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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Jul 23. 2024

아직도 가야 할 길

살아갈 준비, 죽을 준비


다시 휴직을 한 후 모든 신체증상은 더 악화되어 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 머리에서 울려대는 굉음으로 인해 아침이 되면 지옥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의료 관련 TV프로그램에 나온 한 중년의 여성은 청각과민증에 대해 “하루 24시간 산통을 겪는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명과 청각과민증은 아직 이렇다 할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한다. 혹시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검색을 해보던 중 어떤 이비인후과 의사의 블로그 글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의 환자는 이명으로 인한 고통을 이기기위해 소주에 수면제를 타서 먹는다는 사람도 있고, 단 하루도 독한 술을 먹지 않으면 1분도 잠들이 어렵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떤 환자는 이명으로 인해 우울증과 환청, 공황장애까지 생겨 직장도 못 다니고 집에만 있기도 했고, 이명으로 자살을 한 환자도 있었다고 한다. 자살한 환자의 소식을 들은 후 충격을 받은 그는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라는 생각에 이명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한 중년여성의 블로그 글에서는 청각과민증이 생기면서 근무하던 편의점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는데, 평소에는 인지하지도 못했던 편의점의 냉장고 소리가 청각과민증이 생긴 후로 괴로울 정도로 크게 들기 시작하면서 근무를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증상들은 이명과 청각과민증, 브레인잽스(머리에서 스파크 터지는 소리가 나는 증상), 브레인포그(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멍한 느낌), 폭발성머리증후군(잠이 들려는 순간 머리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증상)과 함께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계속 후려 맞는 것 같은 뇌울림 증상이 있다. 폭발성머리증후군의 경우 수면장애의 일종이긴 하나, 일부 뇌종양 환자에게도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고, 브레인잽스와 브레인포그 증상은 보통 정신과약의 금단증상이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증상이지만 나는 정신과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았고 이 모든 증상들은 뇌종양 수술 후 청력이 떨어진 그날부터 시작되었으며 정확히 시술한 왼쪽 머리에서만 증상이 발현되었다. 증상이 극심할 때면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머리에서 스파크 터지는 소리가 났고 물소리나 비닐봉지 소리가 너무 괴롭게 느껴졌으며 얼굴에 로션을 바를 때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리면 그 박자에 맞춰 머리에서 폭발음이 났고, 심지어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에도 머리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이러한 증상들로 인해 신경안정제를 정기적으로 복용하게 되었는데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후려 맞는 듯한 뇌울림 증상이 약간 완화되는 느낌이었고, 그 외 다른 증상들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러한 증상만으로도 충분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기운 빠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온몸이 땅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나지 않았으며 집 안에서조차 걷는 것이 힘들 정도의 심각한 기운 빠짐과 전신에 근육경련 증상이 있었다. 귀증상은 강도를 달리하며 매일 계속되었고 그 외 신체 증상은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참을만한 정도로, 나머지 20일 정도는 일상생활조차 힘들 정도로 심하게 나타났다. 극심한 신체증상과 함께 항암제 복용으로 인해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면서 우울감과 불안감이 극에 달하게 되었는데 심한 불안감이 올라올 때면 마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이라도 한 사람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심장이 심하게 두근댔으며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하고 우울감과 불안증상까지 밀려오자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렇게 내 삶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아름다워 보였던 자연경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좋아하던 빗소리도, 바람소리도 내겐 통곡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사는 게 무섭게 느껴졌고 머릿속에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살면서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살고 싶지 않다거나 죽고 싶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말만 그랬을 뿐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면 겁이 났다.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것도, 목을 매달아 죽는 것도 모두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전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속되는 육체적 고통을 겪을 바엔 잠시 고통스러운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죽을 생각만 하는 날도 있었는데 내가 실행에 옮기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길 반복했다.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더더욱 장기기증이라도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살한 경우에도 장기기증을 할 수 있는지 검색을 해보기도 했는데,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미 이러한 질문을 했던 질문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죽음을 갈망하는 이들의 비장하면서도 나약한 그 마음이 나와 다르지 않음에 슬픔이 밀려들었다. 휴직 후 몇 개월이 지나도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그렇게 나의 세상은 매일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복직은커녕 앞으로 어디에서도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난 사실 공무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보수적인 조직문화가 나와 맞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공무원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지가 없을 때 실행할 마지막 플랜으로 남겨두었는데 늦은 나이에 실직을 하게 되니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졌고, 최소한 폐지 줍는 할머니가 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공무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폐지 줍는 할머니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폐지 줍는 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비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고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었기에 단기합격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다. 공무원이 된다면 최소한 직업적 안정은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되어서 폐지를 줍게 될 것을 걱정했는데 할머니가 되기도 전에 경제활동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육체적 고통과 함께 우울감과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고 잠을 자는 중에도 문득 의식이 들 때면 불안감이 올라오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을 쉬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몇 년 동안 육체적 고통이 지속되다 보니 아프지 않았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외출을 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증폭되어 울려대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고 길을 가다가도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귀증상은 치료방법이 없다고 의사가 확언했고 자율신경계 이상 또한 이렇다 할 치료방법이 없으니 이 고통을 그대로 감당해 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 대단한 것을 바랐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 삶은 부서져 갔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딸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지으려고 예쁜 여자아이의 이름을 볼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해 두었던 것을 모두 지워버렸다.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삶을 끝내고 싶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편할 것 같았다. 이 모든 고통을 없앨 방법은 죽음밖에는 없었다. 완전한 소멸.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하게 소멸되고 싶었다. 나의 영혼, 기억, 생각, 감정, 감각.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로 완전하게 소멸되어 그 무엇으로든 다시는 이 땅에 존재로서 발을 내딛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이 내가 갈망하는 것이었다. 육체적 고통이 심해지면서 이토록 죽음을 갈망했지만, 그동안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 죽음으로 인해 남아있는 부모님이 고통스러운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계속되자 점점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나의 죽음으로써 고통받게 될 부모님 걱정보다는 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나는 새로운 스위스 존엄사 단체에 가입을 했다. 예전에 가입했던 단체보다 허용범위가 훨씬 넓은 단체였다. 새로운 단체에 가입절차를 마무리하고 존엄사 절차에 대해 문의를 했다. 내 상태에 대해 자세히 얘기를 해달라는 답장을 받았지만 망설여졌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증상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나는 엄마를 붙잡고 내 고통을 호소하며 큰 소리로 엉엉 울어댔다. 이 고통을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이 삶이 끝나면 나는 편안해질 것 같다고. 나를 죽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난 후에 받게 될 엄마의 고통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난 평생 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으니 내가 먼저 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통곡을 하며 울어대는 나를 보며 엄마는 한참 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리고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고통을 엄마가 대신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며 3년만 참아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3년 후에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엄마와 함께 스위스로 가서 같이 이 세상을 떠나자고.      


내가 죽음에 대해서 엄마한테 직접적으로 말을 내뱉은 건 처음이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엄마는 나의 이런 조짐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잠시라도 내가 연락이 되지 않거나 집에 없으면 엄마는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셨고 한 번은 무서운 상상이 계속되어 우리 집 문을 혼자 열 수가 없을 것 같아 경찰을 대동하고 우리 집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내가 죽음을 계속 상상하며 죽음을 갈망하는 동안 엄마 또한 내 상태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사셨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고 계시겠지만 우리 엄마는 엄마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자식사랑이 깊은 분이셨다. 엄마는 평생을 작고 가녀린 몸으로 유약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역할을 해오셨다. 엄마의 절친한 친구분께서는 나를 붙잡고 “나도 부모지만, 너네 엄마는 우리랑은 또 달라. 너네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사람이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엄마의 친구분께서 나한테 해주셨던 그 말씀이 내 마음속 깊이 남아 나를 망설이게 했다. 엄마는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 보신 적이 없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엄마는 항상 맞벌이를 하셨고, 그 힘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우리를 위해서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 4개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셨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현재까지도 요양보호사로 근무하시며 쉬지 않고 일을 꾸준히 하고 계시는데 부모님 집과 요양보호사로 돌보고 계신 할머니집의 살림뿐만 아니라 내가 부모님 집에서 독립을 한 후에는 아픈 나 때문에 우리 집 살림까지 세 집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계셨다.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청소와 빨래를 해놓으셨고 냉장고는 항상 엄마가 해놓으신 반찬과 과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엄마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냉장고 문을 붙잡은 채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내가 돌봐드려야 하는 연세가 되었는데도 아픈 나를 위해 작고 가녀린 몸으로 그 힘든 일을 다 해내고 계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이런 엄마를 생각하면 내가 편해지기 위해 엄마에게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을 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삶을 쉽게 끊어낼 수가 없었다. 3년만 더 경과를 지켜보자는 엄마의 말에 나는 한참을 흐느꼈다. 사실 나는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내 자신은 죽음으로 인해 지금보다 편해질 것이 확실했다.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는 고통을 남겨주지만 죽은 이에게는 축복일 수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나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나의 부모님, 평생 고생만 하고 사셨던 가여운 나의 부모님이 평생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야 것이 분명했기에 쉽게 목숨을 끊을 수도 없었다. 왜소한 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흐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슬픈 눈빛에 나는 조금씩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기어서라도 가자.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살아낼 결심을 했으나 이후로도 나는 몇 달에 한 번 꼴로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다며 통곡을 하고 울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신체증상으로 인해 복용하던 항암제를 임의로 중단했다. 유방암 환우들에게 매일 복용하는 항암제를 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하루라도 복용을 못하는 날이 생기면 불안에 떨 정도로 환우들에게 항암제는 절대적이었다. 죽음을 갈망하던 나였지만, 막상 항암제를 중단하고 나니 본능적인 두려움이 올라왔다. 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생과 사의 문제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초연해지려 노력했다. 항암제 중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괴롭혔고 그로 인해 때때로 죽음에 대한 심한 충동이 생기기도 했지만, 나는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에. 나는 부모님 앞에 먼저 가는 일은 불효는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뇌종양 수술을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봤자 내 자신에 대한 원망만 커질 뿐 예견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껏 살면서 많은 힘든 일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세상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는 힘든 일을 겪거나 큰 병을 진단받으면  ‘하필 왜 나한테’라는 생각을 하며 세상을 원망하고 거부-분노-타협-수용-포기의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거부와 분노의 과정은 없었다. 내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살면서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절망을 겪었던 일이 무수히 많았다. 어쩌면 내 삶을 스스로 영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소용돌이에 이리저리 이끌려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는 순간에도 내가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들로 인해 세상에 대한 분노는 없었다.      


육체적 고통을 겪는 동안 나는 많은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건지, 나는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하루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떤 한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우주가 운행되고 있다는 이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의 근원을 알아야만 비로소 내가 꿈꾸는 완벽한 소멸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그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그리고 육체적 고통이 있더라도 마음까지 무너지는 일은 없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불교철학과 마음공부에 매진했다. 나는 마음공부에 도움이 되는 영상들을 찾아보고 많은 책들을 읽어나갔다. 증상이 극심한 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수시로 기운이 빠져대는 바람에 책상에 앉아있기도 힘든 날이 많았지만 더디게라도 꾸준히 책을 읽어나가려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을 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내 마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어쩌면 이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쿤둔’을 통해 티벳의 장례풍습이라는 ‘천장’을 치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매우 짧은 장면이었지만 강렬하게 인상에 남아 영화가 끝나고 나서 천장에 대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건조한 티벳의 고원에서는 시신을 묻어도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시신이 썩지 않으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고 그러면 내세를 기약할 수도 없다는 믿음으로 인해 생겨난 풍습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보지 못하는 나였지만, 천장을 치르는 사진들은 이상하리만큼 덤덤하면서도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영혼, 내세,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내가 그 장면에서 느꼈던 것은, 그저 이 육신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저 잠시 입고 있는 것일 뿐인,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이 육신이 나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요즘, 내가 이 삶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만 끝내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어느 날 유튜브 영상을 통해 보게 된 법정스님의 다비식 장면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 개체가 소멸되어 있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함께 머리를 어지럽히던 번뇌들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 부질없는 것. 껍데기일 뿐인 이 몸을 빌려 잠시 다니러 온 여행과도 같은 삶을,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흰자위와 그 흰자위를 가득 채운 크고 동그란 아이의 눈망울에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느껴진다.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힘없이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빛바랜 흐린 눈동자에는 마치 삶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듯하다. 나의 노년에는, 내 눈동자는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 삶에서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고, 나는 수많은 선택을 하며 내가 이 삶을 이끌어 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삶은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내가 겪어야 할 것들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겪어야 했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힘겨운 이 여행길에서 지금도 수없이 무너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이 고통을 고통으로만 흘려보내지 않고 이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이 힘든 삶을 버텨내 가는 방식이다.      


항암제 중단과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나는 매일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한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때문이리라.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듯한 내 자신을 보며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내 죽음을 슬퍼하며 괴로워할 사람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살아가기를 다짐했다. 세상이 나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이 나에게 내 삶의 끝을 말하려는 건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말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직 남은 이 인생길을 비장하게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남은 인생길에서 나의 근원을 찾는 여정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 스위스의 존엄사 단체에서 메일이 왔다. 한국의 한 기자가 존엄사 단체에 가입한 한국인 회원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며, 인터뷰를 할 의향이 있으면 연락을 해보라는 내용과 함께 한 신문사 기자의 이름과 연락처, 이메일 주소를 보내왔다. 해당 기자의 이름을 검색하자 존엄사와 관련된 많은 기사들이 나왔다. 수년 전부터 존엄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써온 것 같았다. 나는 해당기자에게 인터뷰에 응할 생각이 있다고 메일을 보냈고, 이윽고 기자에게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아래는 기자와 내가 주고받은 메일의 내용이다.   

  

안녕하세요.

메일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는 존엄사와 관련해 오랫동안 취재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조력사망 허용 여부에 관심 갖고 취재 중입니다. 올해 우리나라에는 말기환자에 대한 조력사망을 허용하도록 하자는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됐지만 실제 이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 분들의 목소리는 매우 적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디그니타스에 가입하셨고, 또 구체적으로 조력사망을 원하시거나 준비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선생님께서는 병이나 고통으로 인해 안락사에 관심을 갖게 되신 건지도 궁금합니다. 또 국내에 조력사가 허용돼야 한다고 보시는지,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인터뷰는 익명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선생님의 상황이나 의견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질병으로 인해 조력사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기의 환자는 아닙니다. 3년 전,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초기도 말기도 아닌 중기의 암이었고,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순간은 두려움보다는 그저 얼떨떨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암 진단을 받은 후 환우들이 모인 카페를 가입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정보를 얻고자 가입을 한 카페에는 온갖 부정적인 글들이 넘쳐났습니다. 초기 진단을 받았던 환자가 몇 년 후 재발이나 전이를 통해 말기의 암 환자가 되기도 했고, 극심한 고통을 겪거나, 사망한 환자들의 가족들이 남긴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점차 부정적인 내용의 카페 글들에 매몰되어 갔고,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 육체적 고통과 그것을 지켜보게 될 가족들의 고통이 두려웠습니다. 수술을 잘 마치고, 다행히 고통스럽다는 주사항암치료도 면제를 받아 약으로 복용하는 항암제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치료를 해나가고 있었지만, 저를 괴롭히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연상케 하는 '암'이라는 질병을 진단받았다는 사실과

혹시라도 질병이 악화될 상황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이 제 삶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공포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든 상황에 스위스의 존엄사 단체를 알게 되었고, 저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단체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혹시나 불의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완치가 불가능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만이 남은 상황)이 된다면, 저와 제 가족을 위해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하자 점차 마음이 안정이 되어갔고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삶을 재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암진단 이후, 3년이 지난 현재는 항암제 복용으로 인한 후유증과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닥친 양성뇌종양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쪽 귀에 청력이 소실되고 극심한 이명과 청각과민증 등으로 인해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지만, 그전까지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암 진단 후 극심한 불안증에 시달렸지만, 정신과 약물치료 없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존엄사 단체에 가입한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존엄사 단체의 순기능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잠을 자듯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는 것을 누구나 꿈꾸지만, 사실상 그런 죽음은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노인분들도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자살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극심한 고통만이 남은 상황이라면  인간은 존엄하기에,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극심한 고통이 그저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한 기사글을 통해 존엄사(조력사망)로 생을 마감한 한 외국인 소녀의 이야기를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소녀는 어린 시절 성폭행으로 인해 극심한 트라우마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고, 정신과 치료도 지속적으로 받아 왔지만 소녀의 고통은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소녀는 존엄사를 원하게 되었고, 미성년자였기에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했는데 소녀의 극심한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부모님도 동의를 해서 소녀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또한, 존엄사 단체를 통해 생을 마감하신 할머니의 영상을 보면서 삶의 마지막에서 지인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삶을 기쁘고 편안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이 인상 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 자살행위나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외국의 존엄사 단체들의 방식을 참고하여 절차와 형식을 갖춰나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의 소견과 대상자의 자발적인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반대를 할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기상조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하지만, 저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준 제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하루빨리 시행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 또한 종교인이지만, 저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은 아닙니다.

불교신자로서, 어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믿고 바라는 Religion으로의 종교가 아니라 , 宗敎(종교) 로서 마음공부를 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종교인이라고 해서 존엄사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존엄사 단체에 가입을 함으로써 불안한 마음을 바로잡아 나와 내 가족이 삶과 죽음에 편안하게 임할 수 있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적극적인 삶의 주체로서, 살아갈 준비와 죽을 준비 모두를 적극적으로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죽고 싶었고, 또 너무 살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살아갈 준비와 죽을 준비 모두를 열심히 하고 있다.

아픈 몸으로 학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직업을 위해 대학 편입을 준비했고 새로 가입한 존엄사 단체에 내 건강상태를 설명하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존엄사 단체에서는 존엄사를 원한다면, 병명과 현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의료서류를 첨부하여 신청해 줄 것과 현재는 일정이 많이 밀려있어 3개월 이후에나 존엄사가 가능할 것이라는 답장을 해왔다. 티벳트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있는 정기검진을 앞두고 있을 때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고 소비를 최소화한다. 나는 지금도 늘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인식하는 삶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아가고 내 존재의 근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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