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서울 명동에 위치한 정말 예스러운 ‘000 호텔’ 내 커피전문점으로 정했다. 이후 근처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전날 친정어머니와 백화점에 가서 상견례용 하얀색 원피스를 샀다. 하얀색에 가까운 베이지에 진주 같은 구슬이 치마단을 따라 박혀 있었다. '참으로 이 여성스러운 옷을 나도 입는구나! 속이 울렁거린다.' 평소에 이런 옷을 안 입다가 상견례를 앞두고 입으려니 상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구토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자립해서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막상 결혼이란 걸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하니 뭔가 나에게 맞지 않는 길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 옷을 입어보고 한순간은 불쾌한 감정까지 올라왔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인데 왜 이런 마음들이 문득 올라오는 것인지... 나 같은 인간은 혼자 사는 게 맞는데 선택을 잘 못한 건 아닌지...다른 그 누군가와 화합을 이루며 살 자신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계속 아르바이트하면서 직장생활을 하며 바쁘게 사느라 이렇게 예쁜 옷을 즐겨 입을 정신적 여유가 없었는데 뒤늦은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런 옷을 입으려고 하니 쑥스럽고 어색해서 그런 거라고 덮어두기로 했다. 어느덧 청바지에 검은 셔츠가 제일 편한데 지금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사랑의 힘이 모든 걸 덮을 것이리라.
전형적인 상견례 날 장면처럼 6인석에 시아버님, 시어머님, 남편이 우리 앞에 앉았고, 친정어머니와 난 그 맞은편에 앉았다. 맞은편 창가 바로 옆에 앉은 시어머니의 얼굴은 참으로 인자해 보이셨다.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셨고 눈이 굉장히 크고 동그란 얼굴형으로 전반적으로 선한 인상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시어머니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옆에 앉아 계시던 시아버지가 나의 친정어머니에게
“죄송합니다. 안사람이 ‘진동’으로 하는 걸 잊었나 보네요. 하하하…”
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시어머님은 자연스럽게 그 전화를 받았고 내심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정도로 마무리할 줄 알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상황에서 통화는 계속되었다.
“응, 응, 그래… 권사님, 날씨 좋네요... 그게 우리 모임이 … 그래, 개선해야 될 사안이잖아요. 네, 네. 커피도 한 잔 해야지, 우리. 응, 응... 그래..."
교회 지인분과 통화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당연히 그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좀처럼 끊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시아버지는 우리 눈치를 보는 것 같았고, 급기야 시어머니에게 약간 언성을 높이며 말씀하셨다.
“아, 이 사람아! 나중에 건다고 해요, 나중에!”
그러나 시어머니는 하나도 동요하지 않고 너무나 평화롭게 통화를 이어갔다.
“아이고, 참, 죄송합니다. 하하하…”
시아버님은 민망하셨는지 계속 머리를 조아리면서 죄송하다고 했고,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 혹은 '얼음 왕자'가 되어 있었고, 친정어머니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아! 엄마가 열받았다.’
난 친정어머니가 고혈압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났을까 봐 짐짓 걱정되었다. 이 지병으로 한 번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기에...
‘아, 진짜 엄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당신은 죽었다.’
남편을 한 번 째려보며 생각했다.
‘아니, 왜!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걸까? 왜 한 마디도 안 하는 건지...’
남편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침묵하는지...
난 통화가 조금만 더 계속되면 친정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상견례가 불바다가 되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눈치'를 집에 두고 오셨는지 통화 상대자와 일상적인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제는 나도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되면 남편이
‘어머니! 빨리 통화 끊어요! 상견례에서 무슨 매너예요?’
라고 항의를 하는 게 정상인데, 비정상적인 상황이 지속되면서 숨이 막혀 왔다. 나의 분노의 원인은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예비 신랑의 존재와 친정어머니를 무시한 시어머니의 태도였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아 댔다. 아마 시부모님들도 인지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시어머님께 큰소리로
“어머니! 전화 좀 꺼주세요! 나중에 다시 걸어요!”라고 외쳤다.
시어머니는 해맑게 미소를 띠며 '그래.' 하며 겨우 전화 통화를 마무리하셨다. 아들이 화를 내니까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은 걸까.
“죄송해요… 급한 전화라서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라고 말하며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처음부터 들어보니 중요하지도 않았고 급한 전화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화를 가라앉히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몸에서 사리가 삼 백 알은 나올 정도로.
‘제기랄, 내가 미쳤지! 이 나이에 뭔 결혼을 한다고…’
자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려는 즈음
시어머니는 결국 불 난 집에 기름을 퍼부었다.
“호호호… 우리 교회에 피아노 반주하는 아가씨가 있는데 너무 참하고 예뻐서 지난주에 지인 분에게 우리 장군이(남편 이름)와 그 아가씨 소개팅을 부탁했어요. 그런데 자기는 싫다는 거 에요. 여자친구가 있다고 안 만난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그 여자친구가 누군인지 오늘에서야 드디어 보게 됐네요…호호호… 와서 보니 예쁘네요. 호호호…”
사부인 될 사람을 앞에 두고 휴대폰으로 심각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긴 통화를 하고 난 후에 갑자기 남편이 원래는 다른 아가씨와 소개팅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난 결심했다.
‘결혼은 없던 일로 해야겠다. 그래, 결혼은 미친 짓이 맞는구나.’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란 개인 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 대 집안의 결합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시아버지는 갑자기 ‘손주’라는 단어를 대화의 소재로 올리셨다.
“허허, 난 손주를 보고 싶은데 우리 며느리 나이가... 쩝... 좀 걱정되네요.”
당시 내 나이 40세, 대한민국 사회에선 40대 여자는 늙기도 늙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로 보통 결혼 시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며느리 후보가 맞다. 나 잘난 맛에 40년을 살아왔지만 객관적으로 나는 나이 많고 아이를 가지기 힘든 무늬만 여자인 가속화된 노화의 배를 타고 있는 그냥 ‘휴먼’인 것이었다. 인정해야 한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시아버님의 말씀인 즉, 아들의 손주를 보고 싶으나 며느리가 될 내 나이가 많아 고민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아이를 쉽게 가지기 힘드니 손주를 보고 싶은 두 어르신의 꿈을 파괴할 수도 있는 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상견례 장에서, 꼭 그 시점에 그 민감한 주제들을 나에게 던져야 했는지 묻고 싶었다. 상견례장에 오기 전에 그분들의 아들과 충분히 논의하면 안 되었나? 그 이후 결혼을 미루든지 취소하든지 합의를 하면 되는데 굳이 나오셔서 나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렇다고 내가 젊어지는 것도 아닌데 아니면, 내가 스스로 이 결혼을 포기하게끔 만들려는 취지인가?
사실 이 발언과 관련하여 시아버님은 가까운 미래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셨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꼭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재벌 집 사모님(예비 시어머니)이 가난한 집 예비 며느리에게
‘너 같은 게 감히 우리 집안에 들어올 신분이냐?’
이러면 며느리는 울면서
‘한 번 만 기회를 주세요… 우리 서로 사랑해요…’
라며 통곡을 한다.
예전부터 그 장면이 이해가 안 갔다. 저렇게 반대를 하는데 왜 결혼을 강행하려 할까? 시어머니가 저렇게 며느리를 싫어하면 설사 결혼이 성사된다 해도 결혼 이후의 생활이 평탄하지 않을 건대, 저렇게까지 최강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결혼이란 걸 해야 할까?
내가 그 남자를 아무리 사랑해도 주변에서 반대하면 피곤한 법이다. 그 피곤함을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상살이 자체가 쉽지 않은데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시어머니'라는 존재의 미움까지 받아내면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별을 하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끝내자고 생각해서 불끈 솟아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2차로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서 식사를 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만
“맛있어요, 호호호… 울 장군이(남편), 경란 씨(나)도 맛있죠? 호호호”
라며 이 집 음식 잘한다며 좋아하시며 식사를 하셨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으리라.
이 결혼은 산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시어머니만 맛있게 드신 그 식사를 끝으로 식당을 나와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남편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무표정.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