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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Jan 24. 2024

첫 키스의 추억

나에게 달콤한 키스를 돌려줘!

“커피 마실까?”     


“좋지. 오늘은 무얼로?”

    

“어제는 프랑스였지? 오늘은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면, 키스?”

     

“오케이. 키스.”     


아내가 진열장에서 키스하는 찻잔을 꺼냈습니다. 곧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합니다.



***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방문하는 나라나 도시의 특색이 새겨진 찻잔이나 컵을 하나씩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여행한 나라들이 어느덧 오십여 나라에 가까워지니까 그동안 수집한 찻잔이나 컵의 종류만 해도 꽤 다양합니다.     

 

그중 우리 부부가 제일 즐겨 사용하는 것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그림이 새겨진 찻잔입니다. 19세기에 활동하며 황금의 화가란 명성을 얻었던 클림트는 오늘날 명실상부하게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걸출한 화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갔을 때 벨베데레 궁전을 찾아갔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전성기 때 축제의 장으로 지어졌던 화려한 궁전이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벨베데레 궁전은 상궁과 하궁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클림트의 ‘키스’ 그림은 상궁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기를 소원했던 그림이었습니다.  

    

클림트의 그림 앞에 서자 와르르 눈앞으로 쏟아져 내릴 듯한 황금빛 색상의 조화에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는 퇴폐적 관능을 탁월한 예술성으로 오묘하게 융합하여 19세기 아르누보 시대의 한 정점을 이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두 연인이 뜨겁게 키스하고 있습니다. 그림 앞에 선 이들을 단번에 압도해버리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반짝거리는 황금색 배경이 너무나도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입니다.    

  

아내와 나란히 서서 클림트의 ‘키스’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련히 오래전 첫 키스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내와 연애하던 20대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밤늦도록 데이트하다 덕수궁 앞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나 오늘은 언니 집에서 자고 갈 거야.”  

   

공항동 사는 사촌 언니 집에서 자고 간다고 아내가 63번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아내와 헤어져 막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이 밤중에 누굴까? 수화기를 드니 아내였습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찬민 씨. 어떡해? 언니가 없어. 형부랑 어디 간 모양이야.”   

  

“뭐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불과 얼마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언니가 집에 없다면 길에서 헤매다 파출소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한데서 밤을 지새우거나, 혼자 여관방에 들어가거나,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당시 공항동은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아가씨 혼자 밤을 지새우기엔 너무도 위험한 곳이었고 여관방에 처녀 혼자 들어간다는 것도 꺼림칙한 일이었습니다. 통금 위반으로 파출소에 끌려간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갈게 그 자리에서 꼼작 말고 기다려!”   

   

한걸음에 큰길까지 달려 나왔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택시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나가는 택시들을 향해 큰소리로 따따블을 외쳤습니다.

     

“공항동! 따따블! 공항동! 따따블!”     


다행히 그쪽 방면으로 차고가 있다는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멈춰섰습니다.

     

따따블의 유혹에 빠진 택시 기사는 통금이 임박한 심야의 거리를 미친 듯이 질주했습니다.

     

한 남자는 사랑에 목숨을 걸었고 한 남자는 돈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두 남자가 목숨 걸고 치달린 결과 정확히 통금 5분 전에 버스 종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가 버스 종점입니다!” 나를 내려놓자마자 택시는 총알 같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거리 어디에도 내가 찾는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하는 순간, 줄지어 서 있는 66번 버스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뿔싸! 이게 뭐야? 여기는 63번 버스 종점이 아니고 66번 버스 종점이었습니다. 돈만 밝히는 저 괘씸한 택시 기사가 나를 63번이 아닌 66번 버스 종점에 내려놓고 뺑소니친 것입니다.     


      

***     



드디어 시간은 자정을 넘겼습니다. 저 멀리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63번 버스 종점을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뒤에서 방범들의 요란한 호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냅다 앞을 향해 뛰었습니다.   

   

“거기 서! 서! 서! 빨리 서지 못해!”   

  

방범들이 호각을 불며 맹렬히 쫓아왔습니다. 칠흑 같은 밤길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신문 배달로 단련된 몸이었습니다. 달리기 하나만은 자신 있었습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겨우 방범들을 따돌리고 한참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마침내 63번 버스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온몸이 펑 땀에 젖어 있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이리저리 아내를 찾아다니고 있는데…   

   

“찬민 씨.”

     

꿈결처럼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찬민 씨. 나 여기 있어.”     


돌아보니 아내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    


      

이제는 어딘가 둘이 함께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목욕탕 표시 있는 새빨간 여관 간판들이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젊은 연인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여관 간판들을 뒤로 한 채 내 손을 잡아 이끌고 벌판으로 나아갔습니다. 황량한 벌판으로 나가자 벌레 소리만 들려올 뿐 움직이는 것이라곤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뿐이었습니다.  

    

밤하늘에 구름 사이로 달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달빛을 받은 아내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황금색으로 느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어린 연인들이 달빛 아래 가만히 첫 키스를 했습니다. 키스하는 우리들의 어깨 위로 황금색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사십 수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된 우리 부부가 오스트리아 여행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키스 그림 새겨진 황금색 찻잔에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어느덧 내 머리는 허옇게 세어버렸고 아내의 얼굴도 굵은 주름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도 썽둥 잘려나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입니다.  

   

뒷 베란다에서 시끄럽게 덜덜거리던 세탁기 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습니다.     


“여보. 커피 다 마셨으면 나 빨래 널 동안 청소기 좀 돌려줘.”  

    

달콤한 첫 키스의 추억에 젖어 있다가 화들짝 깨어 얼른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아. 무드 다 깨네. 오랜만에 그때 기분 살려서 키스 한 번 하려 했더니…

    

아내는 베란다 건조대에서 빨래를 탈탈 떨며 널고 있고, 나는 투덜대면서 윙윙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돌려줘! 나에게 달콤한 키스의 추억을 돌려달라고!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키스 한 잔에 담아 마신 커피 한 잔의 추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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