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때 한 학기 동안 '인간의 가치탐색'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그 대학 학생이라면 반드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필수교양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망아지 같은 스무 살들에게 인간과 세계를 의무적으로 생각하고 써보게 하는 시간은 주로 산만하거나 지루했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동기들과 놀고만 싶던 시간, 하는 수 없이 들었던 수업은 지금 생각하면 나와 세계를 확장하는데 분명 도움이 됐다. 필수로 들었던 그런 몇 과목덕에 나는 대학에서 인생에 남길 수 있는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수업으로 내가 지적, 윤리적, 심미적 상승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는지는 의문이다. 백과사전같이 무거웠던 교재를 사물함에 처박아두고 수업에 들어가거나, 열심히 읽어도 내용이 이해가 안 돼 책대신 고개라도 처박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게 중에는 드물게 오래 기억에 남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내용도 있다. 그때 배우지 않았다면 가끔 살면서 그 내용을 생각하고 음미해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내용은 이해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교재 거의 첫 장에 나왔던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한 부분은 일부 기억이 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인데 아마도 그 내용만은 동화처럼 장면이 연상돼 머리속에서 살아남았을 것 같다. 사랑을 극적이고 낭만적으로 해석하는듯해서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인간의 완전했던 태초 모습은 마치 두 명의 사람이 등을 맞댄 것 같이 머리가 두 개, 팔과 다리가 4개씩이었다. 그런데 신에 의해 반으로 쪼개져서 살아가게 됐고, 모든 이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각자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잃어버린 반쪽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말대로라면 내 존재가 다른 반쪽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반쪽을 만나게 된다면 존재는 온전해진다. 너무 운명론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도 외로움과 고독을 느낄 때, '인간은 원래 혼자고, 외로운 존재다.'라는 해석보다 '아직 반쪽이 남아있다.'는 해석이 조금 더 희망적이게 느껴진다. 어떤 날, 원인을 모르겠는 허전함을 느낀다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희망적인 처방이 된다.
약간의 변형도 가능하다. 기다리던 소식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 때, 기대했던 결과가 아님을 알았을 때 실망스럽고 좌절한 마음을 처리할 때도 아리스토파네스의 해석은 유용하다.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반쪽이 있다, 나에게 열리는 문이 있다, 이번 문이 아니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꼭 온전한 존재를 완성할 반쪽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를 채우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조금 애처롭게 느껴지나? 그렇다 하더라도 '있는 걸까?', '없을지도 모르지' 일 때보다 '있다'라고 믿으면 다시 찾아 나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은 더 많은 의미와 깊이, 해석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대도 표면적인 글자 그대로를 읽어 '멈추지 말고 일단 가보자고~~~~'라고 긍정적인 희망회로를 돌릴 때나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찾았다 내 사랑~~~~~~~'과 같은 조금 성급한 고백을 할 때 소환하면, 아리스토파네스께서 많이 싫어하실까? 아직 나에 더해질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과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온전해지고 싶은 마음, 더 완성되고 싶은 마음을 그 철학자는 이해해 주실 것 같다.
내일은 되겠지 오늘은, 일단 반쪽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