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호랑이의 더러운 교잡종 51사단 기동대대

여자들도 싫어하고 나도 싫어하는 군대 썰 풀어 본다.

by 강승원
51사단 기동대대의 흉장, 용호 마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호랑이와 용이 합쳐진 형태라고 한다. 뭐 이도 저도 아니란 소리지.


1. 훈련소의 훈련이 모두 끝나고 나는 중대장과 운전병 선임 한 명과 함께 내가 복무할 기동대대로 가게 되었다. 차 안에서 중대장은 나의 생지부를 뒤적거리며 훑어보며 계속 딴지를 걸었다.

“야, 너 예술하다 온 새끼야?”

“네, 맞습니다. 그림 그리다 왔습니다.”

“아 씨발, 골치 아픈 새끼 또 하나 들어왔네..”

나는 그 중대장의 말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란 것이 누군가에게 골치 아플 일이 될 수도 있다니. 지금 같았으면 물불 안 가리고 따지고 들었겠지만 그때는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는 왜 기동대대에서 골치 아픈 새끼가 되어야 했는지 뼈저리도록 알게 되었다. 왜냐면 그곳에서 예술가란 1도 필요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군대에서 색연필로 그린 그림도 첨부해본다.


2. 이등병 시절 백일 휴가를 일주일 남겨둔 어느 날 부대에 비상이 터졌다. 진돗개 실제 상황이었다. 잠이 덜 깬 새벽녘 우리 모두는 쏜살같이 군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전투 조끼, 총을 챙겨서 연병장으로 달려 나갔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실탄이 몇 탄창이 지급되었다가 이등병은 실탄을 주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져 나는 이내 탄창을 뺏기고 말았다. 그래 예술가한테 탄창을 함부로 주면 안 되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물론 농담이다.)

이내 우리를 태울 작은 버스가 몇 대 연병장으로 들어왔고 우리 모두는 술렁거렸다. 왜냐하면 훈련 시에나 평상시에나 우리는 매번 육공 트럭이라 불리는 커다란 트럭 뒷좌석에 안전벨트도 하지 않은 채 트럭 짐 칸에 옮기 종기 모여 앉아 한파든 폭염이든 가리지 않고 다녔기 때문이다. 진짜 상황이 터지면 이렇게 버스를 타는 거구나. 병장인 선임들도 그때 처음 안 사실이었다. 군대는 이유 없이 사람에게 잘해주는 곳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다들 잘 알았기에 우리는 괜스레 더욱 불안해졌다.


우리는 버스에서 대략적인 상황의 내용을 브리핑받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만한 “강화도 총기 탈취 사건”이었다. 젊은 30대의 남자가 근무 교대를 하러 가던 해병대 군인 중 한 명을 흉기로 죽이고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힌 다음 K2 소총과 다수의 탄알, 수류탄 등을 탈취한 사건이었다. 그가 잡히기 전까지는 언론 등에선 "전역한 특수 부대원 출신이 저지른 일이다.", "남파 간첩이다.", "테러범이다." 말이 많았지만 그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사건이 터지고 그는 6일 뒤에 자수 아닌 자수를 했고 모두가 궁금해하던 그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우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그저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해 복수심에 불타는 정신분열증이 있는 30대 남자라는 것이었다. 미친 씨발.


우리는 총끝에 탐침 봉이란 것을 달고 화성시에 모든 논두렁, 밭두렁과 야산을 다 들쑤시며 혹여나 그가 총을 숨겨놓지 않았을까 하고 뒤지고 다녔다. 그가 자수를 하기 전까지의 6일 동안이나 말이다. 나는 그 당시에 손꼽아 기다리던 백일 휴가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자 “꼭 뭐라도 찾아내서 장기 휴가를 받고 말리라!” 다짐하며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탐침봉으로 눈 두렁을 들쑤시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범인이어도 거기에 총기를 버릴 리 없을 텐데 윗 분들이 그러라고 하니 참 열심히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에 나는 덩굴 사이에 불에 그을린 채 몸의 반쪽은 물에 잠긴 채 엎드려 눕혀 있는 여고생을 저 멀리서 발견했다. 지금에야 덤덤하게 얘기하는 거지 그때는 정말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100미터 전부터 숨을 죽인 채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공포와 당혹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와중에도 “와 이걸로 휴가를 받는 건가?”라는 기대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웃픈 포인트다. 나는 그녀(?)에게 2m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나는 그것이 그녀가 아닌 섹스돌이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이고. 정말 잘 만든 섹스돌이었다. 심지어 여기저기 불에 지져진 채 물에 반쯤 잠겨 있었으니 더욱 속을만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허탈해져 옆에 있던 선임과 한참을 웃었다. 그 모습에 열 받은 중대장에게 뒤지게 혼나기 전까지 말이다.


3. 나는 일병 시절, 4년을 만나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우리는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그게 그쪽은 되는 모양이었다. 선임들은 그런 나를 무척이나 걱정하였는데 (인간적인 걱정이라기보다는 탈영이나 사고 치는 게 걱정이었다랄까?)

다행히도 헤어진 다음날 훈련이 장거리 행군이었기에 죽도록 무거운 군장과 끊어질 듯 아픈 두 다리, 쓰러질 것 같이 더운 날씨만 생각하며 하루를 보낼 수가 있었다. 다행히 그때의 나는 일병이었기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의외로 그녀는 나의 머릿속에서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잊혔다. 4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헤어진 다음 날 행군을 하던 중에 중대장은 “야, 강승원 너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며? 너 여자 친구 면회 왔을 때 보니까 이쁘던데 내가 번호 아니까 밖에 나가면 따로 연락해서 꼬셔가지고 따먹어야겠다.”라는 둥의 개소리를 지껄였다. “아 군대에서 총기 난사 사건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 건 이런 일들 때문이구나.”라는 것을 나는 그때 새삼 깨달았었다. 매일 같이 내 목을 조르며 정강이를 까대며 쳐 웃던 장 병장보다 중대장이 더 미웠으니 말이다. 중대장은 이상할 정도로 나를 미워했고 그 감정을 하나도 감추지 않았다. 길 가다 마주치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꼭 물어보고 싶다.


5. 군대에서 제일 힘들었던 건 선임들의 갈굼과 욕설, 구타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던 행군도 처음에만 힘들었지 나중엔 바깥공기 쐬러 가는 나들이 같았다. 유격 훈련도, 혹한기 훈련도 말로만 전해 들었을 때보다 대부분 할만하구나 라는 느낌이었다. 그딴 것들보다 군대에서 정말로 힘들었던 건 내가 군대에서 보내는 2년의 시간이 극도로 무의미했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가 쓰던 총은 모두 영점이 어긋나 있었고 81MM 박격포는 6.25 전쟁 때 즈음에 생산되어 지금까지 사용하느라 포다리는 덜렁거리고 제대로 된 조준이란 것이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우리는 군인이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 못 되었다. 일반 병사들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고 하는 기동대 (후방 부대는 수색대를 기동대라고 부른다.) 출신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북한과 전쟁이라도 나면 서로 쏴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지경의 군인이라 부르기 민망한 군복만 입은 고등학생과 다름없는 천둥 벌거숭이일 뿐이었다. 선임들은 늘 자조적으로 “야, 진짜 전쟁 나면 우린 그냥 총알받이인 거야. 알아?”라고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그 대사는 병장이 되었을 때 내가 물려받게 되어 나는 틈만 나면 그 후임들에게 그 말을 자주 하곤 하였다. 근데 정말 총알받이만 필요한 거라면 그냥 전쟁 났을 때만 부를 것이지 왜 젊은 청년의 소중한 2년을 빼앗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딱히 내가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견뎌내기 힘들었다. 2년의 허송세월은 사람을 꽤나 지치게 했다.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나라를 지키고 왔다는 자부심이 전혀 없다. 일반 병사로 육군을 갔다 온 사람이라면 솔직히 내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아직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젊은 남자애들만 보면 아무렇지 않게 말하곤 한다. “웬만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군대를 빼. 군대 갔다 와봤자 메리트는 아무것도 없어. 사람들이 너 군대 가면 철든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거기 가서 배우는 거라곤 그저 부조리를 못 본 척 참아내는 법, 윗사람 기분이 어떤지 눈치 보는 방법, 무능한 데다 멍청하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어도 선임이랍시고 아랫사람 고름 짜내는 법 정도나 배우고 돌아와서 젊은 애들한테 꼰대 소리나 듣게 될 걸?”이라고 말이다. 우리나라의 갑질 문화, 직장 내 괴롭힘과 부조리 문제, 형식적이고 과도한 보고, 후진적 업무 관행, 말로만 외치는 혁신 등의 대한민국 기업 문화의 문제점의 시작점이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하고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군대에 가보면 모든 궁금증이 다 풀릴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요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아마 대한민국에 10년 뒤쯤 기업 문화의 또 다른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그것도 다 요즘의 군대 문화 때문일 것이다. 장담한다.


6. 현석이는 나의 맞선임이었다. 군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나 때문에 현석이는 후임 관리를 잘 못한다며 더 윗선 임들에게 종종 갈굼을 당하곤 했었다. 현석이는 조금 양반 같은 타입이라 나를 그런 이유로 괴롭히거나 노골적으로 갈구진 않았다. 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감정을 숨기진 않았고 그것을 종종 대놓고 표현하곤 했었다. 그래도 나는 별로 상관없었다. 나도 현석이가 싫었으니까. 아마 군대 밖에서 마주쳤어도 우리는 서로를 싫어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아주 가끔 그런 사람이 있지 않나? 그냥 우연히 마주치자마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거부감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현석이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이였을 것이다. 현석이와 나는 1년 8개월 동안 내무반 옆자리에서 동거 동락하던 사이였음에도 사적인 대화를 단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현석이랑 근무를 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두 시간 반 동안 전혀 대화가 없어 지루해 죽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나를 조금은 괴롭히고 갈구더라도 수다를 떨 수 있는 선임과 근무를 나가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이상하게도 현석이가 전역하던 날, 현석이와 나는 밤을 새워서 수다를 떨었다. 그날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아마 너무나도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현석이가 다음날 아침 전역을 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끝없이 수다를 나누었다. 나중에 한번 만나서 술을 마시자는 약속까지 하고 말이다. 현석이가 전역하고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까? 안타까운 비보를 먼저 전역한 용현이를 통해 전해 들었다. 현석이가 전역하자마자 자신의 친구들과 계곡에 놀라 갔는데 홍수 때문에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오열하기엔 나는 현석이와 그렇게까지 친하진 않았고 그렇다고 무덤덤해 하기에는 그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던 것이다. 그 지옥 같은 시간들을 말이다.


7. 그 시절 군인의 봉급은 이등병 시절에는 5만 원, 병장 시절에는 9만 원쯤이 되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당연하게도 그 봉급으로 한 달을 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상병 시절부터 짬밥을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이등병 혹은 일병 시절에 나는 가끔 취사장에 끌려가 취사 보조를 하곤 했는데 그때 위생 상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부대의 짬밥이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던 탓도 컸다. 우리 부대는 정말이지 작은 부대였기에 별도로 음식을 만드는 법 등을 관리해주는 아주머니 같은 분이 없어 취사병들의 레시피가 정말 먹어주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군 시절 막바지 일 년은 라면과 냉동 만두로만 끼니를 때우며 지냈다. 그 비용도 사실 어마어마했지만 사회와의 유일한 창구였던 사이버 지식 정보방(군대 pc방), 공중전화 비용도 사회와 다를 게 없었다. 군대에는 플스를 개조한 오락기와 노래방이 있었는데 노래방은 한곡에 오백 원, 게임기도 한판에 오백 원이었다. 그게 군대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오락거리였기에 그 비싼 걸 우리는 줄 서서 간신히 즐길 수 있었다. 그 오락기와 노래방, P.X는 원스타 장군 출신의 퇴역한 아저씨가 관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퇴역하고 나서도 일반 병사들에게 빨대를 꽂아 먹고사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기생충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시절 부모들이 군 생활하느라 고생할 자식 생각에 보낸 적지 않은 용돈들은 곧장 군부대 이곳저곳으로 흘러 들어가 현역 장군들 혹은 주임 원사 그리고 퇴역한 늙은 군인들의 호주머니를 두둑이 불려주었을 것이다. 이건 군대가 젊은 애들을 볼모 삼아 그들의 부모들의 삥을 뜯은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8. 내가 군대에 있던 시절에는 유독 조류 독감 혹은 광우병 파동 등의 가축 관련 사건들이 온 나라를 뒤흔들곤 했었다. 나는 그때 당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군인 나부랭이였었고 축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마음을 차마 헤아리지 못하는 철부지 중생이였기에 사실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왜냐하면 조류 독감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며칠간이나 삼계탕이나 닭볶음탕 등이 메뉴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인당 2마리씩이나 주었기에 나는 정말이지 행복했었다. 심지어 광우병 파동 때에는 불고기를 밥보다 많이 배식받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심각한 전염병에 걸린 가축일지도 모르는데 찝찝하지 않았냐고? 군인들이 그런 게 있을 리가.. 윗분들이 먹어도 된다고 하니까 그냥 먹는 거고 선후임 막론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가지고 먹지 않았기에 그때 우리는 그냥 눈앞에 닥친 호사들을 신나게 먹어 치우기 바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간부 식당을 치우고 온 이등병 친구가 간부 식당에는 불고기가 메뉴로 올라오지 않았더라는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을 때는 조금 불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원 화성 정조대왕 능행차 행사 사진 by 아시아 경제


9. 우리 부대는 수원 화성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수원시는 매년 화성 정조대왕 능행차 행사를 진행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맨 뒷열의 병졸들의 역할로 자주 착출 되어 가곤 했었다. 나는 그 행사에 착출 되어 가는 것이 정말 휴가 다음으로 좋았다. 당일 아침에 그들이 건네주는 병졸 옷으로 생활관에서 갈아입고 준비된 버스를 타고 화성에 도착하여 그 행렬을 몇 시간쯤 쫓아 걸어 다니기만 하면 갈비탕도 사주고 한솥 도시락도 주었기 때문이었다. 씨발. 지금은 하루에 50만 원 줄 테니 해달라고 졸라도 안 할 것 같은데 그때는 참 그게 그렇게나 좋았다. 우리 대대장도 수원 시장한테 갈비탕 한 그릇 얻어 드시고 고마운 마음에 우릴 보낸 것이겠지? 정말이지 그렇게 믿고 싶다.


10. 부대에 갓 입소한 이등병 시절, 말년 병장과 함께 생활관 복도에서 불침번을 섰던 날, 말년 병장은 담배를 피우겠다며 잠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혼자 남아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키고 있었는데 복도 가운데에 위치한 화장실 입구에서 누군가 문 밖으로 얼굴만 내민 채 나를 불렀다.

“야, 강승원! 일로 와봐!”

“이병 강승원!” 나는 선임이 불러 (그 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때는 뭐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은 다 선임들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복도 끝에서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는데 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챘다. 그가 내민 얼굴과 땅의 거리는 겨우 5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내 눈에 그의 이목구비가 조금 보일랑 말랑 할 때까지 가까워졌을 때쯤 그는 “히히힉”하고 웃더니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내가 확인차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지만 내가 있던 복도는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말 나는 그 상황이 혼란스럽고 아찔하게 무서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야! 너 화장실에서 혼자 뭐해!”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말년 병장이 화장실 밖에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이병 강승원! 아닙니다!”

“야, 내가 긴지 아닌지 물어봤냐? 뭐했어 너.”

“저, 방금 귀신을 본 것 같습니다.”

“뭐래, 미친놈이.”

말년 병장과 근무를 마치고 나는 생활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낭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말년 병장은 바로 내 옆자리였는데 (원래 갓 들어온 이등병은 최고 선임 옆에 재웠다.) 갓 잠들려고 하던 나에게 대뜸 이런 말을 건넸다.

“야, 원래 우리 부대 귀신 많이 나와.”라고 말이다.


11. 말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전역하기 전 날, 대한민국 전역에 사스가 대유행이었던지라 나는 생활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위병소 옆 창고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침낭만 덮고 자야 했어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연병장 넘어 저 멀리에서 나에게 손을 흔드는 후임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유유히 위병소를 빠져나와 전역을 했다. 군생활 2년 동안의 온갖 불행들이 있었기에 그 사소한 행복이 나에게는 인생에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었다.


12. 내가 써본 에세이 중 가장 긴 글인 이 글을 마무리할 때쯤이 되니 도대체 군대가 왜 그렇게 예술하는 애들을 싫어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전역한 지 13년이 지났어도 그때의 울분을 조금도 잊지 못하고 하나하나 꼬치꼬치 적어내는 나를 보니 참 그들이 싫어할 만했다. 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말들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많다. 나중에 또 시간이 된다면 머릿속에서 다 잊히기 전에 군대 얘기 한번 또 찐하게 해야겠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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