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화: 누군가 다 보고 있다! ('전기밥솥'편)

by 이봄

나는 40세에 결혼해 시어머니와 10년간 같이 살았다.



우리 집에는 아주 작은 고물 덩어리 같은 전기밥솥이 한 개 있었다.



시어머니는 밥에 대한 철학이 있다. 일단 잡곡밥을 즐겨 드시고 적당한 찰기와 윤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 시모보다 더 심오한 철학을 가진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때로는 상황이 변하면 살림에 대한 철학도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늙은 며느리가 일과 가사 일을 병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시어머니가 원하는 그런 적당한 찰기에 윤기 흐르는 밥을 못 내어 놓을 때가 많다. 식당에서는 밥을 레시피에 따라 하지만 가정에서는 정량대로만 할 수 없는 법!


시어머니가 매일 몸이 아프시다고 해서 난 당연히 '밥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쌀을 씻어 안치곤 했다. 그런데 그분 입장에서는 쌀을 대충 씻고 잡곡도 제대로 불려지지도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해 지적을 하시는데 난 "아휴, 어머니, 어머니도 아프고 저도 일하는데 어떻게 옛날에 드시던 방식대로만 해요? 우리 그냥 피곤할 때는 대충 해서 먹어요."라고 설득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래, 알았다... 난 몸이 아파 살림은 다 포기했다...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나를 믿지 말아라." 하신다.


정말 다 포기하신 것일까?


주방 끄트머리 수납장 위에 낡고 병든 밥솥이 하나 있다. 이사를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 작동되는 게 신기할 정도의 전기밥솥이.


어느 날 늦게 집에 와 대충 빨리 밥을 하고 저녁 먹고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주방에서 쌀을 가져와 씻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어느새 내 옆에 와 계시는 게 아닌가?


"에미야, 너 또 잡곡이랑 쌀을 대충대충 씻는구나."

"조금 불렸다가 바로 밥 하려고요. 저희 저녁 안 먹었어요."

"그래도 콩은 따로 불리고 여름이라 냉장고에 어제 미리 보관을 했어야지........"

"어머니, 잠깐 저리 가 계세요! 아프시다면서 가서 쉬시라고요!"

"아니, 밥을, 그 밥을, 밥을, "

"알아요! 알아요! 그런데 전 그렇게 못해요. 밤늦게 들어와 언제 그 과정을 거쳐요? 어머니가 아파서 쌀도 못 씻을 거면 제 방식대로 한 밥 그냥 드세요."

"넌, 참 살림이 빵점이라서... 아휴..."

"저요? 저요?"

" 그만하자. 너무 어.. 지.. 럽.. 구.. 나..."


퇴근해 밥을 할 때마다 잔소리를 하시니 아주 격렬하게 밥솥을 던지고 가출해 버리고 싶다.

'저 놈의 밥통이 뭐라고...'

' 이런 밥통 같은 상황이 있나...'


다음날 아침에도 밥을 해야 하는데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하고 빨리 밥을 할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래!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시기 전에 밥을 하는 거야! '


밥솥을 '작동'시켜 놓은 뒤에는 별 잔소리를 안 하시는데 꼭 쌀을 씻는 과정에서 시어머니가 나타나시면 잔소리를 하니까 말이다. 그녀의 기상 시간 이전에 밥을 완료하면 된다!


'정말 집에서 밥 따위에 이렇게 에너지를 쓸 일인가...'


알람을 새벽 4시로 맞춰 놓았다.


새벽 4시, 저음 알람소리에 맞춰 재빠르게 주방으로 간다. 불을 켜면 시어머니가 깰 수도 있으니 창문 밖에서 어스름 들어오는 빛에 의존해 쌀을 재삐르게 씻는다. 물소리도 최대한 약하게.

자, 이제 씻은 쌀을 넣고 '취사'버튼만 누르면 된다!


"에미야..."

'취사 버튼이 어디 있더라... 안 보여...'

"에미야..."

'취사 버튼이...'

"에미야! 에미야! 너 여기서 뭐 하냐?"

"꺅...!"

"너 여기서 뭐 하냐?"

"어머니야말로 뭐 하시는 거예요?"


난 그만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바로 내 등 뒤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아니, 시어머니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하루 종일 '아야...' 신음소리를 내며 잘 걷지도 못하시는 분이 언제 내 등 뒤에 와 있는 것인지... 새벽 3시고, 4시고 내가 밥을 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시어머니! 어떻게 내가 소리도 안 내고 조명도 켜지 않고 주방 일을 하는데, 어떻게 그때마다 나타나는가? 잠도 안 자고 나를 감시하는 것일까?


남편과 이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 나 이제 밥 어떻게 해? 스트레스받아 죽겠어!"

"... 음, 밥솥을 어머니 방에 넣어드리고 밥을 해달라고 하자. 그 방법 밖에 없어."

"... 그럼 빨래는?"

"세탁기도 어머니 방에 넣어드려야지..."

"그걸 말이라고 해?"

"다 넣어드리고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해..."




이때부터 전기밥솥만 보면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난 며느리가 맘에 안들어...살림이 빵점이야.'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3화13화: 누군가 다 보고 있다!('세탁기'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