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을 처음 본 건 고삼 때였다. 같은 반이었는데 대학이나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일한 관심은 다른 학교 여학생들과 무협지뿐이었다. 오후 수업에 자취를 감추기 감추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며칠씩 수업을 빼먹기 일 수였다. 그 후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녀석과 가까운 친구로부터 사귀던 여고생이 임신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뒤 녀석은 학교로 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안타깝지만 그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날은 고난과 시련만이 존재할 거라 믿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의 행실은 그 시절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보였다. 녀석은 그렇게 문제아의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졸업식 날까지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씩 반 친구 모임에서도 녀석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십 년이 훨씬 지난 시점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IMF 이후라 모두 어려움을 겪던 때였다. 녀석은 기대(?)와 다르게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생기가 넘쳤다. 꽤 비싸 보이는 양주를 들고 와한 잔씩 따라주며 담임선생이 힘쓴 덕분에 몇 년 전 졸업장을 받았다고 했다. 동창 모임에 자주 참석 하겠다며 이차 술값까지 계산했다.
녀석은 각종 중고물품을 싸게 받아 약간 손을 본 뒤 비싸게 팔아 생활을 유지 한다고 했다. 어느 날 IMF 사태로 인하여 기업체들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빌딩 단위로 쏟아지는 사무용품을 거의 무료로 수거하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게다가 코스닥 열풍에 주식 투자로 투자한 돈의 몇 배의 수익을 남겼다고 했다.
“회사생활 열심히들 해라. 내가 너희들 회사 인수 할 테니!”
녀석은 농담 반 웃으면서 한마디 내뱉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한동안 심한 배신감(?) 같은 후유증을 겪었다. 물론 녀석에 대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 대한 배신감이고 사회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교과서 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 치고는 삶은 너무 힘겨웠고 보란 듯이 정석을 벗어난 녀석의 행보는 배운 것과 달리 화려한 보상이 주어진 것이다.
그 후 몇 번 더 만남이 있은 뒤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그 후 십여 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완연한 중년의 티가 묻어나고 있었다. 수수한 모습에 눈빛은 예전에 비해 많이 순화된 듯 보였다.
주식 투자로 재미를 보던 그는 사업을 접고 코스닥 시장에 이른바 전 재산을 ‘몰빵’ 하게 되었고 결국 모두 날렸다고 했다. 집을 정리한 돈으로 가족모두 두 달간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카라반 여행을 하고 유럽을 거쳐 동남아 여행을 한 뒤 가장 인상에 남은 미얀마에 정착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방문하는 여행객 안내를 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친구들은 모두 녀석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가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미얀마에 정착을 해서도 아니다. 가진 재산으로 보면 녀석이 제일 가난하다. 하지만 녀석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언제나 자유롭다. 언제라도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면에는 녀석의 아이가 있었다. 녀석은 티브이프로 “고딩엄빠” 의 원조 격이다. 친구들의 자녀들은 겨우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반해, 녀석은 벌써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사교육비로 해외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할 때 녀석은 자식의 용돈을 받으며 일년의 반은 여행으로 보낸다.
녀석은 소유의 행복과 비움의 고통을 넘어섰다. 모두가 하늘의 뭉게 구름을 처다보고 있을때 녀석은 새털구름 너머 대기권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친구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 둘을 댄다면 그는 시원이와 에세입니다.
시원이는 성격이 쾌활하고 에세는 순합니다.
시원이는 말이 많고 에세는 과묵합니다.
시원이는 주로 집에서 만나고 에세는 사람들 눈을 피해
집 밖 구석진 곳에서 눈치 보며 만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썩 질이 좋은 친구는 아닙니다
남들은 너무 가까이 사귀지 마라고 합니다.
내속을 시리게 하고 냄새나고 병들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에세는 백해무익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적당 하면 약이 되고 과하면 독이 되는 것
시원이와 같이 있으면 용감 해지고 행복해집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함께 해왔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해온 친구를 버리기가 참 힘듭니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를 줄여야겠지요.
몇 번의 절교를 선언했지만 참 헤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는 버리라고 합니다.
누굴 버려야 하나요.
에세 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시원 이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많이 외롭던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와 얘기합니다.
그들은 지금껏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을 바란 적이 없었노라고.
친구란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제야 알았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었음을
백해무익은 그들이 아니고 나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