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이 Jun 23. 2024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구인이라면 어느 곳에 서있어도 머리 위 2만 km 상공에는 반드시 4이상의 GPS 위성이 떠 있다. 당신이 신호를 보내면 그중 삼각편대로 떠 있는 3개의 GPS가 당신의 위치를 3차원 좌표값으로 도출해서 당신이 가진 지도에 표시해 준다.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내비게이션의 원리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글자 그대로) 아래턱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게... 된다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늘 바깥 2만 km에 계신 무려 석 대의 위성들께서 협연을 통해 딱 한 지점을 찍어주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도 실시간으로 변하는 위치를 알려주다니. 그것도 지도에 표시까지 해준다. 이게... 되는 거구나? 위대한 인간 기술문명의 산물이 아닐 수 없구나 내비게이션.


 그러나 현실을 사는 지구인에게 내비게이션의 원리는 안중에 없고 그저 애꿎은 기계에게 시비걸기 바쁘다. 이렇게 느려터져 가지고 어디다 쓰겠니(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쓰고 있음), 왜 이렇게 어리바리하게 구는 거야 정신 못 차릴래(정신 못 차리는 건 나 자신) 등등 매 순간 내 위치를 알려주느라 힘쓰는 2만 km 상공의 위성에게 귀가 있다면 실로 분노할 만큼 처우가 좋지 못한 게 내비게이션의 현실이다. 게 중 화풀이가 절정인 순간은 아마도 안내된 경로를 따라가다가 실수로 이탈했을 때가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삶에도 최적의 경로가 있을까? '최소 시간 경로로 안내' 옵션이 있다면 목적지를 어떻게 설정하냐에 따라 최적의 경로가 있을 것도 같다. 1년 8개월 동안 회사를 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그 시간은 '최소시간 경로로 목적지에 도착'이었으면서 동시에 '경로 이탈' 이기도 했다. 도착지가 어디로 찍혀있냐에 따라서 같은 시간도 다르게 느껴지는 게 신기한 일이다.


 방송을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가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회사의 위치도 좋았고 무엇보다 안정성이라는 큰 장점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20대에게 이직성공은 커다란 도착지였다. 방송국에 다닐 때 경험해보지 못한 회사생활의 즐거움이 있었다. 조근, 석근에 따라 출근시간도 다르고 프로그램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방송국과 달리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쌓는 소소한 재미가 새로웠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커피 마시며 수다도 떨고, 주말엔 시골집으로 다 같이 몰려가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어떤 회식에서는 팀원이랑 몰래 나와 숙취해소제를 사 먹고 어떻게 도망갈지 작전을 짜기도 했다. '경제활동'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안심하면서도 나중에 돌아봤을 때 지금의 시간이 경로를 이탈한 게 되는 건 아닐까 끊임없이 반문했다.


 이 일을 3년 뒤에도,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할 수 있을까? 하루에 9시간씩 하는 일이니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3년 차, 5년 차, 시간이 쌓일수록 커리어를 만들어 가고, 그러기 위해 도전하고, 채워가는 직장생활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럴수록 느리더라도 내가 가야 할 경로에서 이탈한 것 같았고 더 늦기 전에 경로를 재탐색하겠다고 결정했다. 퇴사하고 다시 방송을 시작하고 나서는 20대에 다른 길로 들어갔다 나온 게 잘못됐던 선택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럴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사무실에 간식이 도는 날 아이스크림이 나온 적이 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옆자리 동료가 고맙게도 내 몫을 챙겨서 냉동실에 넣어놓았다며 가져다 먹으라고 했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같은 팀의 다른 동료도 내가 없는 걸 보고 포스트잇에 내 이름을 써서 챙겨놓았다. 앞으로 하게 될 사회생활에서 오래도록 불씨처럼 가져가게 될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는 1년 8개월은 20대 초반에 방송국에 입사해서 겪지 않아도 됐던 사건들을 겪고 받을 필요가 없었던 상처들을 받아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닫았던 나를 매만져보는 시간을 줬던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내비게이션에게 내 인생을 최적의 경로 지도에 표시해보라고 한다면 마치 경로를 이탈한 것처럼 보이는 돌출된 그 기간을 어떤 모양으로 표시해 줄지 기대된다. 내 지나온 삶의 행적은 도착지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느냐에 따라, 경로를 탐색하는 옵션에 어떤 조건을 거냐에 따라 아주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상공 2만 km의 위성들도 3차원 좌표값이 아니라면 지금 내 위치를, 방향을, 속력을 알려줄 수 없다. 당장은, 나만이 그걸 알고 있다고 마냥 믿고 스스로의 내비게이터가 되는 수밖에.



 내일은 되겠지 오늘은, 일단 최적의 경로로 안내중입니다.


이전 05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