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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r 28. 2024

봄비는 꽃을

피우고 지우고

식사 한 번 하시죠? 그래? 오늘 할까? 오늘은 비가 와서 다음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그의 성격을 바로 보여주는 대화다. 즉각적이다. 말을 꺼낸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다. 시간을 봐서 별 일 없이 괜찮으면 적당한 때에 한번 보자는 것이었는데, 그는 말이 나온 김에 특별할 게 없으면 당장이다. 


비를 핑계로 늦춘 만남인데 오늘도 비가 온다. 벚꽃이 필 듯 말 듯 봉오리가 발갛다. 지구 온난화로 열흘 일찍 개화할 거란 예보는 날씨는 잘 맞춰도 꽃에는 쉽지 않은가 보다. 어느 동네는 꽃이 없는 꽃축제를 한다. 춘설이 내리는 동네도 있을 정도로 춥다. 벚꽃이 한창일 때는 비가 한 번 오면 후루루 꽃잎을 다 떨구던 아쉬운 봄비가 아니던가.


몇 년 전 길에서 만난 동네 형의 걷는 자세가 이상했다. 땅만 쳐다보고, 등이 구부정하고, 걸음이 무겁게 느리고, 얼굴이 부어있었다. 지나가는 투로 괜찮으시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죽을뻔하다 살았다며 이제야 겨우 목숨만 건졌단다. 그때 모습은 정말 가기 싫은데 억지로라도 가야만 하는 사람의 걸음을 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있었구나. 길을 막아서고 계속 물을 수는 없었다. 


나 먼저 도착했다. 오고 있나? 네, 가고 있습니다. 거의 다 왔어요.

내 밥 위에 고기를 한 점 올려주면서 그는 그 당시의 일을 읊는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처럼 그땐 그랬지라며. 또 월세를 올린다는 집주인의 말에 그는 이참에 가게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좀 장사가 될만하면 늘 근물주가 오는 게 더 이상은 싫었단다. 큰맘 먹고 근처 신축 건물의 상가를 분양받아 옮겼다. 그렇게 월세로 계속 뜯기기보다 내 것에서 맘 껏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기존 고객들도 있고, 또 나름 자신도 있었던가 보다.


그 주상복합 건물은 앞뒤로 도로가 나있고, 버스 정류장도 있었고, 건물도 랜드마크처럼 눈에 잘 띄었다. 그런데 사람의 속성상 가던 곳을 가는 경향도 있지만, 길을 건너 그 상가에 간다는 것은 마치 강을 건너가는 것처럼 귀찮은 일이다. 대체 불가능하다면 몰라도 그렇게 절실하지 않으면 대용품을 찾기 마련이다. 아무리 단골이라고 해도 걸아서 가는 길에 매번 신호를 기다리고 건널목을 건너고 다시 돌아서 반복하는 길이 불편했다. 


일 년 넘게 장사는 안되고, 의욕에 넘치던 그는 한 달 살이 삶을 버티기도 버거웠다. 절실했다. 제법 잘 되던 장사가 어떻게 이렇게 휑할 수 있을까. 빚도 빚이지만 잘 나가던 사람이 단 돈 얼마에 손을 떨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니 사람이 비참하게 느껴졌단다. 폼 잡기 좋아하던 그였기에 쉽지 않았으리라. 죽음까지 생각했었단다. 다 정리하고 나면 남는 돈이 얼마나 되나? 그 돈으로 처자식은 얼마동안이나 지낼 수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견디는 날들이 지속됐다. 


주변의 연락을 피하게 되고, 스스로 마감을 지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 나날이 시달릴 때 몸은 알아서 망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등이 쪼개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병원에 검사하러 갔더니 즉시 입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심각한 심비대. 부풀 대로 부풀어 심장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폭발하기 직전에 병원을 찾아왔다는 설명이다. 만약 응급하다고 단순히 판단하여 수액주사를 맞았다면 바로 끝인데 다행히 운이 좋았단다. 절대 안정. 일주일을 앉아서 수면. 그리고 지금. 평소에 꾸준히 해왔던 운동이 그를 살린 것이란다. 


그는 내게 이른다.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스트레스가 그렇게 무서운 거라고. 별 일없는 편안한 생활이 복이라고. 탈이 날 때는 눈에 뻔히 보이고 알아도 피할 수 없다고. 어어어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헤맨다고.


이번엔 오늘의 봄비가 벚꽃을 활짝 피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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