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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Jun 01. 2024

양파 속은

겨울 품은 여름작물

월동 작물은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심어 늦봄이나 여름 초입에 거둔다고 한다. 반적인 작물처럼 봄에 싹을 틔워 여름의 열기를 흡입하여 한껏 성장하다 가을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결에 껍질을 굳히며 열매 맺는 과는 다른 과정이다. 월동 작물은 열기가 아니라 겨울의 냉기를 품은 것이다.


겨울 내내 찬 바람에 웅크려 추위를 견딘 양파는 봄부터 본격적으로 키가 큰다. 한파를 버티는 동안 성장은 보이지 않아도 내부에서 봄날을 준비한다. 날이 풀리면 눈에 띄게 푸른빛을 발한다. 한참을 크던 양파가 때가 되면 싱싱하게 자라던 줄기가 푹 꺾이고(도복) 잎이 끝부터  마른다. 거둘 때가 된 거다.


뿌리를 거두는 작물이어서 잎과 줄기 쪽으로 상승하던 힘이 꺾이면서 그 뻗던 기운을 뿌리 쪽으로 모은다. 양파는 더 굵고 단단해진다. 한창 열기가 위로 발산시키는 계절에 오히려 양파는 그 열기를 내부로 수렴시킨다. 매운 겨울 향기를 품고서. 추위를 겪고 난 자람의 안식일까?


거둔 양파 한 알을 들고 껍질을 벗긴다. 겉껍질을 까고 속을 벗겨도 씨앗은 보이지 않는다. 양파는 그 속을 감춘 듯이 또 껍질이 나타나 켜켜이 감싼 모양이 궁금증을 더 부른다. 꼭 속에 뭔가 더 있을 듯하여 계속 계속 하얀 속을 까보게 된다. 그렇게 들어가다 보면 핵심에 더 다가갈 것 같아 계속 까보지만 맨  속엔 아무것도 없다.


손톱에 매움이 묻어있고 눈물이 흐른다. 실체 없이 텅 빈 양파 속은 포장지속 포장의 포장으로 끝난다. 러시아 인형처럼. 한두 층의 껍질 벗기기로 일찍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호기심은 끝을 보고 나서도 의문을 남긴다. 아니야 아니야 이게 다가 아닐 거야라며. 더 까보면 깔게 계속 나올 것 같다며.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그 많은 껍질들이 속이며, 끝없는 속이다.


깨달음의 본질은, 깨달을 게 없음을 깨달아, 더 이상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깨는 데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모든 과정이 그 자체로 궁극이다. 다다르려는 목표에 다가서는 순간들이 이미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가는 겨. 더 나은 뭔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나 환상 짓지 말고, 지금처럼 잘 살아가는 거야. 지금 이렇게 열심히. 매운 양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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