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제목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국어과 편지 쓰기 수업을 하는데 완성된 아이들의 편지의 맞춤법이 너무 엉망이었던 거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에게 3월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받아쓰기를 지도하고 있고 10단원 이상 시험을 봤다. 한 단원에 10 문장씩이니 거의 100 문장을 익힌 거다. 100문장안에 굉장히 많은 어휘들이 포함되어있을 테고 문장을 끝맺을 때의 어미 패턴도 상당수 익혔을 것이다. 게다가 3월에 비해 아이들의 받아쓰기 점수는 일취월장하여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100점을 맞는데 왜 자유 글쓰기의 맞춤법은 다들 3월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게 없는지 궁금했다. '2학년 와서 해봤자 늦었나, 그럼 난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의문은 점점 확장되어 '(맞춤법을 비롯한) 학습에 골든타임(결정적 시기)이 있는가?'가 되었다.
'결정적 시기 이론'을 가장 신나게 사용하는 업계는 역시나 영유아 사교육 시장이다. 내게도 경험이 있다. 아이가 돌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애를 유모차 태우고 산책하다 보면 내 팔을 붙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 발달검사 좀 받아보세요. 빠를수록 좋아요!' 라거나 '영유아기가 뇌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 기간인지 아시죠?' 라며 고가의 전집과 교구를 권하던 사람들. 난 그런 말들을 믿지도 않고 싫어했기 때문에 코웃음 치며 그 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아이가 만 36개월이 지나고 교사로 복직한 지금도 '결정적 시기 이론'을 이용해 엄마들의 불안을 자극하는 사교육 업계의 마케팅 수법은 아주 치졸한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물론 나 역시 유명 전집과 교구를 몇 질 구입해 잘 활용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게 없었으면 애가 발달의 결정적 시기를 놓쳤을 거라던가 하는 이유에서 구입한 건 아니었다. 그냥 말을 이해하고 배울 때 책을 읽어주고 싶었고 소근육과 수 감각이 발달할 때 그걸 적절히 쓸 수 있는 교구를 갖고 놀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 그저 내용이 좋고 수준에 맞는 책이라면,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에 쌓을 수 있고 수를 셀 수 있는 교구라면 브랜드 마크가 찍혀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나의 '결정적 시기 가설'이 사교육 시장에서 주장하는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결정적 시기 가설'을 대학시절 배운 기억이 있으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검색해보니 로렌츠의 각인의 시기, 보울비의 애착 이론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학습'의 영역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고 몬테소리의 '민감기 이론'이 학습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읽어보니 굉장히 동의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가 이 이론을 모르고 이 학자의 이름을 딴 교구를 사지 않아도 아이의 발달엔 별 악영향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이런 이론들은 낡은 이론이라며 인간의 발달 시기를 사춘기 이후로 넓혀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더라. 아무튼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왜 받아쓰기를 연습하고서도 글쓰기가 나아지지 않았는가? 나는 학자도 아니고 아이들의 성장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결론을 섣불리 내릴 수 없지만 아주 개인적으로 내린 잠정적 결론은 '습관'이다.
원인으로 첫 번째, 독서습관의 부재를 꼽고 싶다. 바른 문장을 쓰려면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하는 100 문장 이외에도 바른 문장을 많이 눈에 익혀야 하고 그 문장 인풋을 가장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는 것은 독서이다. 이 생각은 아이가 없던 철부지 저경력 교사였을 시절부터 변함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학부모님들께 학습만화를 권하지 않는다) 설상가상 코로나 때문에 등교가 늦어지고 아침 독서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그걸 커버할 만큼 집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읽는 습관이 없었다면 좋은 문장 인풋이 적으니 3개월 만에 아이들의 작문실력이 좋아지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둘째는 잘하려고 하는 습관의 부재이다.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좀 뭐든 잘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어른들께 칭찬 듣고 싶고 암튼 뭐든 잘하려고 하는 악바리 친구들. 심하면 완벽주의 경향도 보이는 아이도 있다. 이건 상당 부분 타고나는 것 같기도 한데 점점 이런 아이들이 줄어드는 것 같다. 반대로 말하면 무기력한 아이들이 많다. 타고나기를 무기력했던 것은 아닐 테니 교육학에서 익숙하게 봤던 용어 '학습된 무기력'을 장착한 아이들이다. 학습된 무기력은 작은 실패 경험이 여러 번 쌓여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좋은 글을 쓸 거라는 기대가 별로 없고 얼른 검사를 통과하고 싶다는 마음만이 있는 거다. 당연히 글씨도 엉망인 데다 충분한 구상이나 퇴고를 거치지 않고 간단히 써서 글의 완성도가 낮다. 여기저기 지적해서 다시 써오라고 돌려보내면 역시 큰 정성을 들이지 않고 금세 고쳤다며 다시 오곤 한다. 이런 습관은 미취학 아동일 때 잡아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무기력은 정말 강력해서 2학년 때 고쳐주려고 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취학 아동 때부터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경험을 많이 제공하고 성공했을 시 차고 넘치는 칭찬을 주면 무기력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글을 쓰는 손이 부끄럽다. 정말 내가 아이들의 무기력을 고쳐주려고 충분히 노력했나 싶어서)
번외로 수학과에서는 한 단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수학을 잘할 결정적 시기를 꽤나 놓치게 된다. 그래서 복습이 정말 중요하다. 지금 학교에서 6단원 곱셈을 나가고 있는데 3단원 덧셈과 뺄셈을 제대로 이해 못 한 아이들이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연산이든 도형이든 측정이든 하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 일과 시간 중에 교사가 잡아주기가 정말 힘들다. 이미 결손이 생겨버린 경우 사교육을 활용해서 결손을 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글을 마무리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 학습에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두 가지를 밝히겠다. 한 가지는 '아동의 안정된 정서'이고 나머지는 '미디어에 중독되지 않기'이다. 안정된 정서는 딱히 이유를 꼽기 힘들 만큼 당연히 너무도 중요한 것이고 또, (반론이 많을 수 있으나) 나는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뇌를 안 좋은 쪽으로 만들고 있다는 쪽에 적극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와 관련된 기사 하나를 첨부하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