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살만해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프리랜서의 속마음
00
아, 회사는 다 똑같구나.
돈을 더 많이 줘도, 복지가 좋아져도, 혼자 일하거나, 팀으로 일해도, 쌩신입이거나, 시니어, 파트장, 또 팀장이 되어도, 회사는 다 똑같구나.
몇 개의 회사를 거치며 위와 같은 인생의 진리를 깊이 깨우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은 너무 재밌는데, 회사엔 별 희한한 일이 너무 많아. 난 딱 일만 하고 싶은데... 다 참고 넘기려니 삶의 질도 떨어지고 수명까지 깎이는 거 같아. 회사에 다녀야 할 이유가 뭐지? 일하기 위해서? 커리어 쌓으려고? 돈 때문에? 그걸 꼭 회사 안에서 얻어야 할까? 회사 밖에서 다 하면 되잖아. 그래. 이 거대한 틀을 떠나자.'
마침 그동안 해온 업무들이 전부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 콘텐츠 제작자가 되었다.
"회사에 안 다닌다고? 불안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 있다. A는 반복되는 업무라도 그 강도가 낮고,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을 선호한다. B는 프로젝트 단위로 새로운 업무를 진행하며,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한대도 일한 만큼 보상받는 직업을 선호한다. C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급여를 조금 적게 받아도 만족한다. 나의 경우 회사 밖의 삶이 아주 만족스럽다.
01
회사 다닐 때 동료들은 말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잘하면 일만 더 생겨." 그 말이 맞았다. 한 달에 4만큼 일하는 사람도, 10만큼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월급을 받았으니까. 심지어 10만큼 일하는 사람에게는 점점 더 많은 일이 주어졌다. 사실 일 많이 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일단 일이 재밌고, 열심히 해서 성과를 쌓으면 그게 결국 다 내 포트폴리오자너. 하지만 늘 마음 한켠에 '근데 이렇게 일하면 연봉을 지금의 2배는 주셔야 할 거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내가 10만큼 일하자 사수는 날 경계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해 중간관리직이 필요해지자, 그는 "이러다 네가 나 대신 올라가는 거 아냐?"라며 눈치를 줬다. 아무리 손사래를 치고 "전 자리 욕심 없어요."라고 말해도 그의 견제는 계속됐다. 나는 몇 주 동안 그의 불안을 살펴야 했고, 얼마 후 회사에서 관리직 제안을 받았을 때 그를 떠올리며 그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몇 번을 거절하자 회사는 결국 그를 해고하고 나를 그 자리에 앉혔다.
물론 어느 정도 성취감도 느꼈다. 승진은 회사가 직원을 인정해주는 방식 중 하나니까.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로 의지하며 꽤 알콩달콩 잘 지냈던 사수가 퇴사 후 나를 차단한 것도 슬펐고, 이 회사는 언제든 나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이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것도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회사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업무 외에 마음 쓰이는 일들이.
그런데 프리랜서로 일했더니 머리 아픈 정치질이나 쓸데없는 감정노동이 거의 없다. 딱 '일만'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열심히 할수록 수입도 늘어난다. 밤낮없이 일하면 직장인일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급여가 통장에 찍히고, 좀 널널하게 쉬면서 일하면 딱 먹고 살 만큼 찍힌다. 일하는 만큼 버는 합리적인 보상 시스템. 많이 일하고 조금 버는 것은 억울하고, 반대로 조금 일하고 많이 버는 것도 불편한 내게는 딱 좋은 방식이다.
02
또 회사 다닐 땐 하기 싫은 데다 구현하기 어렵고, 그래서 시간도 많이 드는데 커리어에 도움은 안 되는 일도 시키면 해야 했다. 실무진과 하는 회의에선 "이달 말까지 마무리해달라고 하네요. 업무량을 보니 2주간 팀 전체가 1시간씩 야근하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들겠지만 해봅시다."라 말했고, 대표님과 하는 회의에선 "리소스가 부족해 이달 말까진 힘듭니다. 팀원 전체가 야근하면 어떻게 맞춰볼 순 있겠지만, 계속 이렇게 빡빡한 스케줄로 일하는 건 무리예요. 다음 프로젝트에선 인원을 확충하거나, 업무량을 조정해야 할 듯합니다."라 말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싫은 소리만 하면서 안 되는 걸 되게 해야 했다. 근데 사실은... 나도 하기 싫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할 수 있다. 업무의뢰가 들어오면 잘 할 수 있는 일, 포트폴리오에 도움 되는 일, 좋아하는 일, 해 보고 싶었던 일, 쉽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인지 곰곰 따져보고 받는다.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요구하는 건 더럽게 많은 일은 깔끔하게 거절한다. 내 일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율감만으로도 많은 불만이 사전에 해소된다. 일하다가 조금 버거울 때도 '뭐 어떡해. 해내야지. 내가 선택해서 받은 일인데.'라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괜찮아진다. <내가 고른 일>. 그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03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나자 시간이 생겼다.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중간 토막. 생선으로 치면 머리도 꼬리도 아닌 몸통. 그 피크타임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누릴 수 있게 됐다. 마감 기한만 잘 지킨다면 새벽 4시에 일하든, 밤 10시에 일하든 하루 스케줄을 자유롭게 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사 다닐 때 출퇴근 시간으로 버렸던 4시간, 하루의 6분의 1이나 되는 그 큰 조각도 다시 내 것이 됐다.
돌려받은 시간을 잘 쪼개어 회사 다닐 때 누리지 못했던 평일 낮을 오롯이 즐긴다. 미뤄뒀던 은행 업무도 하고, 병원 진료도 풀코스로 받았다. 오전에는 운동을 하고, 오후 3시가 되면 좋아하는 컵에 선물 받은 차를 끓여 마신다. 저녁이 되면 가족과 함께 요리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밤에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어떤 날은 볕을 쬐며 공원을 거닐고,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낸다. 또 어떤 날은 친구들과 밤새 마시고, 다음 날 오후 3시까지 푹 잔다. 대신 다른 날 못했던 업무를 종일 본다.
04
친구 A가 얼마 전 힘든 하루 끝에 푸념을 늘어놨을 때. "그래도 다들 이렇게 살잖아. 다 힘들잖아. 그래서 버틸 수 있어."라고 말했을 때. "맞아 맞아, 나도 힘들어. 어휴 거지같은 세상! 그래도 어쩌겠냐. 힘내보는거야~~" 라고 답했다. 그런데 나 솔직히 속으로 생각했다.
친구야 힘든 너한테 말할 수 없었지만...
너한테는 자랑할 수 없었지만...
난 나안 사실 요즘 말이지
회사 다닐 때에 비하면...
조금 살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