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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Aug 15. 2022

돌아갈 곳

정한새



     

4월에 실컷 고향이 없다고 해놓고서 이런 제목의 글을 쓰는 게 뻔뻔할까, 싶었는데 그런 생각은 아주 잠시 하고, 냉큼 마음을 바꿨다. 일단 그 글의 서두에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강원도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써두지 않았는가. 예나 지금이나 강원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한구석 어딘가에 잘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강원도에 가고 싶어도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 아니, 이상한 표현이군. 강원도는 거기 있으니까. 뭐랄까, 꼭 돌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결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이유가 좀 더 명확했다. 친구도 거기 살았고, 가족도 거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친구도, 가족도 대부분 강원도를 떠났다. 내가 다시 강원도에 돌아가 터 잡고 산다면, 사실상 모르는 곳으로 이사 가는 거다. 시내 지리 몇 군데야 익숙하겠지만, 알던 가게는 거의 다 사라졌겠지. 그러니까, 꼭 ‘강원도’여야만 할 이유가 어쩐지 흐려지는 느낌이다.

지금까지는 사십 줄 후반이나 오십 줄쯤 들어서면 강원도에 돌아가서 퀴어 페미 카페 차리고 재산 탕진하는 게 목표이긴 하다. 그때까지 모은 재산이 없을 것 같고, 있어도 퀴어 페미 카페의 ㅍ자를 준비하는 순간 다 날아갈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카페일 때도 있고, 북카페일 때도 있고, 서점일 때도 있고, 스튜디오일 때도 있고 용도는 매번 바뀌지만 페미니즘과 퀴어 정체성을 지향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이렇게 돈도 안 되는 소리를 마음의 지표 삼아 살아가면서도 가끔 무섬증이 인다. 강원도로 돌아가서 ‘퀴어페미니스트’ 뭐시깽이를 열었을 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변 상권이나 동종업계 내 가격 경쟁 같은 게 아니라, 실질적 생존에 대한 의문이다. 온갖 행사에서 일어나는 퀴어와 앨라이에 대한 폭력은 단발성 행사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특정한 매장에 일어난 테러 소식(최하단 링크 참조)을 들으면 깊은 수심에 잠기고 만다.

2년 전쯤에는 서울 마포구의 모 책방 테러 소식을 듣고는 정말로 기가 죽어 버렸다. 서울 중의 서울, 힙의 중심지 마포구에서도 책방 유리에 ‘동성애는 죄입니다’라는 문구가 낙서가 되는데, 강원도에서는 어떨지 생각하자 한숨만 나왔다. 비슷한 거 열었다가 동네 망신이라며 무뢰배가 들이닥치는 거 아닐까, 어느 날 입간판 사라지는 거 아니려나, 일하고 있는데 십이한남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일어나지도 않은 온갖 일을 가정하며 머리를 싸맸다. 그러고 나니 재산을 모으긴커녕 대출도 못 갚았는데 이미 상상 속 혐오자와의 기 싸움에서 져버렸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공간에 대한 인식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인식인가, 싶고 또 사람에 대한 기억은 공간에 대한 기억이려니 싶다. 지방에 여행이나 개인적인 일로 가게 되면 그곳에 퀴어 페미니즘 친화적인 공간이 있는지를 찾아본다. 안전하지 못한 곳에서 안전한 곳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차곡차곡 모여 나에게도 영향을 주었겠지. 그리하여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작은 공간 하나 꾸리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세상이 퀴어와 성평등과 소수자의 권리를 강조하다 못해 당연해질 때까지, 어디에나 안전한 장소는 필요하기 마련이다. 지방 역시 예외일 순 없다. 그러니까 여전히, 돌아갈 곳은 강원도이려니 한다.  



* 헤더 출처 : 강원도청 홈페이지

* 혐오가 죄입니다, 책방 ‘꼴’에서 보여줄게요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325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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