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아주 늙고 불쌍한 냉장고 한 대가 있었다. 구모델이라 아마 요즘엔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문도 잘 안 닫히는 냉장고.
여느 냉장고처럼 위 쪽에 냉동실이 있고 아랫부분은 냉장실이 있다. 낡긴 했어도 작동이 되는 걸 보면 여간 기특한 게 아니었다. 식구가 많다 보니 공간 마련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구역을 잘 나누면 모두가 원하는 식재료와 반찬들을 보관할 수 있었다.
가족회의를 통해서 냉장실 맨 위칸은 아이들용으로 결정을 했다. 아이들이 아무래도 어리다 보니 식재료 신선도 상태나 유통 기한 등등 신경 쓸 게 많아서 눈에 띄는 맨 위칸은 아이들용으로 낙점되었다. 그 아래 두 칸과 맨 아래쪽 야채칸은 시부모님과 우리가 사용하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냉동실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어 냉동실에 넣어두면 음식에 전혀 문제가 안 생긴다는 입장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들을 넣어두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냉동실은 만원이다. 한 번은 내가 "어머니, 냉동실 정리 한 번 해주세요. 오래된 재료들이 너무 많아요. 어머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정리한 번 하시고 먹거리라도 신선한 것을 드셔야 건강하게 오래 사시죠." 하면 시어머니는"그래, 그렇지 않아도 다 버리려고 했어. 고맙다." 하신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냉동실은 정리가 안되고 더 포화 상태가 되어 뭘 찾기 위해 문을 열면 식품들이 우르르 밀려 나와 바닥에 떨어져 버린다.
"어머니, 냉동실 문이 안 닫혀요! 이리 와 보세요!.. 이건 유통기한이 한 달이나 지났어요. 버릴게요."
"에미야, 그거 오늘 먹으려고 했어."
"이건 또 뭐예요? 유통기한이 3년이나 지났잖아요?"
"저기... 마침 오늘 저녁에 아버지랑 요리해 먹으려고 했어. 애들은 안 먹일 테니 걱정 말아라"
시어머니는 아깝다고 버리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그런 식품들을 먹고 탈이 나서 병원에 가면 무려 10배, 100배의 돈이 더 들었다.
어느 날, 집에 도착해 아이들 저녁 반찬을 만드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아이들용으로 정해놓은 첫 번째 칸에 어른용 반찬통과 냉동실에 있어야 할 것들로 꽉 차 아이들용 재료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다 꺼내 다 확인을 해보아도 아이들용은 없었다.
시어머니가 어디선가 뛰어 왔다.
" 아니, 넌 오자마자 냉장고를 뒤져 일을 만드냐?"
"어머니, 아이들용 재료는 어디 있어요?"
"거기 있겠지, 그대로."
" 못 찾아서 그래요!"
"아, 몰라. 네가 다 요리해서 애들 먹였나 보지."
주저앉아 여기저기 다 뒤져보니... 아니! 맨 아래 칸에 아이들 식재료가 시어머니의 반찬통과 뒤엉켜 있었다. 이렇게 보관하면 항상 늦게 퇴근하는 난 최대한 빨리 아이들 반찬을 만들 수가 없다. 워킹맘이라 아이들을 직접 돌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 먹거리라도 안전하게 먹이고자 하는데 시모라는 분이 내 마음을 이해하려고 안 하고 도통 도와주지를 않는다.
"어머니, 왜 애들용이랑 어머니 반찬을 합쳐요? 그리고 이 어머니 요구르트는 유통기한이 열 흘이나 지났잖아요? 전 애들이 유통기한 지난 거 먹는 거 싫다고요! 어머니는 자꾸 이런 걸 애들 먹이고 그러시잖아요? 정말로 드시고 싶으면 어머니만 드시라고요!"
"유난스럽네... 그래? 니 새끼만 중하고 이 늙은이는 아무거나 먹고 일찍 죽으란 말이냐?"
"그럼 어머니도 냉동실 다 정리하세요. 여기 10년 지난 젓갈도 있고 작년 명절 때 받은 생선, 고기들도 있어요!"
"세상에 나보고 아무거나 먹고 일찍 죽으라네에~!"
냉장고와 관련해 언쟁을 벌인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아니, 아이용은 아이들 칸에 보관하는 게 그리 어렵나? 미적분 문제도 아니고, 이 고물덩이리 냉장고 때문에 매일 싸울 일인가?
새벽에 갈증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마시려는데
어둠 속에서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시어머니였다. 이쯤 되면 매일 귀신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어머니, 깜짝 놀랐잖아요? 거기서 뭐 하세요? 화장실 가시려고요?"
"아.. 아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다."
"......?"
"너야말로 뭘 또 버리려고 냉장고에 왔냐?"
"네? 그냥 물 좀 마시려고요."
"정말 물만 마시는 거지? 너 내 요구르트... 요구르트 버리는 거 아니지? 그거는 일주일 밖에 안 지났다."
"아, 진짜 왜 자꾸 요구르트 가지고 쫓아다니며 잔소리하세요? "
시어머니는 잠도 안 주무시고 내 동선을 쫓아다니며 감시하는 것 같았다. 내가 냉장고 근처에 가기만 해도 언제 어디선가 나타나신다.
그 당시 어머니 방은 매우 좁았다. 방에는 침대 하나, 옷 장, 의자 한 개... 이렇게 공간이 허락되었다. 그녀는 항상 방문을 조금 열어놓고 생활하기 때문에 그 문틈 사이로 침대가 바로 보인다. 한 번은 내가 거실로 나와 일부러 먼저 어머니 방을 보면 침대에 계셔야 할 어머니가 안보이시는 데 그 이야기는 그녀가 문 뒤에 서 계시거나 문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그때 내가 냉장고 쪽으로 가면 어머니가 바로 1초도 안 돼서 문을 열고 "일어났냐?" 하시며 나오시는 거다.
남편은 이 일을 계기로 냉장고도 어머니 방에 넣어드리자고 농담 삼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규칙적으로 매일 발생하니 어느 날부터 시어머니가 외출해 안 계실 때도 냉장고 근처로 향할 때 나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