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by 호이

오늘의 신청곡 : 바람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기억의 바람
변해가는 거리에 다시 불어오면
잠시 손을 흔들어봐


곡 윤하 작곡 TADA SHINYA 작사 윤하




이 노래는 계절과 상관없이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날,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려서 산발이 된 채 걸을 때 듣기 좋아하는 노래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치맛자락을 샤랄라 흔들 정도의 미풍 말고, 이야, 이거 이럴 거면 드라이를 하지 말고 나올 걸 그랬잖아? 싶은 그런 바람. 윤하의 맑은 목소리가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하게 느껴진다. 아무도 만질 수 없는 목소리는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기억을 불러오기도 는데, 그게 참 신기하게도 아무도 만질 수 없으니 고즈넉하면서도 아무도 만질 수 없어서 쓸쓸하다.


랜덤 하게 불려 나오는 기억들은 의외로 싱그러운 재질일 때도 많다. 얼마 전엔 친구와 수원의 어느 광장을 걸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이 노래를 떠올렸다. 그 틈에 친구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렸나 보다. 친구가 갑자기 멈춰 서서 광장 돌바닥에 새겨져 있는 한자를 읽어달라고 했다. 갑자기? 한자를? 못 읽는데? 그렇게 당당할 것까진 없었지만 내 눈에 고급 한자였고 휴대전화를 주섬주섬 꺼내 현대 문명의 힘을 빌려 읽어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깔깔 웃으며 자기도 못 읽는다고, 너도 못 읽을 걸 아는데 그냥 한 번 시켜봤단다. 우리 한자 자격증 수업 동문인데 둘 다 한 글자도 못 읽는 모습 일관성 있고 좋다면서.


겨울방학 아침수업이었던 그 한자 수업은 우리 둘이 자체적으로 중도 하차했기 때문에 한자를 제대로 배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강의는 내가 다니던 학교도, 친구가 다니던 학교도 아니고 그냥 기숙사 바로 앞에 있는 남의 학교에서 열린 강의였다.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야 없는 것보다 좋지만 대학 1학년 방학 기간에 아침 9시부터 매일 들어야 할 만큼 긴급한 자격은 아니었을 텐데, 그걸 왜 듣게 되었지? 기억이 흐릿해 물어보니 내가 듣자고 했단다. 오, 열정이 남달랐네 과거의 나. 한자 강의를 신청하던 그때로부터 1,2년만 지나도 아침 강의를 안 들으려고 수강신청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아직 1학년이라 많이 정열적이었네, 하면서 웃었다.


한자는 1부터 10, 그리고 하늘 천부터 시작해서 집 우, 집 주까지 배운 것 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도 그때 친구랑 같이 먹었던 메뉴들이 기억난다. 강의에서 중도하차할 떡잎이었던 것이 분명한 게, 수업 중반 즈음부터는 늘 점심메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고 주로 그 앞 맥도널드에서 세트를 포장해서 신나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난 아직 침대에 누워있고 친구는 내 방으로 와서 얘가 갈 것 같은지, 상태를 살펴보고 '갈래? 갈 거야?' 물은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꿀잠을 잤다고 회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태도의 학생인가. 그래 그렇지, 그래야 우리가 서로 기억하는 우리의 모습과 일맥상통하지. 수원의 낯선 광장을 걸으며 바람을 맞으니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기억의 바람 속에서 우리 둘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뿌듯하면서 또 아늑했다.


종종 이 노래가 쓸쓸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기억으로부터 멀어진 지금, 아무리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결코 다시 만질 수도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같이 있대도, 함께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바람처럼 흔들린대도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근데 얼마 전에 아이유의 팔레트에서 아이유의 커버 버전으로 이 노래를 듣게 됐다. 가수의 음색과 창법, 해석이 달라서인지 또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쓸쓸함보다는 어쩐지 따뜻하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그 시간은 그런 채로 두고, 가끔 불어오는 기억에 몸을 맡겨도 보며, 그런 채로 둘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중하다고도 생각해 본다. 지금 이 시간도 바로 잠시 후면 그 기억의 바람 속으로 불려 들어갈 것이다. 언제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불어올 때 손을 흔들어보는 것뿐. 어김없이 바람은 불어오니까 기억도 그럴 것이다. 다시 만질 수 없어도 그 속에서 우리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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