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나를 받아들이는 마음
물건을 사는 행위에 흥미가 없다.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나를 꾸미는 행위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 꼴은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다. 항상 똑같은 상의에 똑같은 하의, 똑같은 신발과 가방. 그래도 한 가지 애쓰는 것이 있다면 깔끔해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것마저 음식을 잘 흘리고 먹는 탓에 잘 되지 않지만.
이런 나를 키운 할머니는 굉장히 깔끔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항상 정해진 루틴 안에서 살고, 항상 적당한 몸을 유지하고, 항상 예술을 가까이하였으며, 항상 옷을 단정하게 다려 입는 사람이었다. 할머니 인생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물건 중 하나가 다리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할머니는 팬티 한 장, 양말 한 장까지 깨끗이 다려 입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항상 빳빳하려고 애쓰곤 했다. 심지어 헌금으로 내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도 항상 빳빳하게 다려 성경책 앞에 끼워 놓았다.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라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도 항상 같았다. 깨끗하면 좋잖아. 나는 깨끗한 게 좋아.
그런 할머니는 돈거래도 웬만하면 하지 않았고, 정말 부득이하게 몇 푼을 빌리게 되었을 때는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꼭 이자를 쳐서 돌려주고는 했다. 지하철 요금도 항상 성인 요금을 내고 탔고, 젊은이들이 자리 양보를 해주어도 받지 않고 자리가 없을 땐 꼿꼿하게 서서 갔다. 같은 돈을 내고 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버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암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와중에도 사람은 머리카락이 깨끗해야 한다며 내 부축을 받고 동네 미용실에 가서 간단히 이발을 하고 온 할머니를 보며 나는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가 나는 나쁘지 않았다. 남들은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할머니 나름대로의 우아함을 지킨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없이 살아도 내 안의 반듯함과 우아함은 잃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죽고 없는 지금, 나는 새로운 것을 사는 것 대신 있는 옷과 속옷 한 벌, 양말 한 짝까지 열심히 다려 입는다. 가방은 일정 시간이 되면 꼭 세탁을 한다. 머리카락은 깨끗하게 하나로 묶어 집게핀으로 고정하고 지갑 속 내용물들도 항상 정리한다. 그래도 여전히 손이 가지 않는 곳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열심히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누구보다 세련되고 우아해 보였던 할머니는 옷을 좋은 것을 사서 오래 입었고, 스타킹 하나도 올이 나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신어 몇 년을 신었다. 가지고 있던 구두들도 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으며 방 벽에 붙어 있는 뻐꾸기시계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요즘 점점 심각해지는 환경오염 문제로 제로웨이스트라는 것이 유행이라던데, 할머니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제로웨이스트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할머니가 자랑스러워졌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로, 그렇게 세련되게 보일 수 있었다니! 나 또한 할머니처럼 살고 싶었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처럼 우아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더 새로운 것을 멀리하고 있는 것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환경에까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을 하거나, 남들을 내 잣대에 대고 판단하는 짓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중에 한 명일 뿐이다. 오히려 나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가난하고, 아주 낮은 곳에 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나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고. 내 주제에 그냥 그런 목소리를 내보고 싶었다.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우아할 수 있다고.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불을 개고 물을 마신다. 그리고 기지개를 한 번 켠 다음 (허리 때문에 필수다.) 노트북 앞에 앉아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쓴다. 이따가는 글을 발행한 뒤 아침밥을 먹을 것이고, 잠시 산책을 갈 때 입을 옷을 다릴 것이다. 여담이지만 다림질을 할 때 다림질 보조제를 쓰지 않고 아주 소량의 물을 쓰는 나지만, 이마저도 환경을 해치는 게 아닐까 싶어 앞으로는 다리미 대신 수건 밑에 옷을 넣고 밟는 식으로 다림질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우아함을 쫓는 나는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비록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미약한 발전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성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면 뿌듯하다. 가난해도 우아하게 살고 싶은 나는 남의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나의 가난을 손바닥으로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려지지도 않거니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게 더 즐겁기 때문이다.
한때 남과 비교하며 저 사람이 갖는 것을 왜 나는 갖지 못하지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쟤는 저 나이에 맥북을, 헤드셋을, 무선 이어폰을 턱턱 갖는데 나는 왜 갖지 못하지. 지금에야 고맙게도 주변 사람들이 생일 선물이다 뭐다 사주어서 어느 정도 갖추고는 있지만 없어서 슬펐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꽤 길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해보면 전혀 우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추접스럽고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우아함을 쫓게 되면서 나는 물건들에 대한 욕심을 다 내려놓았다. 맥북이든, 헤드셋이든, 무선 이어폰이든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중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글 쓰는 재미를 알았고, 줄 있는 이어폰으로 열심히 노래를 들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만의 감성이 있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리진, 너에게는 너의 색이 있어. 리진 님, 리진 님은 리진 님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같은 말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들었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칭찬을 들어서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아주 좋은 것이지만 일단 나는 나 자신의 색과 분위기를 찾았다는 것이 좋았다. 우아함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에서 최대한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며 다녔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우아함은 물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명품으로, 비싼 노트북과 헤드셋과 무선 이어폰으로 생기는 건 아닌 것 같다. 우아함은 들고 다닌 지 십 년 된 백팩에서 올 수도 있는 것이고, 입고 다닌 지 5년 된 코트에서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구입한 지 꽤 된 백팩을 보면서 앞 주머니에 구멍이 났는데, 새로 살까… 잠시 고민했던 나를 반성한다. 저건 빈티지다. 리진 에디션이다. 생각하며 들고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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