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우리나라에서 2021년 5월에 개봉(스웨덴에서는 2018년 공개)했습니다. 스웨덴의 여성 감독 페르닐레 피세르 크리스텐이 '삐삐롱 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더그렌(1907~2002)의 사후에 만든 영화입니다.
아스트리드 린더그렌은 전세계가 사랑하는 작가로, 약자와 어린이를 위한 일에 책과 기고, 인터뷰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스웨덴의 아동인권, 동물복지, 녹지보호 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아스트리드는 스웨덴의 보물이자 자랑이었기에 그녀의 전기 영화를 만드는 일은 감독에게 가슴 벅찬 일이기에 앞서 대단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감독은 왜 하필이면 아스트리드의 수많은 업적과 저술, 영광의 순간을 뒤로 하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기간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건 바로 아스트리드가 미혼모로서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끝까지 감당한 이 시기가 아스트리드를 아스트리드 되게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또한 미혼모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때임에도 자기에게 닥친 역경을 누구에게 떠넘기거나 징징거리지 않고, 좁은 길을 담대하게 헤쳐나갔던 이 시기야말로 그녀를 세계적인 아동 문학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원래 제목, 젊은 아스트리드( Unga Astrid)대신, 사용한 영어 제목 Becoming Astrid 는 주제를 관통하는 매우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스트리드는 주관이 뚜렷하고 장작불 같은 열정을 지닌 10대 소녀입니다.
군다르는 10시 너는 9시, 너는 여자잖아
엄마가 한 말을 생각하면서 오빠 군다르와 함께 파티에 다녀 오는 길에서 답답한 마음에 갑자기 길을 멈추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합니다.
각종 차별과 억압에도 아스트리드는 군말 없이 집에서 장작을 나르고 마구간 일을 거드는 등, 허드레 일을 하고 있지만 아스트리드의 마음 속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끝없이 웅성거립니다. 부모님과 두 여동생 오빠와 함께 밭에 가서 감자를 심는 날에도 아스트리드는 여동생에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딸의 재능을 눈여겨본 아버지의 추천으로 아스트리드는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길게 땋았던 머리를 잘라 최신 헤어스타일을 만든 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스트리드가 너무 멋집니다.
그녀의 앞날에 거칠 것이 없어 보이지요.
그렇지만 인생은 마음 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철도 개통식 기사로 상사인 블롬버그에게 인정을 받기도 하지만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부남인 블롬버그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아스트리드의 인생에 격변이 일어 납니다. 아스트리드는 블롬버그의 이혼 재판이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스톡홀름으로 갑니다.
아스트리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보다 블롬버그의 이혼 재판이 유리하도록 출산의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덴마크로 가서 거기서 아들을 낳고 그 곳의 위탁모에게 아들을 맡깁니다.
재판이 끝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데리러 올게요.
크리스마스에 가지 않으면 모두 문제가 있는 줄 알 거에요.
아스트리드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고향 집으로 갑니다.
영화에서는 아스트리드가 힘든 역경의 순간마다 어린이 독자들이 아스트리드에게 쓴 편지를 읽어줍니다. 아들을 생각하며 비통한 마음으로
스톡홀름으로 갈 때도 어린이 독자의 편지가 흘러 나옵니다.
책에 나오는 애들은 뭐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삐삐는 부모님 없이도 잘 지내죠, 에밀은 벌로 헛간에 갇혀도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미오는 배가 고파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악과 싸워 이겼고요.
저도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외롭고 배고파도 맞서 싸우는 사람이 될래요.
그녀가 쓴 동화 속 친구들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아스트리드 자신이 힘들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외롭고 배고파도 맞서 싸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스트리드는 블롬버그가 부인과 이혼 재판이 끝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블롬버그는 감옥에 가지 않고 1000크로나의 벌금 선고를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아스트리드는 블롬버그가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아이를 덴마크의 위탁모에 맡기면서 까지 모든 걸 양보하고 견뎠는데 재판이 벌금선고로 끝이 나자 배신감을 느끼며 블롬버그의 결혼 제안을 거절합니다.
아스트리드는 아이를 혼자 키우기로 결심하지요. 그 것은 미혼모의 길이었고 당시의 통념으로는 잘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아스트리드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그 길을 갑니다.
아스트리드는 '굶주림'이라는 책을 읽고 위로를 얻어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아들 라세와 함께 살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집세만 벌어도 라세와 살 수 있어.
자동차 클럽에서 비서로 일하게 된 아스트리드는 라세와 살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라세를 데리러 덴마크로 갑니다.
라세가 여기를 좋아하겠지.
그러나 위탁모를 엄마로 알고 위탁모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라세를 억지로 데려올 수가 없었던 아스트리드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돌아옵니다.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삶이 불행했기에 행복한 이야기를 썼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두고 오는 아스트리드의 심정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집니다.
아들의 빈 침대를 바라보며 괴로운 나머지 침대 난간에 머리를 박아버리기도 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다가 쓰러지기도 합니다. 아스트리드는 아들 생각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행복하지 않습니다.
고향에 가 있는 아스트리드에게 한 통의 편지가 옵니다. 위탁모가 아파서 아들을 더 이상 돌 볼 수 없다는 편지를 읽고 아들에게 갑니다. 아스트리드는 위탁모 마리에게 묻습니다.
제가 혼자 할 수 있을까요?
엄마가 되어줘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사랑만 있으면 돼요. 아주 많이요. 당신한테는 있죠.
아스트리드는 엄마를 낯설어 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이 아픕니다. 이 때도 어린이 독자가 보낸 편지가 등장합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열심히 생각해 봤어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거요.
가끔 제 동생을 다른 애들한테서 지켜야 해요. 힘들지만 꼭 해야 하죠.
안 그러면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가 되니까요. 그렇게 되기는 싫어요.
아스트리드의 상황을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가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라세를 지켜야겠다는 아스트리드의 강한 의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라세는 집에 가고 싶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쉴 새 없이 보챕니다. 미혼모로서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일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콩 밭에 가 있으니 회사 업무도 꼬이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사장 린드그렌 씨에게
아들 때문이에요. 계속 기침을 해요. 아이가 죽을 까봐 한숨도 못 잤어요.
린드그렌(후에 남편이 됨) 씨가 아스트리드에게 휴가를 줍니다. 아이가 다 나을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요. 뿐만 아니라 의사까지 보내줍니다.
의사는 라세가 '백일해' 라고 하며 시간에 맡기고 낫기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는 아이에게 아스트리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나무를 타고 소다를 마셨어, 아이들이 잘 하는 일이었거든 ...
낮에는 아들 라세와 함께 공원에 갑니다. 그녀 자신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즐거웠던 것을 생각하며 아들도 자연 속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아스트리드의 보살핌으로 아들은 드디어 마음을 열고 엄마에게 다가옵니다. 아스트리드는 비로소 라세의 찐엄마가 되지요. 라세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고 아스트리드도 라세와 함께 포근하고 행복하게 단잠을 잡니다.
이 때도 어린이 독자의 편지가 이어집니다.
아스트리드 선생님, 우리 자매는 할머니가 돌봐줘요. 할머니는 늘 이래요. 할미랑 놀자 귀염둥이들, 할머니는 할머니인데도 노는 게 좋은가 봐요 선생님도 그럴 것 같아요. 책에 나오는 애들을 보면 선생님도 애들 같아요.
우리를 이해하죠. 아이들 편이에요.
드디어 아들을 이해하며 아들과 함께 즐겁게 놀 수 있게 된 아스트리드의 상황을 편지가 대변해 주고 있지요.
그녀의 안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 재능은 앓고 있는 딸, 카린을 돌보면서 그녀의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다리가 다쳐 나가지 못하고 꼼짝 없이 집안에 갇혀 지내게 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노년의 아스트리드가 그녀의 생일에 어린이들이 보내준 그림과 생일 선물 노래를 듣는 장면을 보여주며 "멋진 책 고마워요" 로 끝이 납니다.
내 안에 있는 아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더불어 다른 아이들도 즐거우라고 글을 쓴다는 '삐삐롱 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의 말입니다.
"내가 외롭고 슬픈 어린아이를 하나라도 밝게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그나마 내 인생에서 소중한 일 하나 쯤은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2002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사망한 후 스웨덴 정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을 제정하였는데,
2020년에<알사탕>, <구름빵>의 그림책 작가, 백희나 씨가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이 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