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둘이 사는 이야기 8
너는 이미 내가 취했다며 그만 마시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들어 네 눈 앞에서 흔들고, 너는 못 말린다는 듯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새벽의 나는 화장실 변기통을 붙잡고, 아침의 나는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몸에서 알코올이 다 빠져 나갈 때까지 잠을 자야 한다며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듯이 잔다. 깨어나서도 움직이는 순간순간마다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아프다며 징징댄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기로 한 일이 있었는데, 혹은 함께 가기로 한 곳이 있었는데. 아예 다른 이와의 약속이면 최선을 다할 수도 있지만,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에 나는 아직도 인중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알코올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런 주말이 한두 번도 아니니 네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날 법도 하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어이 없다는 듯 너털 웃음을 한 번 짓고, 자기 말 안 듣더니 꼬숩다는 듯 한 번 낄낄거리고는 나를 걱정한다. 그리고 전날 밤 나를 더 말렸어야 했다고 미안하다고 한다. 힘들면 움직이지 말고 쉬라며 나를 눕혀놓고는 식사를 차려 낸다. 늦은 밤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침대에 자빠져 있던 내가 '오늘 하루도 나 때문에 다 망쳤어. 아무것도 못 하고.' 라는 자책으로 사과의 마음을 전하면 너는 아프지나 말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걱정과 장난기가 섞인 그 눈빛과, 방금 설거지를 하고 와 약간 차가운 너의 손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잠든 너의 곁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당장 눈만 감으면 꿈 속에 빠질 것 같은 날에도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날이 하나 둘 쌓인다. 완전히 잠이 깨면 옆방에서 책이라도 볼 텐데,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 채로 혹 네가 깰까 조심히 자세만 여러 번 바꿔본다. 너는 눈을 감은 지 십 초도 채 되지 않아 고르게 숨을 내쉰다. 어차피 잠도 안 드는데 네 얼굴이나 열심히 쳐다 본다. 약간 벌린 입과 잔뜩 찌푸린 미간이 예쁠 리 없는데도 자꾸 보고 싶어진다. 출근하는 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잠든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가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다.
몇 분이 더 지나면 너의 숨은 더 이상 고르다고 할 수 없다. 따라하기도 어려운 변박으로 코를 고는 너는 어느 순간 숨을 들이마셔놓고 내쉬지 않는다. 수면 무호흡증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 끝까지 숨이 차오른 것 같은 네가 10초 넘게 숨을 내뱉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네가 너무 특별한 사람이라 자다가 숨이 막혀 죽는 예외적인 케이스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이 드는 것이다. 물론 너는 곧 다시 거칠게 숨을 내쉬지만 이 주기가 반복되면 내일 아침, 네가 오래 잤는데도 피곤하다며 까매진 얼굴로 출근할 것을 안다.
옆으로 돌아 누우면 너의 호흡이 조금 더 편해지기에 나는 잠든 너의 귓가에 "조슈아, 옆으로 돌아 누워서 자." 라고 속삭인다. 대부분의 경우 너는 눈을 뜨거나 대답을 하지 않고 얌전히 돌아 눕는다.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나의 말을 듣지 못 하고 그대로 누워 있거나, 몸은 그대로 둔 채 얼굴만 돌린다. 이건 효과가 없다. 이 때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옆으로 누워 자라고 다시 한 번 말한다. 이쯤 되면 "응~" 대답과 함께 돌아눕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로는 눈을 번쩍 뜨고 한 번 더 이야기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너의 귀에 얼굴을 갖다 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돌아누우며 나에게 사과를 한다. 내가 너 때문에 잠들지 못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음 날이 되면 기억도 못할 만큼 잠에 취한 채 너무 미안하다고 한다.
나의 불면과 너의 코골이는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너의 코 고는 소리는 나의 수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차피 너의 코골이가 날 못 자게 하는 날이면 난 그냥 옆방에서 잔다. 너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넌 미안하다고 한다. 그 잠결에 나에게 피해를 줬을까 걱정하는 너의 등을 한참 바라보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너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두릅과 산마늘이 있어 그걸 반찬 삼아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해둔 밥이 없어 네가 도착하기 직전 현미밥을 안쳤다. 백미보다 몇 배는 더 걸리는 그 시간을 기다리던 도중, 컨디션이 안 좋아 잠깐 잠든 너를 바라보다가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밥이 다 되었을 즈음 너를 깨워 이야기한다.
"나 신전떡볶이 먹고 싶어. 어묵튀김이랑 잡채말이에 떡볶이 국물 잔뜩 묻혀서 쿨피스랑 같이."
잠들기 전, 두릅 무침을 해주겠다고 레시피까지 다 찾아본 너인데 너는 내가 이야기하자마자 배달앱을 켠다.
"너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대부분의 경우 나는 먹고 싶은 게 많다. 그리고 한 번 생각난 건 근시일 내에 먹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음식을 먹는 그 순간까지도 안절부절 못하며 집착한다. 생리통으로 앓아 누웠던 날 갑자기 푸딩이 먹고 싶어져 진통제를 삼키고 나와 집 근처 마트 5개를 돌기도 했다. 드디어 푸딩 뚜껑을 열었을 때는 집에서 나온 지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였다.
하지만 너는 나의 식탐에 단 한 번도 무심한 적이 없었다. 순간순간 바뀌는 마음에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평일동안 맛집을 조사해 주말 데이트 때 먹을 메뉴를 정해 놓고도 너를 만나러 가는 그 길에 다른 메뉴에 꽂혀 안절부절 못 하는데, 너는 자연스레 "오늘 여기 안 가도 돼.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 라고 묻는다. 내가 말한 게 당기지 않아도 너는 우선 내 메뉴를 따라간다. 혹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아 (갑작스레 메뉴를 바꿀 때가 많아 브레이크타임이나 휴일을 피해 가지 못한다.) 2순위 식당을 가게 되면 그제서야 너는 수줍게 웃으며 "사실 나 이게 더 먹고 싶었어." 라며 고백하기도 한다. 그렇게 밥을 먹으며 이거 다 먹으면 레몬파운드케이크를 잘 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이따 저녁은 뭘 먹지, 하며 쉼없이 음식 얘기를 늘어놓는 내 앞에서 너는 언제나 맞장구를 치고 함께 맛집을 찾아준다. 함께 찾은 새로운 맛집에서 여기 너무 좋다며 네가 눈을 빛내는 순간, 나는 함께 눈을 빛내며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