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린 스위프트, 블링크 스테어 2019

38살의 비교적 완벽한 생일주에 대하여

by 강승원

어젠 나의 생일이었다.

38살의 생일은 늘 그렇듯 의미가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를 쓰고 자신의 생일을 챙기는 아이들이 신기했다.

많은 친구들을 불러 생일 파티를 하고 많은 선물을 받고 많은 축하를 받고 사랑받는 누군가가 되는 것에 그리도 집착하듯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을 좀 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것을 나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타인과 나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게 생일은 그냥 내가 태어났던 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올해는 생일 대신 생신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서른여덟 살 밖에 안 되었는데도 말이다.

주변에 어린 사람들이 많으면 젊은 사람은 곧장 늙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왠지 할배가 된 기분이 들어 울적해졌다.

나는 참 젊은데.


올해 생일은 술 선물을 많이 받았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정말.

사람들이 나랑 술을 자주 먹는 우리 지헌이에게 내 술 취향을 물어봤는가 보다.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말보로 쇼비뇽 블랑 와인을 잔뜩 받았다.

난 작년 겨울부터 말보로 쇼비뇽 블랑이 싫어졌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나 고맙기에 어떻게든 다 마셔야겠다.


그렇지만 지인들에게 받은 선물의 90%가 술이라 나도 좀 술꾼 이미지를 쇄신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마 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술을 안 먹으면 곧장 무뇌아가 되어버린다.

정말 평소의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일하는 기계가 되어 버린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

온종일 화만 난다.

술을 먹어야 화가 가라앉고 뭐라도 떠오르고 생각이 돌아간다.

브런치에 써진 모든 글이 사실 다 술 마시고 하는 얘기들을 맨 정신에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첫 에세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취중 사색”으로 하고 싶었다.

나는 생각이 없는 내가 싫다.

그런 핑계를 대며 난 늘 술을 마신다.


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굳이 비싼 술을 먹고 쓸데없고 하찮은 얘기를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술은 내 하찮은 영감의 연료이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먹고 비트코인, 주식 등으로 돈 버는 법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찮다.


나는 술을 먹고 인생에서 손쉽게 성공하는 법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짢다.


나는 비즈니스를 위해 술자리에 오는 사람이 싫다.

수준 떨어진다.


나는 술을 먹고 회사 일 얘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맨 정신에 하자.


나는 술을 먹고 타인에게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훈장질하는 사람들이 싫다.

술맛 떨어진다.


나는 굳이 술을 먹고도 가식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좀 그런 자들은 나의 술자리에 안 꼈으면 좋겠다.


나는 타인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이 싫다.

술이 아깝다.


나는 술을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시는 사람을 싫어한다.

술맛도 못 느끼는 상태로 또 마셔대기 때문이다.


나는 술자리에서 타인의 MBTI를 묻는 사람이 싫다.

16가지 유형을 통해 빠르게 타인에 대해 알아내려 하는 얍삽한 종자들과는 건배를 나누고 싶지 않다.


나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돈자랑을 하는 사람이 싫다.

나한테 나눠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 얘기는 민감하니 이런 자리에서 하지 말자는 사람이 싫다.

파시스트 같다.


나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신을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게 싫다.

그런 자에겐 술이 너무 아깝다.


나는 타인의 무의미한 추억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듣는 건 더 좋아한다.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순수한 태도로 얘기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면서.


나는 타인의 사소한 하루와 지루한 인생에 공감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게 좋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또한 두렵기도 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자리에서 좋은 음악과 예술, 영화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뭐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나는 정치와 사회의 시스템, 정의, 정책 등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의견이 극단적으로 달라도 좋다.


나는 그런 술자리를 잘한다.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

1.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 것.

2. 남을 바꾸려 들지 말 것.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고 서로의 생각에 대해 경청하고 토론한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것 중에 하나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다.


나는 이재명을 지지했던 사람이 좋다.

나와 달라서 왜인지 듣고 싶다.

나는 윤석열을 지지했던 사람이 좋다.

나와 달라서 왜인지 듣고 싶다.

나는 안철수를 지지했던 사람이 좋다.

나와 같아서 같이 슬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심상정을 지지했던 사람도 좋다.

심상정은 훌륭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사람이 좋다.

애써 술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려는 노력이 따뜻하다.


나는 누군가 술을 마시고 자신의 묵은 진심을 허탈하게 털어놓는 그 순간이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몇 년에 한 번 잠깐 폈다 순간 져버리는 꽃이 잠깐 동안 피어나는 순간을 우연히 바라보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을 마시고 사람을 놀리는 게 좋다.

형이고 누나고 동생이고 클라이언트고 뭐건 간에 놀려대는 게 좋다.

웃기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놀리는 것도 좋다.

웃기면 장땡이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 놀리고 놀 때엔 적어도 웃겼으면 좋겠다.

웃기지도 않은 걸로 사람을 놀리면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상처만 남는다.

나는 차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회심의 개그를 섞어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을 포인트를 잡아 적절한 타이밍에 타인을 놀리려 노력한다.

나는 그 묘한 경계를 타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술 맛을 잘 아는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정말 심혈을 기울여 술을 고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말 심혈을 기울여 좋은 술을 골라 나를 즐겁게 해주었군요.” 라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술을 산다는 것은 돈 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다.

좋은 술을 구하기 위해선 다양한 곳을 쏘다니며 찾아내야 하는 것이 때문이다.

좋은 술을 알아내기 위해 수 없이 안 좋은 술을 마셔봐야 하기 때문이다.


술 얘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또 마시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와이프와 나는 하나의 경제 주머니로 이루어져 있기에 딱히 와이프가 생일 선물을 주는 게 의미가 별로 없다.

나는 와이프에게 오늘만큼은 네가 좀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해주면 나는 그게 최고의 선물일거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와이프는 생일이니 오랜만에 안경이나 하나 새로 사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내 애착 안경이 망가져 요새 내가 많이 속상해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에 거의 400만 원짜리 크롬하츠 안경을 샀고 그 외에도 값비싼 안경 여러 개를 사두었지만 그 안경들은 장식장에 걸어둔 채 맨날 쓰는 그중 가장 저렴한 베이프 안경만 쓰고 있다.

그게 내 애착 안경이다.

어차피 난 또 안경을 사봤자 그 애착 안경만 착용할 것이다.

딱히 멋진 안경도 아닌데 그 안경이 제일 좋다.

무난한데 평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말 나온 김에 그 안경이나 수리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콧잔등 쪽의 쇠 부분이 벗겨졌고 앞면의 뿔테 부분에 너무 많은 흠집과 크랙이 났기 때문이다.

5년 가까이 쓴 오래된 안경이라 수리가 될지 모르겠다.

평생 쓰고 싶은 안경인데 꼭 고쳐졌으면 좋겠다.


일을 하고 돌아와 와이프와 와인을 한 병 마셨다. 안주는 육포와 라면이었다.

아무리 생일에 미련이 없는 나일지라도 생일까지 요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고른 와인은 오린 스위프트의 블랭크 스테어라는 화이트 와인이었다.

시트러스, 레몬, 복숭아, 스파이스 등이 잘 섞이고 탄탄함이 느껴지는 좋은 와인이었다.

오린 스위프트라는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은 늘 독특하고 품질이 좋다. 감각적인 와인 라벨에서부터 “이런 와인 라벨을 만들어내는 와이너리가 와인을 대충 만들리 없어.”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정말이지 쇼비뇽 블랑이 다시 좋아질 것만 같은 아주 완벽한 생일주였다.

화이트 와인 치고 알콜 농도가 쌘 와인이라 한병을 다 마시자마자 잠들고 말았다.

간밤의 꿈은 지독한 악몽이었던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니 그 내용은 휘발되어 날아갔지만 안 좋은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찝찝한 기분만 남은채 생일의 다음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뭐 38살의 생일이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상관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생일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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