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 직장인, 30년차 직장인 아빠의 퇴직을 보다
작년 겨울, 아빠가 퇴직을 했다. 내 나이만큼이나 긴 시간동안의 회사생활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떠나는 마음이 시원섭섭하다고 했다.
어렸을 적부터 내가 아는 우리 아빠는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기계도 잘 고치고 운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수학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했다. 소소한 상식들이나 역사나 예술 분야까지 모르는게 없었고, 뉴스를 보며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환갑을 맞이한 아빠는 이제 서른살이 된 나더러 이게 뭐가 좀 이상한데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달라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것 좀 알아봐달라, 구청에 전화해서 저것 좀 물어봐달라고한다. 아빠가 나보다 더 잘알잖아~ 하고 말하니 이제 본인은 다 늙은 백수라서 잘 모르겠다며 다시 나한테 공을 넘긴다.
성가신 마음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일테지만 그에 더해서 뭔가 복잡한 마음도 생긴다. 슈퍼맨이던 아빠도 이젠 정말 할아버지가 되어가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리다. 가족간의 대소사도 이제는 언니랑 내가 상의해서 결정하고, 엄마아빠는 한 발짝 뒤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내가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같은 상황도 낯설고 엄마아빠가 진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것 같은 이 상황도 낯설다.
직장인이 되고나서 나는 이전의 스스로와는 다른 생각을 많이 갖게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아빠,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아빠의 회사생활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제 막 수습을 떼고 나홀로 소소한 일을 하기 시작했던 2020년 봄날, 이제 겨우 3개월 다닌 회사생활이 힘들어서 퇴근 후 8시만 되면 곯아 떨어지곤했다. 어디 쏘다니길 좋아하던 내가 주말에도 일주일간의 피로를 푼다는 이유로 집에 가만히 누워있는 걸 가장 좋아하게 되면서 아빠는 어떻게 이 생활을 30년이나 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끔 회사일이 힘들때면 당장 때려치고 싶다가도 아빠도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하곤 했겠지라며 오늘 울산 날씨가 어떻다던데... 하는 시덥잖은 주제로 퇴근 길에 전화를 걸기도 했다. 괜히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 울컥하기도 해서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막상 대학생-취업준비생 시절에는 아빠 표현에 의하면 '돈 필요할때만 전화하는 웃긴 딸'이었는데 직장인이 되면서, 특히나 같은 업계에 몸담게 되면서 멘토이자 스승이자 선배였던 아빠한테 전화를 자주 걸곤 했다. 투정을 부리는 내 전화에 아빠는 무작정 내 편을 들어주기 보다는 회사 입장에서 얘기를 하며 나의 현실감각을 깨워주기도 했다. 순간 순간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런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라 아빠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회사생활에 문득 회의감이 느껴질 때 주위 사람들에게 소소한 선물을 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아빠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회식을 마치고 양 손 가득 내가 좋아하는 빵과 아이스크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빠의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진다. 유난히 많이 웃었던 아빠의 그 날은 아무에게도 말 하지 못할 힘든 날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도 주말에도 공장에 큰 일이 생겼을 때마다 전화를 받는 아빠를 보며 아빠 회사는 왜 밤도 주말도 없냐며 뾰루퉁 하던 내게 아빠는 '공장은 기계가 아니라 생물이다'고 말했다. 20년 뒤 내가 밤에도 주말에도 회사 전화를 받을 때에도 아빠는 같은 말을 했다. '공장은 기계가 아니라 생물이다! 밥 안 굶게 니가 잘 챙겨줘야지. 이제 막 생긴 공장이니 자리 잡을 때까지는 힘들거다. 공장이 아니라 애기라고 생각하고 신경써야된다.'
아빠는 퇴직을 앞두고서 여러가지가 아쉽다고 했다. 잘했던 것과 잘하지 못했던 것들이 한번에 생각난다며 아쉬운게 많다고 했다. 내가 봤을때 아빠는, 아쉬운 게 하나 없을 만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 같았는데 본인의 생각은 다르셨나보다. 퇴직을 하면 세상에서의 쓸모가 없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퇴직을 하고서도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생활비도 마냥 줄일 수는 없으니 소소하게나마 일을 해야한다고도 했다. 아빠처럼 능력있고 멋있는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그게 더 고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아빠가 편히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작년 겨울, 나는 일도 탈도 많았던 2년차를 마무리 했고 아빠는 30년이 넘는 회사생활을 마무리했다. 아빠의 마지막 출근날에 아빠 몰래 퇴근시간에 맞춰 집에 작은 꽃바구니를 하나 보냈다. 반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아빠의 sns 프로필 사진인 걸 보면 효도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평생 살면서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것의 절반도 못해줄 게 거의 확실하지만,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가보려고 노력해야겠다.
얼마 전 백화점 나들이를 나섰다가 나만큼이나 새로운 기계와 장비에 관심이 많은 (내가 아빠의 천성을 물려받았다고 봐야겠지만) 아빠를 위해서 아주 많이 늦은 퇴직선물로 태블릿을 샀다. 아마도 며칠간은 이걸 이유로 아빠가 내게 여러번 전화를 주실 것 같다. 아이패드 유저로서 갤탭은 전혀 새로운 분야지만... 이제는 아빠의 가르침을 받는 딸이 아니라 아빠한테 도움이 되는 딸이 되기 위해서 나도 열심히 공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