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고 깊어지는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하여
"강한 자들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이게 자연의 섭리야."
유년시절부터 사회구조 안에서 배웠던 세상의 이치 중 하나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고.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그 '강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성과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외부,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상처받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힘들어해선 안돼. 이 것을 뛰어넘어야 다음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 '이 정도에서 힘들어하다니, 난 왜 이렇게 나약한지. 그래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어?'라면서 마인드컨트롤을 해왔다. 그 이면의 본질은 강압적인 채찍질에 불과했었지만 말이다.
학창 시절엔 이 방법이 내가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다고 말만 했을 뿐, 어떤 사람이 강한 사람인건지,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불안'의 기질이 높은 사람이다. 학창 시절부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불안' 때문에 인생 살기 참 팍팍하다고 느꼈다. 고작 초등학생 밖에 안 됐으면서 애늙은이처럼 말이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 홀로 불안과 싸우느라 항상 치열했었던 기억이 있다. 남들보다 쉽게 불안해했던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불안하지 않은 척 감정을 묻어뒀다고 착각하면서 잔잔한 불안과 일상을 살아갔다.
묻어두니 사라진 줄 알았던 불안은 나도 모르게 파도에 휩쓸려온 모래 층 마냥 겹겹이 쌓여가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갑자기 엉엉 울어버릴 때면 '슬프지도 않은데 왜 눈물이 멈추지 않지?'란 기괴한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내 감정은 무엇이지? 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거지?' 란 물음표를 가지고 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온함'이란 가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안으로 부르르 진동 울리는 듯한 삶을 살아가다 보니, 잔잔한 물결처럼 평온한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행복한 삶이라 여겼다. 지금은 궁극적으로 여겼던 삶이 허상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평온함을 추구하다 보니 도전에 소극적이게 되었고 현실에 안주한 결정을 최선의 결정이랍시고 합리화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생기는 마음과 현실에 안주한 결정을 내리던 생각의 습관이 충돌할 때 또다시 마음이 시끌시끌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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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한 없이 약해지기로 결심했다. 결국 난 사회가 정한 강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성과주의 사회 기준으로 정해버린 강한 사람이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 것인지 당최 모르겠다. 그래서 강한 사람이 되는 대신 나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약해지기로 했다. 불안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로 삼아 나란히 걸어보기로 했다.
‘한 없이 약해져도 돼.' 란 말은 몸에 긴장을 이완시켜 주고 은은한 평온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나로서 있어도 괜찮다는 다정한 메시지를 전달하여 '해볼까?'라는 용기로 이어지게 해 준다.
한 없이 약해짐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발견하는 것,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 날 것의 존재를 드러내고 수용하는 과정을 의연히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약해지면서 깊어지기로 했다.
아등바등 살아내는 누군가에게 '한 없이 약해져도 괜찮아. 우리 같이 깊어지자.' 란 위로와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그래서 나부터 약해져 볼 용기를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내려 본다.
강해야 한다는 관념이 문득 신물 나는 누군가에게.
약해져도 괜찮지 않을까요?
약해진 당신도 언제나 옳아요.
약해질 용기를 낸 당신을 부디 다정하게 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