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여기저기에 아이들 빨래거리가 쌓여 있었다. '세탁기에 대충 넣고 돌린 다음에 빨리 널고 얼른 잠자리에 들자!'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워킹맘이 집안일까지 완벽히 해낼 수 있을까? 식당일을 마치고 오면 다리가 너무 아파서 오로지 침대에 누워서 다리를 쿠션 위에 올려놓고 쉬고 싶다.
우리 집에 오래되고 낡은 세탁기가 한 대 있는데 내 방 옆, 화장실 안에 있기 때문에 문을 닫고 있어도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얼마 전 세탁기의 바닥 지지대도 한 개가 빠져 그 자리에 벽돌 하나를 놓았었다. 빨랫감 돌아가는 '윙~'소리와 지지대가 흔들려 '덜그럭'거리는 소음까지... 명절 전 날 재래시장 현장이 따로 없다.
밤 9시 정도 되었나... 아이들 빨래를 모아다가 세탁기 통 안에 넣어두었다. 화장실에 가서 샤워를 한 후에 세탁기에 세제를 바로 부은 후 '동작' 버튼을 눌렀다. '이제 50분만 돌리면 난 쉴 수 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세탁기 소리가 '윙~'하고 들렸다. 같이 따라오는 '덜그럭'소리... 난 이 순간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까, 만 생각한다. '저 빨래를 돌리면 난 쉴 수 있어.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윙~'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문이 잠겨 있다.
"똑똑! 안에 누구 있어요?" 난 화장실 문을 두드려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
대답이 없다. 분명히 누군가 들어간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인기척도 없다.
'문이 안에서 잠겼나?'
"똑똑! 누구 있어요?" 다시 두드린다.
"... 에...미야... 나다." 어머니?
"어머니! 볼 일 다 보셨으면 문 좀 열어 보세요!"
".......'
"어머니! 어머니?"
"... 잠깐만 기... 다려라."
아니, 시어머니가 들어간 건 들어간 것이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왜 안 나지?
문을 계속 두드리니 시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뭘 못하게, 자꾸 문을 열라고 그러냐?"
급한 마음에 바로 들어가 세탁기부터 확인해 보니 세탁기가 꺼져 있었다. '이 낡은 놈이 수명을 다 했나?'
"어머니, 세탁기가 언제 멈췄어요?"
"내가 껐어!"
"아니, 왜요?"
"얘, 너는 왜 섬유유연제를 안 넣냐? 세제만 넣고 하면 옷이 망가진다니까. 섬유유연제를 꼭, "
'아...'
난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시어머니에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유연제고 뭐고, 세제 넣고 빨리 돌려서 빨리 널고 빨리 자려고 했어요. 오늘만 세제 넣고 한 거고 지금 시간이 없어 빨리 끝내고 쉬려고 했단 말이에요. 근데 그걸 끄면 어떻게 해요?"
"내가 지금 유연제 찾아서 넣고 다시 돌리면 되는데 넌 왜 예민하게 화를 내냐? 갑자기?"
"어머니! 어머니 옷이나 이것저것 넣고 잘 빨아요. 애들 빨래는 제가 알아서 찌든 삶든 볶든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 "
"넌 어른이 살림을 가르쳐주면 '네, 알았어요'하고 듣고 배우려는 자세가 없어! 뭘 갑자기 화를 내냐?"
"제가 또 언제, "
"아, 아... 아악!'
갑자기 어머니는 또 쓰러진다.
"그... 만 하자... 내가 너무 어지럽구나..."
시아버지는 또 달려와 나에게 시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한 거냐고 따져 묻고 남편은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쉰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소리를 지르며 싸우니 눈물까지 흘리며 '앙'하고 울기 시작한다.
'제기랄, 모처럼 집에 와서 빛의 속도로 빨래를 마무리하고 쉬려던 나의 오늘의 목표는 또 사라졌다. 빨래도 내 맘대로 못하나?'
남편에게 나가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말했고 그는 '알았어'하고 날 따라온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 어찌 보면 그도 참 안 됐다,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지만 내가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겠나! 사정없이 생맥주 두 잔을 마시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입을 열었다.
" 자기 어머니, 많이 이상해! 왜 세탁하는 데까지 따라와서 전원을 끄고 오히려 나한테 짜증을 내는거야?"
"... 그러게... 어쩌겠어, 빨리 돌아가시라고 기도라도 해야 되나?"
"... 무슨 말이야? 뭐 그렇게까지 말을 해?"
"... 자기가 원하는 게 그거 아냐?"
"... 꼭 이렇게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더라?"
나도 나이가 들고 머리가 하얘지면 시어머니처럼 세탁기 돌리는 며느리의뒤를 쫓아다니며 감시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