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된 순간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 여름의 끝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을이 시작된 순간은 정확히 알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즈음 사이에 이 여름을 열성적으로 살아온 그대에게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봅니다.
올여름의 긴 더위는 너와 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였으리라!
한 여름에 그토록 성시를 이루던 바닷가도 철시한 지가 한참 됐어 텅 비어 있지만,
누군가는 팔뚝이 검게 그을린 채 바닷가 피서지에서 돌아와 바짓단의 모래 알갱이를 털어내며
‘아, 올여름은 정말 대단했어’라고 중얼거린 기억을 떠올릴 겁니다.
계절이 바뀌는 이즈음이면 이 여름을 열성적으로 살아온,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까매진 얼굴을 뭉클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여름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이런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산기슭을 타고 부는 높새바람 타고 뜨거운 열기 내뿜던 날에는 베란다 건너 마당에 걸린 ‘옷가지’며 흰 셔츠들이 펄럭인다.
포송한 희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가지를 날린 바람은 마당을 건너 대청마루까지 날아 들어온다
바람에 잔뜩 부푼 빨래들이 눈부시다.
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을 이 눈 속으로 넣으며 이 여름의 끝을 보냈다.”
가을의 하루하루도 깨끗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름에 더러워져 얼룩진 마음과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준 흘린 말들을 모두 한데 넣고 씻어내고 싶습니다.
하얗고 희어야 할 생각들은 더 희어지고 선명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들은 더욱 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바람에 일렁이며 부풀어 오르는 기대에 흠뻑 젖었다가도 다시 차고 맑고 깨끗해진 저 옷가지들처럼
맑은 기분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물론 사소한 마찰이나 스침 정도로는 불꽃을 튀기지 않으려 합니다.
맑게 갠 날 쏟아져 내리는 빛처럼 환한 것들을 가까이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지거나 구멍 난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가을날, 내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마냥 가깝고도 부드럽게 가닿고 싶습니다.
바닷가에는 지루하고 긴 더위가 지나고, 가을을 재촉하는 세찬 소낙비에 젖은 시기에 접어드니 이제야 아침과 저녁에는 선선해진 기온변화를 느낍니다.
더위가 한풀 꺾였나 싶지만 아직은 여전히 한낯 가을 속에서도 여름이 붙잡는 끝더위는 부더 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제 여름의 끝나고 계절은 드디어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을은 성큼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이 여름을 보내고 나니 가을’은 어딘가 쓸쓸해 보입니다.
가을은 마음에만 성큼 다가오지만,
왜? 내 가을만 성큼 다가오지는 않는 걸까!
여름의 끝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을이 시작된 순간은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여름을 열성적으로 살아온 그대 얼굴 속으로 숨어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