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중년 여성이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여성은 뉴욕에 살지요)
이 여성의 이름은 헬레인 한프이고 때는 1971년, 직업은 무명 극작가, 나이는 55세입니다.
84번지의 연인은 헬레인 한프의 '체링크로스 84번지' 라는 서간 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헬레인 핸프(책의 작가 이름에는 한프지만 영화에선 핸프라고 함, 이후로 핸프로 통칭)는 고전 문학을 즐겨 읽는 가난한 극작가입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헬레인 핸프가 프랭크(앤소니 홉킨스)의 마크스 서점에 처음으로 책을 주문하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핸프의 첫 주문서입니다.
목록 중 5달러 이하의 책이 있다면 편지를 주문서로 여기고 보내주세요.
핸프가 주문한 3권의 책이 핸프에게 도착합니다.
희귀 본을 3권 합한 금액, 5달러 30센트에 구해 주는 서점이라니, 핸프는 자기의 마음을 알아 주는 이곳에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원하는 책을 받은 헬레인의 답장입니다.
너무나 귀한 책들이라
초라한 제 책장이 부끄럽네요.
1949년 11월 3일
핸프의 책을 구하는 편지는 계속되고 마크스 서점의 담당자 프랭크는 핸프가 주문하는 책을 구하기 위해 출장도 마다하지 않지요. 주문한 책에 대한 핸프의 간절함을 프랭크가 알아 주었기에 가능한 수고였습니다.
프랑크는 핸프가 책에 대해 진심인 것을 단박에 알아 차렸지요. 핸프의 취향도 훤히 꿰고 있습니다.핸프에게 책을 구해 주는 일은 서적 판매로 치면 가성비 1도 없지요.
핸프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프랭크에게 책 주문과 함께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1949년에서 50년대 초, 2차 대전이 끝난 즈음에 런던의 식료품 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기는 한 집 당50그램 두 개, 계란은 1달에 1인 당 한 개만 살 수 있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핸프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햄과 소시지 통조림을 구해서 런던의 마크스 서점으로 보내 줍니다. 핸프가 보내준 통조림은 암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핸프가 보내준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 직원(5명)이 받아들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책 주문과 함께 오고 가는 편지와 소포로 인해 전 직원이 핸프의 팬이 됩니다. 핸프는 마크스 직원들과 프랭크에게 책 주문과 관계없는 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은 점점 서로의 속마음을 편안하게 털어놓는 사이가 되지요. 다혈질에다 까칠한 핸프 답게 편지에다 대놓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합니다
게으름뱅이씨,
책만 읽지 말고 가게도 좀 돌보세요.
직원들은 핸프의 꾸밈 없는 솔직한 표현과 작가 다운 유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니컬한 표현들이 재밌어 죽습니다.핸프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격식을 차리거나
점잖은 표현만 하려고 들었다면 전 직원과 한 가족처럼 지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951년 4월에 프랭크와 핸프가 주고 받은 편지입니다.
아내는 저를 하숙생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나 양손 가득 고기 계란 햄(핸프가 보내준)을 갖고 들어가면 용서해 준답니다.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오래됐거든요.
(프랭크는 핸프가 주문하지도 않은 책을 감사의 표시로 보내줍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이 책을 한 번 보십시오.
항상 행복하세요
1951년 4월
핸프의 답장입니다.
84체링 크로스가 여러분에게,
금테두리가 쳐진 책은 처음입니다. 그것도
내 생일에요.
프랭크의 아내는 이런 프랭크를 질투하는 대신 편지 쓰기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편지 뿐 아니라 가족 여행에서 찍은 두 딸의 사진까지 보내주지요.
핸프의 책, '마침내 런던'의 다음 구절은 마크스 서점에 대한 햄프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마크스 서점에서 샀던 책들은 뉴욕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들은 오랫동안 내게 오몰리 서점에 가봐, 도버&파인에 한 번 가보라니까, 라는 조언을 해줬다. 나는 한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런던과 이어지기를 원했기에 어떻게든 그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핸프는 런던을 가고 싶어 합니다. 편지에도 언급을 하지요.
열차를 타고 가서 런던 거리를 활보하고 싶어요.
기대를 하고 가면 런던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헬레인의 친구가 그 서점에 먼저 갑니다. 친구는 마크스 서점의 멋진 모습을 실시간으로 생중계 해 주지요.
영화에서는 자기가 누군지 가르쳐주지 않고 살짝 들어가서 서점 구경만 하고 나옵니다만
실제와는 좀 다릅니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미리 경고를 해줬더라면 좋았잖아! 그 서점으로 들어가 네 친구라고
말하니까 한마디로 우르르 몰려들더라. 네 친구 프랭크는 우리를 주말에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했고, 마크스 씨는 서점 뒤에서 나와 한프 양의
친구 분들이시냐면서 악수를 청했고, 서점 사람들 전부가 우리하고 식사와
술을 하고 싶어하는 통에 간신히 살아 나왔다니까.
여왕 즉위식 특별 세일에 맞춰 헬레인은 런던에 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치과 치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런던행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핸프의 방문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직원들은 슬픔에 빠집니다. 영화에서
프랭크는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지요.
나는 이제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하는, 딱 그런 표정이지요.
프랭크는 1969년12월에 맹장염 합병증으로 죽습니다.
존 던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인류는 한 권의 책과 같아서
하나님이 흩어져 있는 책장들을 거두시니
모든 책이 그분의 서재로 모이게 될 것이다.
존 던 식 표현 대로라면, 프랭크 라는 책도 그 분의 서재로 가서 꽂힌 것이지요
프랭크가 죽어도 노라의 편지는 계속됩니다.
친애하는 헬레인,
이젠 괜찮아요 남편은 굉장히 사려 깊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남편은 박식한 사람으로서 또한 자신의 해박함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남편은 인정 많고 유순했지요.
때론 당신을 질투했어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당신의 글 솜씨도 부러웠어요.
남편이 너무 그리워요
고맙게도 딸이 위로를 해 준 답니다.
진심을 담아 노라
까칠하고 시크한 여성이 매주 찾아와서 가격을 따지며 구하기 어려운 책을 주문한다면 마크스 상회의 직원들에겐
골치 아픈 손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겁니다.
핸프의 편지는 자칫 진상 손님이 되고 말았을 핸프를 특별한 손님으로 만들었습니다. 핸프가 주문한 책을 구하는 일은 직원들에게 일을 넘어서 기쁨이 되었습니다.
헬레인 핸프는 해마다 런던으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마지막 순간에 꼭 문제가 터져서
취소 하곤 했지요.
생각지도 않은 이 치료로 돈을 많이 쓰는 등 대개의 경우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지요.
헬레인 한프의 책 '체링 크로스 84번지' 의 판권이 팔리고 출판사의 홍보 요청과 기부금 등 여유가 생긴 덕에 마침내 런던 행의 길이 열렸습니다.
첫 장면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탔던 핸프가 드디어 마크스 서점에 당도하여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영화가 끝을 맺지요.
핸프역을 맡은 배우는 앤 밴크로프트입니다.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유부녀 애인 역할을 했지요. 프랭크역은 안소니 홉킨스이고 '남아있는 나날' 의 스티븐스와 인상이 비슷합니다.이분, 주디 덴치의 젊었을 때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 따뜻한 젊은 주부 역할이 이다지도 잘 어울리다니, 깜놀입니다.
영화에서 편지가 불러일으키는 감성이 장난 아닙니다. 겉모습과 상관없이 마음과 마음이 오갈 때만 가능한 순수한 기쁨과 낭만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한 행복에 빠져들게 하지요.
사실 우리가 사는 하루 하루의 삶이 편지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매일 편지인 나를 읽고 있지요.
핸프의 편지처럼,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해 주는 편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핸프의 소포처럼 비용을 들여서라도 사람들의 지루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선물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