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림
첫 직장에 다닐 때 정말 예쁜 직원이 있었다.
예쁘다는 말로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운 직원이었다.
나는 늘 메이저 집단에서 마이너 입장으로 지내왔는데
첫 직장 역시 그랬다.
나는 행정 업무를 하는 사무직이었지만
그 회사에는 메이저 집단인 전문직들이 있었고
그녀 역시 전문직이었다.
조막만한 얼굴에 크고 맑은 눈동자,
적당히 짙은 눈썹, 오똑한 콧날, 그야말로 앵두같은 입술.
게다가 몸매는 엄청난 글래머였는데
허리가 너무 잘록해서 딱 봐도 나의 한 팔로 감길 것처럼 가냘펐다.
우중충한 책상에 앉아
종이서류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는데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를 보면
화사한 빛이 났다.
어떤 날은 내가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는데
사뿐사뿐 들어와 가볍게 내게 목례를 건네더니
웃으며 내 옆에 서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자글자글한 입술에 돼지 기름처럼 립 글로즈를 발라대던 나의 모습과
잡티 하나 없는 뽀얀 뺨 위로
톡톡 볼 터치를 두들기던 그녀의 모습이 대비되었던 기억이 난다.
옷도 늘 화려하게 입어 눈에 띠었다.
돌이켜보니 쿨톤이었던 것 같다. 초록색 원피스나 새빨간 블라우스에 딱 떨어지는 검정 슬랙스 같은 스타일을
정말 멋지게도 소화했다.
늘 하얀 블라우스에 어정쩡한 길이의 검정치마만 고집하던 나와 많이 달랐다.
참 화사했다.
물론 남자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그녀가 누구랑 지하 주차장에서 함께 올라오더라,
그녀가 누구랑 점심을 같이 먹더라,
그녀가 누구랑 같이 퇴근하더라,
그녀가 누구랑 에스컬레이터를 딱 붙어서 타고 올라오더라 등등.
그 누구 누구 누구 누구 중에는
내가 아무도 몰래 좋아하던 남자도 있었다.
부럽지만 감히 부러워할 수도 없는 기분이랄까,
저런 여자랑 감히 내가 경쟁이나 될까 싶은 마음은 당연히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언젠가는 늦은 회식자리가 있었다.
다수의 전문직들 사이에 소수의 사무직으로서 나는 정말 그런 회식자리가 싫었는데
그날 따라 그들이 같이 맛있는 걸 먹자며 나를 붙잡았다.
하나가 붙잡자 둘셋넷 모두가 붙잡기 시작했다.
그 회식자리는 내가 낄 자리가 분명히 아니었는데......
뭐 어때요, 같이 고생했는데 같이 먹어야죠! 라며
모두가 착한 척을 하며 서로 누가 더 착한가 누가 더 소수집단을 잘 챙기는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 앞서 나를 회식자리로 굳이 끌고 갔다.
당연히 회식시간 내내 나는 고역이었고
노래방까지 끌려갔다가 밤 11시가 되어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아무도 몰래
초라한 가방을 챙겨 주섬주섬 도망을 쳐 나왔다.
그런데 노래방 입구까지 나오자 그녀가 있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지금껏 회사에서 누구랑 사귀니 헤어졌니 말이 나왔던 누구누구가 전부 아닌
처음 보는 남자였다. 처음 보는데도 부티가 좔좔 흐르는 게다가 인상이 굉장히 좋은 남자였다.
그녀는 너무나 상냥한 미소로
어디 가요? 도망 가시는 거에요? 저도 도망 나왔어요!
근데 전철도 버스도 다 끊겼을 거에요, 라며 자신의 남자친구 차로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두어차례 거절했지만 사실 속 마음으로 나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대중교통은 끊겼을테고 택시를 타면 또 돈을 써야 하는데... 아까웠다.
택비시 한 번이면 주말에 떡볶이에 모둠튀김, 후식으로 오렌지주스까지 마실 수 있었다.
결국 차를 얻어타고 집이 어디냐는 그들의 질문에
신림동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 순간 그 커플의 살짝 당황스러웠던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약간의 정적에 내가 물었다. 두 분은 어디로 가셔야 하냐고,
역시나 천사 같았던 그녀는 내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방향이 다르긴 한데 괜찮아요 ^^
그러면서 남자친구에게도 말했다. 우리 간만에 밤 드라이브 하자, 오래 같이 있을 수 있겠어 ^^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청첩장을 전달 받았을 때 소문을 통해 알았다.
그녀의 집은 한남동, 그녀의 신혼집은 청담동이라는 사실을.
나는 늘 자신이 없었다.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들고 다니는 가방, 내가 하는 모든 말과 내가 짓는 표정에도 자신감은 늘 결핍되어 있었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자신감은 결국 환경에서 나온다.
십여년 전 아름다웠던 그녀를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 것도 결국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좋았지만
자신감이 있기에 더 돋보였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녀가 자라온 환경 덕분에 더욱 자신감이 넘쳤겠지.
그녀는 지금도 그토록 당당하고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늘 사무실 구석에 앉아 일에 찌들어있던 무채색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아니,
기억이나 할까?
자신감,
그래서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가장 심어주고 싶은 자산이 바로 자신감이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이 결핍된 걸 자녀들에게 채워주고 싶어한다.
내게 있어 그건 공부도 돈도 어느 분야의 천재적인 능력도 아니라
바로 자신감이다.
자신감만 있으면 매사 당당할 수 있고
당당한 태도는 삶에 있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나는 그 자신감이 없어
늘 우물쭈물거렸고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고
못난 모습으로 살았던 것 같다.
문장의 끝에 같다, 를 자주 붙이는 것도 결국 자신감 때문이다.
이런 거 같아요, 저런 거 같아요.
평생을 그렇게 자신없이 살아왔다.
못나게 살아왔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다.
금방 나아지지야 않겠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들은
독립하고 남편을 만나면서 조금씩 회복되었다.
물론 아직 다 회복되지는 못했다.
30년 넘게 받은 상처가 10년 만에 회복될 리 없다.
그러나 나아지는 중인 건 분명하다.
작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누가 손만 올려도 몸을 움추리던 버릇은 확실히 사라졌다.
전 직장에서
못된 인간들 때문에 받은 상처들은
직장이 바뀌고 평범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조금씩 회복 중이다.
역시 3년 가까이 받은 상처가 반년 만에 완벽히 나을 리는 없다.
못된 인간들과 하루 8시간 이상 얼굴을 마주하고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통 힘든 일이었을까?
그래도 회복에 3년까지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곳 좋은 사람들이
하루 8시간 이상 나를 보며 건네는 말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유쾌하다.
말 한 마디, 표정 한 마디에 배려가 스며있다.
마치 3년 가까이 지옥 같았던 못된 인간들과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이들은 내게 너무나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반년 정도만 더 지내도 못된 인간들의 얼룩은 비교적 깨끗하게 지워질 것 같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주눅들고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자책하던 기억도 내려놓으려 연습 중이다.
사실 아름다운 그녀는 첫 직장에만 있던 게 아니다.
어딜가나 나를 주눅들게 하는 잘난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다.
수십년 꼬깃꼬깃 접혀있던 자신감을 조금씩 꺼내본다.
잘난 그들이 잘못도 아니고
덜 가진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주눅이 든다면
주눅드는 내겐 분명 잘못이 있다.
나는 나대로 멋이 있다.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 나는 나대로 괜찮은 사람이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아빠로부터 30년간 받은 상처가 10년 정도 지나니 조금씩 나아지고,
전 직장에서 3년간 받은 상처가 반년이 지나니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라면
40년 가까이 꼬깃꼬깃 접혀있던 자신감은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회복될 수 있을까?
이렇게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들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소처럼 일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기고
고요히 요가하고
자주 이렇게 나의 생각들을 끄집어 내어 글로 풀어내는 이 정도의 일상이라면 충분하다고
당당해도 된다고
자신감 가져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다.
그래서 더 가지지 않아도 행복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자체로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