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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No Man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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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승원 Feb 18. 2022

면목동 블루스

고단한 서울 살이

1. 나는 중랑구 위생 병원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추운 3월, 열악한 환경의 병원에서 나를 낳다가 온 몸이 그때 다 망가졌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부모님은 그 당시 많은 부부가 그랬듯이 준비가 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오래된 집들의 작은 별채 방을 끝도 없이 전전하며 살았다. 5평이 될까 한 작은 방에 쓸데없이 크고 튼튼한 장롱이 두 개, TV 한 개, 냄비와 그릇 몇 개가 우리 가족이 가진 살림의 전부였다. 아빠와 엄마 중간에 내가 누우면 그 방은 가득 찼다. 나는 그게 썩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불편을 느끼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어린 나에게 가난은 늘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키가 크다던지, 혈액형이 B형이라던지 같은 것처럼 나라는 사람을 정의 내리는 몇몇 가지 요소 중에는 늘 가난이 존재했다. 가난은 나에게 살 떨리게 원망스러우면서도 조금은 포근한 것들 중 하나였다.


2. 나는 면목동이란 동네에서 38년째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동네가 몇 군데 있다. 면목동도 그중 하나다. 내가 한 살 때 우리 동네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길에 아스팔트가 깔려있지 않고 흙바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흙바닥은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때나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그 사진이 꽤나 충격이었다. 면목동은 늘 우울한 분위기와 따뜻함이 공존하는 동네이다. 동네 자체의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누구나 느끼는 비교적 객관적인 느낌일 것이고 따뜻함은 나처럼 이 동네에서 38년쯤 살아온 토박이나 느낄 주관적인 감성일 것이다.


3. 어릴 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에는 늘 질 나쁜 애들이 많았다. 용마산역 뒤편 산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늘 사나웠고 상상도 못 할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 아이들은 늘 화가 나 있었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명인 영민이(가명)와 종종 대화를 나누곤 했다. 영민이는 또래 다른 애들보다 20cm 정도가 더 작았다. 그래서 중 1 때도 맘먹고 속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속마음은 순진하고 착한 아이였음에도 같은 동네 형들의 영향 때문인지 몰래 본드를 분다던지, 부탄가스를 마셨다던지, 동네 누나들, 형들과 야릇한 놀이를 했던 것들을 나와 다른 친구들에게 천연덕스럽게 자랑하곤 했다. 어느 날 영민이가 자기도 형들처럼 어떤 누나랑 곧 신나게 섹스를 할 거라는 포부를 신나게 뱉어대던 게 기억난다. 나는 그때 영민이에게 “그러다 너 애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래?”라고 물어보자 영민이는 그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너도 섹스해서 생긴 거잖아! 몰라?"라고 말하자 영민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훌쩍대며 울기 시작하더니 "울 엄마, 아빠는 그런 거 안 해!!!"라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버렸다. 바보.

어느 날 교생 선생들이 학교에 왔던 때, 교생들은 그 아이에게만 유독 이상할 정도로 잘해주었다. 수업에도 관계없는 어떤 바보도 풀 수 있는 정도의 문제를 그 아이에게 질문한 다음 답을 하면 유달리 크게 칭찬을 해준다던지, 매점에 데리고 가서 그 아이만 맛있는 것을 사주며 따뜻한 얘기를 해준다던지, 그 아이가 사는 동네에 찾아가서 떡볶이도 사주고 쌀이나 김치 같은 것을 갖다 준다던지 하며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본 적 없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교생들이 왜 그랬는지 그때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순수한 동정이었다. 늘 지저분하고, 키도 작고 늘 의기소침해 있고 지나치도록 찢어지게 가난한 산동네에서 살며 공부도 못하고 착하기만 했던 그 아이를 보며 그들은 마치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를 간 선교단체 사람들처럼 그 아이를 바른 곳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어린 내가 그것을 유추했다기보다는 그들끼리 모여 쏙닥거리는 것을 잠시 엿듣고 알아챈 사실이었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아니꼬워서 교생한테 이쁨 받을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안 있다가 사라져 버릴 교생들 따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교생들은 이내 교생 실습 기간이 끝나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던 날 영민이는 정말 세상이 당장 끝날 것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그들은 영민이에게 꼭 자주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뒤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떠나갔다. 어린 나는 속으로 그들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뿌듯한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사춘기라서 더욱 그랬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역겹다고 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웃기는 짬뽕들이었구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4. 7살이 되던 해에 외할머니는 단칸방을 전전하는 우리 가족이 안쓰러우셨는지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하셨다. 나는 30평도 되지 않는 반지하의 오래된 할머니의 집이 그때까지 봐온 집들 중에 가장 좋은 집이었기에 나는 우리 집이 부잣집이라도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께서 연로하시고 큰 외삼촌이 두 분을 모시게 되자 그 집은 우리 집이 되었다. 아버지가 장기간 동안 그 돈을 조금씩 갚아나가시는 조건이었다. 지금도 그 집은 엄마가 지금도 지내는 공간이며 엄마의 유일한 재산이다. 지금도 종종 찾아가는 그 집은 나의 어렸을 적 인상과는 매우 다른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곳은 반지하라 빛이 잘 들지 않아 늘 우울하고 눅눅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바래고 낡고 해져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 집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어리고 혹은 젊은 날에 슬프고 암담한 기억들이 벽마다 바닥마다 새겨진 것처럼 보여서 그곳에 가면 빨리 도망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참 사람이란 게 간사한 노릇이다.


5. 옆집에는 호엽(가명)이란 아이가 살았다. 호엽이네 집은 고급 수입 과일을 수입해와 판매하는 일을 하시는 아버지가 있어서 비교적 면목동에서도 잘 사는 집안 축에 속했다. 옆집의 호엽이네에 놀러 가면 최신 게임기부터, 값 비싼 커다란 조이드 장난감, 커다란 레고, 컴퓨터 등이 한가득 있어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호엽이네 집에 자주 들락날락거렸다. 사실 나는 속으로는 호엽이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호엽이는 그것들을 조금 구경시켜주거나 가지고 놀게 해주는 것을 빌미로 나를 늘 바보 취급을 하거나 졸개 취급을 하곤 했었다. 게임도 자기가 질 것 같으면 게임기를 꺼버리곤 했고, 부루마불을 자기 멋대로 룰을 바꾸어서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곤 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나는 늘 악당 노릇을 해야 했고 그 아이의 컴퓨터의 버튼을 하나라도 잘못 눌렀다간 나는 온갖 핀잔을 감내해야 했었다. 호엽이는 나 말고 딱히 친구가 없었다. 그런 성격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가진 것들이 너무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기에, 그리고 호엽이네 엄마가 아주 가끔 깎아주시는 외국 과일들이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호엽이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곤 했다. 그때의 나는 호엽이가 정말 나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쁘고 비열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그 친구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 아이가 가진 것 때문에 친하게 지내려 하는 모습이라니.. 어느 날 호엽이네 엄마가 "승원이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애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라는 말을 우리 엄마에게 건네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호엽이네 엄마와 크게 말다툼을 하였고 호엽이와 나는 그걸 계기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키와 몸집이 너무 커져 키가 180cm에 육박했는데 그때 나는 학교에서 호엽이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던 중에 욱하는 바람에 호엽이를 발로 차 넘어트리고 호엽이를 몇 번이고 주먹으로 내리쳤던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호엽이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아프고 서글픈 것보다는 자기가 내내 무시하고 깔보던 아이에게 같은 반 아이들이 모두 쳐다보는 앞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에 그의 자존심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그동안 그에게 무시받았던 기억이 몽땅 치솟아 올라 한도 끝도 없이 그를 내리쳤었다. 정말이지 나는 최악인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애초에 호엽이가 그런 태도를 취하면 안 놀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가 원하는 이득이 있어서 그렇게 빌붙었으면서도 결국 그걸 응어리로 남겨둔 채 그걸 그렇게 화를 풀었던 것이다. 가난은 종종 사람을 가끔 그렇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핑계에 가깝지만.


6. 또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유난히 친했던 친구가 한 명이 있다. 상태라는 친구였는데 상태(가명)는 나 말고 친구가 없었다. 나도 딱히 그때는 상태 말고 친구가 없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친구였고 나 말고 그 누구와도 딱히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 학교에서 라디오헤드나 스웨이드, 블러, 오아시스, 콜드플레이 등의 음악을 즐겨 듣고 좋아하는 친구는 나와 상태뿐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공통 관심사였고 우리는 그 이유로 친해질 수 있었다.

상태와 나는 고등학교 때 찢어진 뒤 연락이 없이 지내다가 21살이 되어 다시 곱창집에서 만나 소주를 기울였다. 상태는 연세대 의과 대학에 합격하여 프라이드가 하늘 끝도 모르게 치솟아 있었다. 그날 그는 대학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 나를 위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원치도 않았음에도 말이다. 상태는 내가 원치 않는 위로를 끝낸 뒤 이 거지 같은 동네를 드디어 떠나게 되어 천만다행이란 말을 끝도 없이 뱉어냈다.

그와 그의 가족 들은 더 이상 면목동에 살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집안은 부유해져 있었다. 그리고 상태는 면목동의 공부도 못하고 무식하고 불량하며 폭력적인 아이들에게 벗어나 그의 지식수준과 맞출 수 있는 연대 의과 대학의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축하할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내면의 무언가가 뒤틀려 상태와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38살의 나이인 지금도 여전히 면목동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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