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시작된 재택근무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나 스스로도 일하는 방식, 일하는 가치관이 사뭇 달라졌음을 느낀다. 결국 몇 년간의 재택근무를 겪으면서 나 스스로가 많이 달라졌는데, 어떤 점에서 달라졌냐 하면...
1. 일하고 쉬는 경계가 없어짐
이건 정말이지 재택근무하는 많은 분들이 공감할만한 점이다. 출근, 퇴근이 없다 보니 어디서부터 일의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다. 재택근무 초창기에야 일 시작할 때 옷을 차려입었으나 (나는 원래 출근했을 때도 예쁘게 입고 다니지 않았지만;;) 지금은 잘 때 입는 추리닝 차림으로 일하고 회의도 다 들어간다. 어차피 나는 노트북 하나로 모든 걸 다 하기 때문에 (별도의 모니터 없음) 카메라에 어깨 정도까지밖에 안 잡힌다. 무얼 입든 무슨 상관.. 거기다 책상도 침대 바로 밑에 있으니, 이거야말로 자다가 일어나서 책상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가 다시 일했다가 아주 맘대로다.
주말과 주중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아침과 밤의 경계도 없어진다. 여기에 해외 오피스들과 콜이 잡히기 시작하면 진짜 아침저녁 밤 구분 없이 일이 돌아가게 된다. 출근할 때는 1시간 정확하게 점심시간을 지키면서 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했지만, 집에서는 밥만 대충 먹고 나서 곧장 다시 책상에 앉기 십상이다.
2. 몇 시간 일했느냐보다, 어떤 결과물이 나왔느냐에 더 집중
아무래도 사무실 출근을 할 때면 몇 시간 일했는지, 야근을 했는지, 아침에 얼마나 일찍 나왔는지를 다들 본다. 말로는 안 본다고들 하지만 다들 본다. 야근하고 아침에 일찍 나오는 사람은 아무래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한다. 애엄마는 이런 상황에서 상당히 눈치가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거의 야근을 하지 않는 편이고, 야근을 하더라도 밥을 먹지 않거나 혼자 사 와서 먹으면서 최대한 빨리해서 빨리 가는 게 목표다. 항상 컴퓨터를 들고 집에 갈지언정, 야근은 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보다 진짜 중요한 건 어떤 결과물이 나왔느냐이다. 재택근무를 하면 사실 남들이 무얼 하는지 잘 모른다. 내 일만 진짜 집중하게 되고, 쓸데없는 미팅도 줄어들면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더불어 일 자체로 평가를 하게 되지, 몇 시간 일 했고 근무태도가 어땠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3. 내가 시간을 관리하는 주체자가 됨
이건 1번과 2번의 컴비네이션으로 나오는 결과인데, 내 시간을 내가 관리하게 된다. 사실 이건 출퇴근할 때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출퇴근은 어쨌든 9시부터 6시까지는 (사실 6시에 퇴근하는 거 흔치 않음) 회사에 꼼짝없이 메여 있다. 은행일을 보려고 해도 30분이 넘어가면 눈치 보이기 십상이고, 병원을 가려해도 여기저기 양해를 구하고서 가거나 휴가를 내야 한다.
하지만 1번과 2번이 중심이 되면서 나는 낮에도 사실 회사일이 아닌 다른 일들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과 산책을 나갔다 오거나, 애들 숙제도 잠깐씩 봐주고, 슈퍼에도 다녀온다. 누가 근무 시간 중에 이런 걸 한다고 나한테 뭐라고 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나는 야근수당을 받아본 적이 없고, 확실히 주 40시간보다는 더 일하고 있으면서 결과물도 정확하게 내고 있는데도 문제라면, 그럼 정확하게 9시부터 6시까지 지키자고. 나도 정확하게 9 to 6를 지키는 회사라면 이렇게 안 하지.
근데 나에게 사실 더 중요한 건 (그리고 상당히 많은 워킹맘에게 중요한 건) flexibility 바로 근무시간의 유연성을 가져가는 것이다. 내가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것과 근무 시간 자체가 짧은 것 중에서 고른다면 나는 유연한 근무시간을 고르겠다. (물론 둘 다 가능하면 더 좋음!)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부정기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근무시간이 짧아도 유연하지 않다면 계속 회사에 미안한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4. 어디서 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음
앞의 글 (여기)에서 썼듯이, 어디서 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애 둘이 있으면 애들 각자 자기 방은 있어도 엄마 아빠의 서재방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안방 침대 밑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일을 하고, 남편이 자는 밤이면 식탁에서 일한다. 이른 아침 콜이 있으면 아이들이 아침식사를 해야 하니 식탁에서 하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조그마한 상을 펴놓고 일한다. 남편도 같이 재택 하는 때이면 애들 책상에 가서도 하고, 카페에 가끔 나가기도 한다 (나 같은 집순이는 점점 안 나가게 되지만..). 나만의 집중하는 법을 만들어서 어떤 장소에서도 빨리 워킹 모드로 전환이 가능해진다.
물론 나도 드라마에 나오는 멋드러진 서재방에 커다란 모니터도 있으면 좋긴 하겠다. 하지만 그건 진짜 언감생심. 애들 키우는 집에서 그런 욕심 부릴 여유는 없다. 책상 놓고 일할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재택근무가 힘든 분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주말 내내 집에서만 있어도 하나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집순이 천성에다가 + 아이들까지 있다 보니 재택근무가 정말로 잘 맞는 스타일이다. 이직을 할 때도 여러 스타트업을 만나보았는데, 재택근무가 전혀 없는 곳이면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생각부터 들었다. 그만큼 이제 완전 출근제로는 돌아가기가 싫은 나로 바뀌어버렸다. 물론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하겠지만, 이제는 재택근무의 달콤함을 알아버렸달까!
Image by Vinzent Weinbe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