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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May 05. 2024

페르시아 정원에서 김치 만들기

미국 유학과 예술에서 찾은 집

유학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인연을 종종 만나게 된다. 이때 만나는 관계들은 한국에서처럼 생활이 가까이 얽히지는 않지만, 각자의 길을 걷던 와중 한 번씩 발걸음이 겹치는 우연적 마주침들이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성인으로서의 자아를 매겨나갈 때 우리에게는 한 번의 마주침으로도 금방 통할 수 있는 그런 공감이 있다. 토박이 한국인에게도 한국계 미국인에게도 이해를 바랄 수 없는 중간자로서 우리만의 고군분투와 고민의 문맥이 있다.


태희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8년 전 내가 조연출을 했던 공연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배우 언니가 있는데 (영화 <내부자들> 감독판에도 나온 자랑스러운 언니다), 문득 내 또래의 다른 배우가 최근 엘에이 쪽으로 이민을 갔다며, 한번 만나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언니와 나는 20대에 만나, 한없이 불안정하고 흔들리던 시기 내내 서로의 성숙을 응원해 왔다. 그때 우리에게 항상 힘이 되는 가르침을 준 것은 언니가 "쫑맨"이라고 부르는, 할리우드에서 기반을 다진 어떤 배우의 연기 워크샵이었다. 쫑맨 연기 워크샵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에 충실히 반응하는 마이즈너 연기법을 전하고 있었다. 워크샵 내용에는 배우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내 몸과 타인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 안에서 편안해지는 수련법들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태희라는 나와 동갑의 친구가 최근 쫑맨과 결혼하여 할리우드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었다. 예술인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너무 반가워 태희에게 바로 연락했고 우리는 엘에이에서 만나게 되었다. 서로 너무 다른 영역에서 일하고 있지만 우리는 바로 예술철학, 공연철학, 연기철학, 음식철학 등 장르를 넘나들며 일상 속, 인생 속 철학 이야기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꽃을 피웠다.


아무리 이미 미국에서 기반을 많이 다진 남편이 있다고 해도 이민 생활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태희는 그 힘든 와중에도 주변의 따뜻하고 훌륭한 예술인 친구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만든 예술적 공간에서 큰 힘과 위안을 받고 있는 듯했다. 특히 소리나(Sorina)라는 이란계 미국인 친구가 운영하는 '티팟'(Teapot)에서 마치 집에 온 듯한 포근함을 충전받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곧 김치를 만드는 워크샵을 한다고 하기에, 티팟에 대한 궁금증과 태희를 더 알고 싶은 마음에 그 이벤트를 방문했다.


티팟은 비영리 단체로, 미드시티라는 엘에이의 조용하고 다소 삭막한 동네에 예술과 녹색 공간을 불어넣고자 하는 곳이었다. 공식 이름은 티팟 가든스로, 미드시티의 여느 집 중 하나인 소리나의 공간 뒷마당에 아기자기한 페르시아식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페르시아 정원은 이란 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공동체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이 정원의 충만한 예술적 감성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페르시아 카펫도 나오고 아이들의 상상력도 나온다고 한다(https://www.teapot.la/: 홈페이지에서 티팟의 친근하고도 귀여운 예술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https://www.latimes.com/lifestyle/story/2021-08-10/plant-ppl-teapot-la-midcity-parks에서는 LA Times에서 찍은 티팟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태희의 김치 워크샵은 공식적인 채널에는 나오지 않고 인스타그램 등 비공식적 플랫폼을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내게는 지인 소개를 통해서 갈 수 있게 된 특별한 행사였다. 큰 생각 없이 즐기러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감명 깊었기에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23년 5월의 워크샵 이후 5개월이 지난 10월, 태희의 집에서 김치 워크샵에 대해 인터뷰하게 되었다. 또다시 7개월이 지난 바로 지난주에야 그 내용을 학회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녹음해 둔 인터뷰를 듣다가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생생한 에너지를 글로만 내보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을 공개하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이 안에는 인터뷰하는 나의 오디오 간섭과,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 중간중간 정적과, 마지막 태희의 아파트에서 갑자기 울리는 화재경보기 소리까지(종종 갑자기 울린다고 한다. 거실에서 얘기하던 우리는 방으로 피신했다) 모두 들어있다. 처음엔 이 내용을 다 정리해서 깔끔한 파일을 올릴까 고민하다가, 애초에 녹음본을 올리기로 결심한 이유가 정제되지 않은 생생함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올리기로 했다. 인터뷰 내용 또한 글로 정리해서 올릴까 하다가, 우리는 그렇게 고상하거나 차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30대 초반 어린 우리의 솔직한 모습 그대로를 공유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태희 인터뷰: https://drive.google.com/file/d/1YL-rVuBymCXZwSgixjpCb526EF-HHUso/view?usp=sharing 


나는 '음식'을 모두에게 접근성 높은 일상 속 예술로 이해하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태희의 삶은 마치 우연처럼 음식과 예술(연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배우를 지망하던 와중 호텔조리과를 가게 된 것, 부모님과 시부모님 모두 음식에 조예가 깊으셔서 영향을 받은 것, 그리고 지금 한인타운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것 등. 태희가 가진 음식철학과 연기에 대한 진지함은 여느 행사처럼 평범하게 지나갈 수도 있는 김치 워크샵에 무언가 특정할 수 없는 생기와 매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기에 자주 근황을 공유하지는 못하지만, 종종 알게 되는 소식에서 태희는 의미 있는 행적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 쫑맨과 함께 자신만의 비전을 굽히지 않고 쫓아가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이뤄나가는 모습이 정말 멋진 친구다. 김치 워크샵도 반응이 너무 좋아서 더 큰 공간으로 옮겼고, 티팟도 계속해서 잘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김치 워크샵과 태희의 작품에 대해 일일이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제는 한정된 시간 내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까지만 하자라는 제한을 두기로 해서, 학회 발표자료로 만든 슬라이드와 대본으로 대체한다. (슬라이드는 사진 자료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슬라이드: https://docs.google.com/presentation/d/1Vt9pQYCesGsp4JpY3_Uz9a0knsjrnXnZy5ht93gx1DQ/edit#slide=id.g2cfc4211408_0_0 
대본: https://drive.google.com/file/d/1_m-ANmag65-cI6AA5fYc-T7aiVLay8HJ/view?usp=sharing 


나고 자란 곳을 떠나서 산다는 건 쉬운 결정도 단발적인 어떠한 순간도 아니다. 나도 태희도 한국을 사랑하면서도 우리를 이루는 근본적인 무언가를 한국에서 추구할 수 없어 떠밀리듯 이곳에 왔다. 나는 공연예술학이라는 걸 한국에서 연구할 수 없어서, 태희는 한국 연예계에서 진정 연기에 대한 탐구와 자유를 찾을 수 없어서. 일상에서 철학을 찾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철학을 세울 공간이 없다고 느낄 때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아찔함을 느낀다. 숨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돌다 이곳까지 왔다. 고국을 떠나 이곳에서 수학하는 예술계 친구들 교수님들과 얘기해 보면, 유학의 힘듦과 외로움에 한국학이나 동양학 등 내 공동체가 되어줄 것만 같은 여러 공간을 떠돌다 결국엔 예술로 돌아오는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예술계에는 동양인이 많이 없다). 우리가 찾는 건 어쩌면 특정한 나라의 정체성이나 소속감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내가 이해하는 한국인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판단 대신 존중이 있는 공간인가 보다. 그리고 그건 결국 사람에서, 공간에서, 예술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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