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밥에 대한 철학이 있다. 일단 잡곡밥을 즐겨 드시고 적당한 찰기와 윤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 시모보다 더 심오한 철학을 가진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때로는 상황이 변하면 살림에 대한 철학도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늙은 며느리가 일과 가사 일을 병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시어머니가 원하는 그런 적당한 찰기에 윤기 흐르는 밥을 못 내어 놓을 때가 많다. 식당에서는 밥을 레시피에 따라 하지만 가정에서는 정량대로만 할 수 없는 법!
시어머니가 매일 몸이 아프시다고 해서 난 당연히 '밥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쌀을 씻어 안치곤 했다. 그런데 그분 입장에서는 쌀을 대충 씻고 잡곡도 제대로 불려지지도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해 지적을 하시는데 난 "아휴, 어머니, 어머니도 아프고 저도 일하는데 어떻게 옛날에 드시던 방식대로만 해요? 우리 그냥 피곤할 때는 대충 해서 먹어요."라고 설득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래, 알았다... 난 몸이 아파 살림은 다 포기했다...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나를 믿지 말아라." 하신다.
정말 다 포기하신 것일까?
주방 끄트머리 수납장 위에 낡고 병든 밥솥이 하나 있다. 이사를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 작동되는 게 신기할 정도의 전기밥솥이.
어느 날 늦게 집에 와 대충 빨리 밥을 하고 저녁 먹고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주방에서 쌀을 가져와 씻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어느새 내 옆에 와 계시는 게 아닌가?
"에미야, 너 또 잡곡이랑 쌀을 대충대충 씻는구나."
"조금 불렸다가 바로 밥 하려고요. 저희 저녁 안 먹었어요."
"그래도 콩은 따로 불리고 여름이라 냉장고에 어제 미리 보관을 했어야지........"
"어머니, 잠깐 저리 가 계세요! 아프시다면서 가서 쉬시라고요!"
"아니, 밥을, 그 밥을, 밥을, "
"알아요! 알아요! 그런데 전 그렇게 못해요. 밤늦게 들어와 언제 그 과정을 거쳐요? 어머니가 아파서 쌀도 못 씻을 거면 제 방식대로 한 밥 그냥 드세요."
"넌, 참 살림이 빵점이라서... 아휴..."
"저요? 저요?"
" 그만하자. 너무 어.. 지.. 럽.. 구.. 나..."
퇴근해 밥을 할 때마다 잔소리를 하시니 아주 격렬하게 밥솥을 던지고 가출해 버리고 싶다.
'저 놈의 밥통이 뭐라고...'
' 이런 밥통 같은 상황이 있나...'
다음날 아침에도 밥을 해야 하는데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하고 빨리 밥을 할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래!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시기 전에 밥을 하는 거야! '
밥솥을 '작동'시켜 놓은 뒤에는 별 잔소리를 안 하시는데 꼭 쌀을 씻는 과정에서 시어머니가 나타나시면 잔소리를 하니까 말이다. 그녀의 기상 시간 이전에 밥을 완료하면 된다!
'정말 집에서 밥 따위에 이렇게 에너지를 쓸 일인가...'
알람을 새벽 4시로 맞춰 놓았다.
새벽 4시, 저음 알람소리에 맞춰 재빠르게 주방으로 간다. 불을 켜면 시어머니가 깰 수도 있으니 창문 밖에서 어스름 들어오는 빛에 의존해 쌀을 재삐르게 씻는다. 물소리도 최대한 약하게.
자, 이제 씻은 쌀을 넣고 '취사'버튼만 누르면 된다!
"에미야..."
'취사 버튼이 어디 있더라... 안 보여...'
"에미야..."
'취사 버튼이...'
"에미야! 에미야! 너 여기서 뭐 하냐?"
"꺅...!"
"너 여기서 뭐 하냐?"
"어머니야말로 뭐 하시는 거예요?"
난 그만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바로 내 등 뒤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아니, 시어머니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하루 종일 '아야...' 신음소리를 내며 잘 걷지도 못하시는 분이 언제 내 등 뒤에 와 있는 것인지... 새벽 3시고, 4시고 내가 밥을 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시어머니! 어떻게 내가 소리도 안 내고 조명도 켜지 않고 주방 일을 하는데, 어떻게 그때마다 나타나는가? 잠도 안 자고 나를 감시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