무능력에 대해 칭찬만 받아왔던 내가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을법한 업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갑자기 성인 ADHD라도 생겨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맡은 업무는 돈과 관련된 업무였기 때문에 숫자를 잘못 세는 작은 실수라 할지라도 그에 따른 결과는 크게 나타났고 실수가 계속되다 보니 동료직원들은 물론 상급자들까지도 나의 잦은 실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는 점점 더 위축되고 작아져만 갔다. 워낙 성품이 좋은 동료들이었기에 나를 무시한다거나 질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상황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무너져갔다. 그래도 버텨야 했기에 이것 또한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나는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이제는 이게 나라고. 계속 되뇌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항암제, 신경안정제, 불면증으로 인한 수면제까지 복용을 하다 보니 뇌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인지 어떤 일은 아예 기억에서 삭제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또 실수가 있었던 어느 날, 동료 직원에게 푸념이라도 하듯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하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 그 직원은 나한테 “그래도 주무관님은 성격이 긍정적인 것 같아요. 예전엔 이렇지 않으셨다면서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나를 무시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슬픈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 이렇게 바보가 된 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이런 나를, 이런 상황을 웃고 넘길 수밖에 없는 바보 같은 나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우습고도 슬프게 느껴졌다. 복직 후의 생활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다. 크고 작은 실수가 반복되었고 업무를 마감하는 시간이 다가올 때면 어떤 부분에서 실수가 발생했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불안장애 증상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마치 누군가가 내 심장을 손으로 부여잡고 마구 흔들어 대는 것만 같이 심장이 심하게 두근대고 흔들렸으며 온몸의 세포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몸에서 크고 작은 경련들이 일어났다. 공황장애 환우들의 증상을 보면 처음 시작은 어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이나 스트레스로 발병이 되었지만, 한번 발병이 되고 나서는 상황에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증상이 발현된다는 글을 많이 봐왔었는데 나 또한 그런 것인지 근무를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돌발상황에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동료들은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려 애를 썼다. 사실 직원들은 내가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막연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크게 실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귀증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증상이었고 점심시간이면 아무렇지 않게 동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고, 수시로 기운이 빠지는 증상의 경우에도 증상의 강도와 지속시간이 천차만별로 나타나기 때문에 남들은 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어느 때는 일주일 내내 팔팔하게 돌아다니다가도 갑자기 2-3일 동안 기운이 빠지는 증상으로 맥을 못 추기도 했고, 어느 날은 오전에는 괜찮았다가 오후에 갑자기 기운이 빠지거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기운이 심하게 빠졌다가 갑자기 멀쩡해지기도 하는 등 증상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니 본인이 아니고서야 이 고통을 실감하기도 힘들뿐더러 꾀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건강이 좋지 못한 나를 배려해 주었고 내 업무를 틈틈이 도와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동료들을 향한 미안함, 죄책감, 절망감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도 복직을 하면 오히려 건강이 호전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건강은 오히려 점점 악화되어 갔다. 복직을 하면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소음에 노출이 되는 상황이 발생을 하기 때문에 귀증상은 조금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수시로 심하게 기운이 빠지는 증상은 호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귀증상을 포함한 모든 증상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나는 점점 결근을 하는 날이 잦아지고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복직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복직을 하는 바람에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만 끼치게 되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공무원 조직의 특성상 동시발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직원들이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하고 근무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휴직 중에 보게 된 기사글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충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는 공무원 새내기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내 후임자로 오는 직원만큼은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맡고 있던 업무의 매뉴얼을 조금씩 만들고 있었는데 건강이 점점 악화되면 될수록 매뉴얼을 만드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점점 악화되는 건강상태로 인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갑작스러운 나의 공백으로 인해 다른 직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업무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 꽤나 공을 들였고 결국 나는 업무매뉴얼을 완성시키고 얼마 후 다시 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복직을 하고 근무를 한 기간이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동료들과 정이 들었는지, 마지막 근무날에는 어김없이 또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심한 공허함과 슬픔,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쯤이 되면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부르는 동료 여직원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고 온돌방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던 그 시간들이 그리웠다. 나는.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애처롭고 가엾게 느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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