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강사일기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본의 제의적 상상력

죽음이 끝이 아닌 세계, 마법과 희생과 전쟁

by 로리

최근, 2023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장편 서사 애니메이션을 내놓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는 오랫동안 내 안에 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지브리와 함께 자랐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새롭게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수업 때 선생님들이 보여주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지브리 열풍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 나이의 내게 너무 어려웠고, 기괴했고, 종종 지루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았던 게 <모노노케 히메>였는데 그만큼 어렵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서 자꾸 생각나는 감이 있었다.


박사학위를 따고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시작해서 뒤늦게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매료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때마침 일본에 답사를 다녀오는 경험과 겹치면서 그의 작품 속 일본적 제의에 대해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 가기 전, 애니메이션에서 날 강하게 끌어당긴 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친 제의적 감성이었다. 원초적 생명력을 대변하는 강한 마력의 존재, 그것을 담고 있는 소녀, 그 소녀를 지키는 소년, 그리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소녀의 마력을 빼앗아 이용하려는 힘과의 대립. 무엇보다 날 강타한 건 결말이 대부분 자기 파괴적 희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었다. 마력의 주체(소녀)가 그로부터 파생된 악의 고리를 끊어내고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데, 그 이후는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이 다른 형태로 되살아나고 이어지는 미래적 가능성이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이것이 노골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주인공 소녀 '시타'가 물려받은 고대의 마력은 작품 시작부터 여러 탐욕적 힘을 불러들이고, 그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 작품 중반, '시타'는 좋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나쁜, 파괴적 마법 또한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마법이라는 힘 안에 양면성이 반드시 존재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건 마지막에 세상 파괴의 마법을 결국 사용하는 선택의 복선이 된다. 그 주문으로 라퓨타에 지어진 문명과 기술의 잔재들은 제거되지만, 껍데기가 떨어져 나간 중심부에는 생명의 나무가 여전히 빛나며 파괴되지 않은 채 세상을 계속 표류하는 모습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천공의 성 라퓨타> 엔딩 크레딧의, 유영하는 생명의 나무


이때 '시타'가 함께 파멸시키려고 하는 건 고대 라퓨타의 핏줄을 물려받은 또 다른 주체 '무스카'다. '시타'가 구조적 지식 없이 마력 자체를 물려받았다면, '무스카'는 마력을 스스로 보유하지 않은 대신 라퓨타의 역사와 기술적 지식에 능하다. 그래서 '시타'를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시타'는 이 마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구체적인 수학적 논리를 모르지만, 대신 마력을 직관점 힘 그 자체로 감각할 수 있기 때문에 '무스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원초적 힘은 늘 여성성으로 대변된다. 그 여성성은 <벼랑 위의 포뇨>에서처럼 폭주해 세상을 삼킬 수도 있는 대자연의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래서 소녀는 늘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작품 속 소년들은 그 힘을 존중하고 지키고 진심을 얹어 함께 해줌으로써 마력에 안정감을 주는 존재들이다. 마력을 관리하고 구조화하고 보호하는 데에 능한 이 남성성 또한 한편으로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으로 흐른다. '무스카'가 그러하고 <벼랑 위의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가 그러한 존재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계산을 통해 이세계를 관장하는 정체된 지배자가 남성으로 대변된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전쟁이라는 큰 스케일을 다루면서 현실적인 선악의 싸움의 구도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이러한 원초적 여성성과 남성성의 힘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원리로, 조금 더 우화적으로 풀고 있다. 두 가지의 힘이 상호보완을 하고 있지만, 또 필연적으로 한쪽이 폭주하며 균형이 무너지기도 하고, 그게 세상에 파괴를 불러오지만, 그 파괴는 새로운 무언가 탄생하기 위한(='포뇨'의 인간화) 필연적 수순으로 그려진다. 파괴와 소멸은 동시에 희망과 생명을 낳는다.


<벼랑 위의 포뇨> 속 거대한 바다의 힘을 보여주는 '어머니'와 배를 탄 작은 인간 '아버지'의 모습


이 우주의 소멸적 수순은 그다지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작품을 이끄는 건 소년과 소녀의 맑고 이타적인 진심이 이미 고삐가 풀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거대한 세상에 무력하게 맞서는 모습이다. 그 앞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제물로 내어놓는 자주적 결심이다. 자신이 모든 악의적 힘을 안고 함께 소멸하는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아주 원초적 형태의 마법이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는 폭주하는 '오무' 무리를 멈추기 위해 자신의 맨몸을 그대로 '오무'가 밟고 지나가도록 내어놓는다. 그 마법은 결국 '오무'의 폭주를 멈추고 '나우시카' 또한 되살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파괴적 대립 끝에 자연을 관장하는 사슴신이 신들의 세상을 다 안고 함께 파멸하면서 아포칼립스적 장면이 연출되지만, 결국 그건 또다시 새로운 생명과 자연이 자라나는 결과로 이어진다. 당장의 신은 더 이상 없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은 또 생길 것이다. '나우시카'도, 사슴신도, 되살아날 것을 생각하고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그 결심에서 그들의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닌 생명의 다른 이름이 된다.


'오무'로 인해 되살아나는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의 되살아난 숲


다소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우선 성경 속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와 똑같은 원리를 담고 있고, 우리나라 신화와 전설에도 이미 다 담겨있는 이야기이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저승에 가서 사람을 살리는 힘을 배워 온 바리데기 공주가 신이 되어 지금까지도 한국 무속의 지주대 역할을 하고 있고, 달나라 토끼의 이야기에는 지상을 방문한 신에게 드릴 것이 없어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마음이 담겨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무속인을 통칭하는 영어 단어는 medium, 즉 '매개자'이다. 무속은 mediumship 또는 '매개성'이라고도 칭해진다. (샤먼shaman과 샤머니즘shamanism이라는 표현 또한 쓰지만 mediumship이 조금 더 포괄적인 표현이다.) 자신의 몸을 매개로 새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성은, '원초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존재들의 분리 이전, 모든 생명이 실은 하나임을 본능적으로 몸으로 아는 힘이다.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의 '산'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도, 작중 소년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동식물과의 본능적 유대를 강하게 가진 존재로 나온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찢어진 존재들을 이어주는 어떠한 사명에 이끌린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마법은 안정적이거나 항상적이지 않고, 소녀와 분리될 수 있는 어떤 물건도 아니어서,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그 마법이 약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마법은 예술에 직접적으로 비유된다. 어떨 때는 흐름이 생기고 어떨 때는 영 막히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계속 믿고 성실히 기다리면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자멸의 선택'이 단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놀라운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겪은 전쟁의 영향이 담긴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범국가로 지은 죄가 많은 역사를 가진 채,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방법은 우리가 스스로 파멸하여 자정하는 길뿐이라는 그런 메시지를 이처럼 대중적인 대자본 작품에 담을 수 있는 감독이 얼마나 될까?


이번 일본 답사에서는 그 비밀을 알고 싶어 지브리 뮤지엄에 가보려고 했으나, 알고 보니 한 달 전에 이미 뮤지엄 입장권이 마감되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들 답사를 통해 그 답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방문한 오키나와에서는 제주 4.3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오키나와전투에 대해 답사했다. 여러 가지로 비슷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대규모 인명 피해가 제주에선 학살을 통해, 오키나와에서는 자살을 통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강요된 자살이지만, 나로선 상상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강요한다고 자살이 되나? 끝까지 살아남고자 했던 제주에선 일 년에 걸쳐 전체 섬 인구의 1/10이 희생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수치는 이미 모든 제주인이 4.3 유족이 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는 세 달에 걸쳐 전체 섬의 1/4이 희생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수치다. 짧은 답사에서 모든 문맥을 다 파악할 순 없었지만, 당시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오키나와 인구를 인간방패로 훈련시키면서, 미군에게 잡혀가면 얼마나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지 세뇌시켜 극도의 공포를 키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 잡힐 것 같으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적극적으로 수류탄 등을 통해 자살을 했고 그렇게 사라진 목숨이 너무 많았다.


문맥상 일본은 미군에 정보가 넘어가는 게 두려웠던 것 같고 그래서 항복 이후에도 본국인들에게 절대 투항하지 말고 차라리 자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생명이 걸려 있는데 인간이라면 지시고 뭐고 투항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상황을 지켜본 결과 일본 정부 자체가 이미 많이 잔인하고 공포스럽게 국민들에게 전쟁 훈련을 시킨 것 같았다. 그래서 '이보다 더한 것'이 얼마나 가능한지 사람들이 더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쉬웠던 것 같다. 일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우리나라도 경험했으니 나도 그들의 공포가 어땠을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집단 자살과 학살이 벌어진 동굴의 모습을 그린 마루키 토시와 마루키 이치의 그림 (사키마 미술관 소장)




자살도 문화가 될 수 있다면 일본이야말로 풍부한 자살 문화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할복이라는 문화 그리고 연극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소네자키의 동반자살(Love Suicide at Sonezaki)>이라는 이야기가 일본에서 한때 큰 인기를 얻으며 연인의 동반 자살이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자살특공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 알게 된 건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시 없이 스스로 자폭테러를 한 병사 3인방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감동의 물결이 일었고, 그걸 계기로 아예 자살 특공대를 정부에서 만든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국민의 전쟁영웅 우상화야 그렇다 쳐도, 이때다 싶어 그걸 아예 시스템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정말 소름 돋는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 감동의 물결을 알기 때문에 소년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귀한 영웅의 모습으로 포장해 자살 비행사가 될 것을 국가적으로 권유받았고 그런 의식을 치르며 전장에 나갔다.


영웅이 된 삼인방의 이야기가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소비된 흔적이다. 우측엔 캬라멜 포장지로도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전투 스펙터클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며 자살특공 비행사를 우상화하는 콘텐츠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마녀배달부 키키>,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하울의 움직이는 성>, 심지어 <이웃집 토토로>까지. 하늘을 나는 마법적 힘에 대한 설렘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모티브다. 경쟁적 근대화와 급격한 기술의 발전의 시대에 심어진, 마법같은 근대 세상에 대한 환상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많은 작품에서 마음껏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에서 그는 극현실주의적 이야기를 풀며, 마법에 대한 순수한 설렘이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착취될 수 있는지 그린다. 역사 속 실제 사건들을 풀어 나가는 사실주의적 톤과는 대비되는 "꿈"이라는 모티브는 작품을 열고 닫는 액자로서 기능하며, 전투비행기 개발에 몰두하는 사이 사랑하는 사람과 비행사와 또 비행기 공격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허망함을 전달한다. 이처럼 당시 아무리 목숨을 담보로 하더라도, 비행사의 꿈이 여러 소년의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과, 국가가 그 마음을 알고 어떻게 사용했을지, 애니메이션을 통해 잠시 함께 느끼고 상상해보았다.


이들의 자살을 보며 제의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남아메리카의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은 큰 스케일의 인간 제물을 바치는 의식으로 유명하다. 그 충격은 <아포칼립토>(2006) 같은 영화로 만들어지며 스페인의 '문명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됐지만, 장소와 시기를 불문하고 고대 문명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생명 제물의 제의적 사용은 이런 행위들을 마냥 야만적 무지함으로 치부하기엔 어렵게 만든다. 자살특공대도,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던 고대 문명 사람들도, 그 세계관 안에선 죽음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보는 자기희생적 행위는, 결국 외부적 피해나 강요가 아닌 주체적 결정과 어떠한 고리를 끊기 위한 확실한 감각과 진심의 사용 안에서만 그 마법이 발현된다. 살리는 희생과 죽이는 희생 사이엔 겉으로 보기엔 아주 미묘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종종 드러나는 전쟁에 대한 아픈 감정은 한국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일본이 말하는 전쟁의 아픔을 들어줄 여유도 이유도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번 도쿄 답사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그 전쟁의 아픔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7월 15일부터 10월 26일까지 '자료와 기억'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한다. 위에 첨부한 사진은 모두 그 전시에서 찍은 것인데, 도쿄의 가장 중심에 자리한 Royal Imperial Palace(한국 이름을 모르겠다)의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이다. 스폰서를 찾을 수 없었고, 검열의 압박 속에서, 제목에 쓰지 못했지만, 전시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적 역사를 정면으로 들춰내며 교육하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전쟁 당시 존재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 그들을 통해서 정부가 어떻게 대중을 현혹시키고, 세뇌하고, 자기희생을 강요했는지, 또 많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에 동의하지 않는 메시지를 예술을 통해 전달했는지. 아주 세밀하고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너무 많았고, 전시 수준이 압도적이어서 발 아프게 세 시간을 넘게 들여다보았다. 올해 초 <연극과 전쟁>을 한 학기 내내 가르쳤는데 그 전체 수업을 능가해 버리는 전시의 깊이였다. 솔직히, 내가 태어나서 본 전시 중 최고였다. 이 전시 하나만을 위해 도쿄에 오는 의미가 있을 정도로.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앞의 현수막 중 가장 왼쪽의 기획전이 내가 본 전시이다.


전시를 통해 확인한 건, 전쟁범죄를 너무 크게 일으키면서 일본은 자국민들에게도 타국민 못지않게 죄를 많이 지었다는 것이었다. 자살특공대부터 시작해서 길어지는 전투와 여러 층위에서의 온 국민의 희생 강요... 그렇게 가학적으로 불필요하게 자국민들을 희생시킨 건, 끝없이 반성해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저지른 죄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후손들이 안고 살아가야 할 현실이 너무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부가 아니라 의식 있는 사람들 얘기다, 전반적으로 일본은 너무 잘 살고 너무 평온한 사회였다.)


나란히 비교는 불가하지만 한국이 가진 역사적 아픔은 조금 더 논리적으로 단순하면서 감정적으로 깊은 결을 지닌다고 느꼈다. 반면 일본이 가진 아픔은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너무 복잡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느낀 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자기 땅에서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복잡해질 부분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뭔질 모르니까. 반면 일본의 미술관에서 마주한 원자폭탄의 기억은 정말 많이 참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일본에는 자신이 벌인 일의 실질적 감도를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열렸다. 일본이 제국으로 작정하고 발돋움할 당시 그 또한 일본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거라기보단 이미 시작된 세계의 패권싸움에서 살길을 찾으려는 맥락도 있었기에(그렇다고 절대 피해자라는 말은 아니다) 이 역사를 후손이 마주하기엔 정말 너무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보며 처음에 들었던 의문은 사명과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늘 고귀한 핏줄, 또는 지배자의 위치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도 선민적 감성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여행을 마치며 나는 이 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희생은 그냥 아무나의 좋은 마음으로는 오지 않는다는 것 - 그건 악의의 출발점과 그 책임을 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자정된다는 것.. 엄한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그런 통찰이었다. 작품 속 희생은, 일본이라는 사회가 안고 있는 미학화된 죽음의 제의적 무의식을 끌어오되, 그걸 정반대의 힘으로 전환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계속 진실을 전하고 자기를 내어놓으며 그 역사를 마주 본다. 위의 그림은 후쿠자와 이치로의 <소>(1936)라는 작품인데, 작가가 만주에 가서 본 나라의 모습이 일본 정부가 늘 보여주던 모습과 너무 달라 그 깨달음을 반영한 그림이다. 관객(=국민)이 접하는 성공적으로 제압된 소(=만주)의 모습이 실은 가짜 현수막 모습에 불과하단 걸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일본을 늘 조금 불편한 마음을 안고 들여다봤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깊이를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에 일본에 가서 느낀 건, 어느 나라든 어느 문화든, 인간 사회는 다 같다는 것이었다. 어디나 나름의 깊이는 있고, 단단한 영혼들이 있고, 또 그만큼 단단하지 못한 군중들과, 욕심에 찬 세력들이 있다. 예술과 마법은 늘 존재할 것이고, 그건 파멸적이기도, 소생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넘어선 개인의 의지와 수양이 곳곳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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