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수없는 아들이 적어내는
아버지는 기이할 정도로 무뚝뚝한 분이셨다. 정말이지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종종 폭력을 휘두르셨다. 분노와 폭력은 그의 몇 없는 감정 표현중 하나였다.
아버지께서 돌이 갓 지난 나를 장롱에 집어던지신 날, 어머니는 아버지께 이혼을 요구하셨다 한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정말 오랫동안 금주를 하셨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까지 금주를 하셨으니 정말 긴 시간 동안의 금주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비롯하여 일터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평이 좋지 않은 분이었다.
아버지는 극단적으로 사교성이 없는 분이었고 유머러스한 부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이셨다.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아버지에게서 찾아내기란 정말이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친척 어른들은 외가던 친가던 간에 아버지와 마음을 나누지 않으셨다. 추석이나 설이 되어 모든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일 적에는 외삼촌들과 이모부들, 그리고 아버지가 거실에 둘러앉아서 대화를 나누시곤 하셨는데 그들은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그들 틈에 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대화에 끼지 못하셨고, 늘 모든 선택 사항들은 아버지의 의견이 묵살된 채 진행되었다.
하다못해 매번 바람을 피우고 큰 사고나 치며 이모의 속을 썩어 문 들어지게 만들었던 이모부조차 이 씨 가족의 사위라는 일원으로 섞여 들어가 잘 지내시던데 우리 아버지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들과는 섞이지 못하셨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10년 가까이를 처가살이를 하셨음에도 외가 식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신다는 점은 정말이지 어린 나에게 이상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나는 다소 이중적인 사람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다가도 그들과 한참이나 멀어져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편이다. 나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이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질인 것만 같아서 되려 그 기질을 고쳐 보겠다며 사람들에게 질척거릴 때가 많았다. 어머니께 전해 듣기를 아버지는 그가 일하던 장안동 고가구 거리에서조차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은 분이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날 괜스레 너무나 속상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여가를 즐기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취미가 없으셨다. 아버지에게 그런 여유란 존재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지 않았다. 나는 열아홉 고3의 나이에 수학여행을 가서 처음으로 바다라는 것을 구경해 보았다. 나는 그 부분이 늘 너무나도 서러웠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애정 표현을 하신 적이 없는 분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아니 본인 마음속에 있는 것은 분노 말고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표출한 적이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게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실 어떠한 소통도 제대로 주고받았던 적이 드물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있을 때 나는 늘 어머니를 통해 조금씩 전해 듣곤 했다.
아버지에게는 예민하고 싸가지 없는 외동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늘 원망하고 무서워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 말을 늘 내게 강조하셨다. “너네 아빠랑은 그저 너 때문에 살고 있을 뿐이라고.” 난 그 말이 늘 부담스럽고 슬펐다.
그런 가족을 부양하겠다고 아버지는 몸이 부서져라 일하셨다. 고가구를 매입하기 위해 전국을 트럭을 다니고 돌아다니시며 5일을 나가면 그중 3일은 그 비좁은 1.5톤 트럭에서 주무시곤 했다. 늘 너무나도 무리를 하며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시던 아버지는 종종 엄청 큰 교통사고를 내셔서 병원 신세를 지곤 하셨다. 아버지는 채 다 낳기도 전에 병원에서 뛰쳐나와 다시 일을 하러 차를 끌고 나가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늘 아프다고 하셨다. 어떻게 저렇게 늘 아플까 싶었지만 매일 같이 어딘가가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유능하거나 세상 사는 요령이 좋은 분이 아니셨기에 아버지는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60세 가까이 노년의 나이에도 일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함"이란 단어는 아버지에게 조금도 가까이 다가와주지 않았다. 싹수가 없는 그의 아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아버지가 미웠다.
내가 아들을 낳고 아버지께 처음 손주를 보여드렸던 날, 아버지는 평생 내게 보인 적 없는 웃음과 애정을 손주와 며느리에게 보여주셨다. 나는 그게 참 정말이지 좋았다. 추후 어머니께 전해 듣기론 아버지는 세준이를 안아 보시고는 "다시 한번 힘내서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손주를 보셨으면 이제 슬슬 편하게 지낼 나이가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후 세준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정말 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평소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내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렇게 온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고 좋은 것 하나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나는 너무나 허망해서 아버지를 반드시 살리겠다며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울고 불고 길길이 날뛰었고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으려 했다. 사실 아버지는 숨만 붙어있지 돌아가신 것에 가깝다는 의사의 말 따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날, 나는 아버지가 화장터에 들어가시는 순간까지 끝없이 오열을 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싸가지 없는 아들이었던 것이 죄송하고 또 죄송해서 끝없이 서럽게 울었다.
이제 곧 아버지의 제사가 다가온다. 정말이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가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 돌아오신다면 많이 큰 세준이를 보여드리고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만약 그런 날이 오더라도 우리 부자는 딱히 살가운 표정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 같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 점은 매우 슬픈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