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생기는 거의 모든 선택지에 '물렁물렁' 기조를 유지하는 나도,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만큼은 카리스마가 있다. 첫 장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마음에 들면 산다. 수년간의 성패 데이터가 쌓여 꽤 대쪽 같은 결단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서점에 있는 책들은 예외 없이 재밌거나 유익하겠지만 나랑 잘 맞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궁합이(?) 안 맞으면 수면제가 되거나 책장의 오브제, 화분받침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는 불상사가 생긴다. 물론 이건 내게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첫 문장의 좋은 느낌은 대부분 읽는 내내 함께 간다.
어쩌면 첫 문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내 습관은 시작을 어려워하는 성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에서든 시작의 순간엔 나를 잘 내보이고 싶은 마음에 긴장된다. 좋은 사람으로 꾸미고 포장해서 더 나아 보이고 싶다기보다, 내가 가진 면들 중 좋은 면을 보여 상대의 시간을 할애받고 싶다. 처음 가지는 관심과 흥미가 서로에게 시간을 내게 만들고, 시간을 들이면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런 시간과 기회는 파생된다. 다른 추동력이 없다면 서로를 탐색할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첫인상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항상 새로운 시작은 어렵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라는 가사는 진짜다.
뭐 하는 분이냐는 물음에 유독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요즘에는 어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간결하고 명확하게 답하고 싶다. 첫마디를 '방송일을 합니다.'정도로 간단하게 하면 너무 많은 꼬리질문이 생기고 간혹 선입견도 만난다. 어디까지를 말하면 좋을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이래서 지금까지 이랬고, 지금 하는 일은 어디서 뭘 어떻게 하는 거고... 말하다 지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첫마디에 서술형으로 설명을 하다 보면 투머치토커가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다. 그래서 하는 일을 물어오면, 나도 다시 명함 한 장으로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뭐 하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더해 요즘에 뭐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주로 과거에 알던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치면 스치듯 묻는 경우가 많은데, 같이 일 안 한 지 좀 됐는데 요즘엔 어떤 사람들과 일하냐고 묻는 건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냐고 묻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냥 정말 요즘에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냐는 사적인 질문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첫마디가 잘 입에서 안 떨어진다. '어... 방송도 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바쁘게 지낸다'는 알맹이 없는 대답을 하게 된다. 일과 후 집에 돌아오면서 상대가 내 근황을 물은 건지, 아니면 그냥 인사치레를 위한 무의미한 질문을 한 건지 다시 생각해 본다. 대답할 때 선뜻 말문을 트지 않아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도 잠깐 한다.
지금 이 글도 첫 문단을 생각하고 쓰는데 절반 이상의 시간을 썼다. 나머지는 후루룩 써 내려간다. 생각해 보니 편지를 쓸 때도 그렇다. 학생 때 나란히 앉아서 함께 팬레터를 쓰던 친구가 넌 어쩜 편지를 그렇게 물 흐르듯이 빨리 쓸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게, 하고 싶은 말은 늘 안에 차고 넘칠 만큼 고여있으니까 첫 문장만 예쁘게 터주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잖아, 이게 바로 일필휘지? 하면서 같이 웃었다. 가장 진심이 어린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래서 첫 말을 고르고 고르는데 제일 많은 시간을 들인다. 누구든 편지를 받으면 가장 첫 문장부터 읽기 시작하고, 거기서 무언가 느껴진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 테니까. 첫 문장을 잘 고르면 상대는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다 읽게 될 것이다.
내일은 되겠지 오늘은, 일단 첫마디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