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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자질이 필요해-5화

by 분홍소금

6시에 퇴근을 했다. 오여사는 역시 막 퇴근해서 들어온 딸 솜과 함께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함께 구름천으로 산책을 갔다. 구름천은 오여사 모녀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자주 찾는 산책로였다. 산책로에 들어서자 산중턱 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이 천변을 따라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계곡물은 곧 사람이 지어낸 어떤 훌륭한 곡조보다 쾌활하고 경쾌한 음악이 되어 그녀의 심신에 길을 내고 들어와 구석구석 쌓여 있는 응어리를 털어내고 씻어 주었다. 오여사는 노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앙탈하는 어린아이 같은 구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구름천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수줍음 많은 노을을 품고 있는 저녁 무렵이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둥실둥실 떠다니며 모양 바꾸기 놀이에 빠져 있는 휴일 아침이나 구름천의 구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구름천이란 이름도 사실 오여사가 붙인 이름이었다.


오여사는 낮동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솜을 쳐다보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소리 좀 들어봐, 구름 좀 올려다 보고, "를 반복했다.

솜은 오여사의 말을 건성으로 흘리며, 오여사가 첫 출근한 날에 대한 궁금증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관장은 어떤 사람이야? 직원들은 어때? 일은 어렵지 않았어?"

오여사는 낮에 사무실에서 맞닥뜨렸던 일에 대해 설명도 하고 하소연도 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네 생각에는 왜 사람들이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 같아? 엄마의 상식으로는 해석 불가, 이해불가야, 오늘 일어난 일도 그렇고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날 텐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첫날부터 갑질 오지게 하는구먼, 관장 성이 고씨니까 이제부터 고 관장을 고장이라고 부르고 왕수지는 왕재수로 부르는 게 어때?"

"속이 다 후련하네, 고장 좋아, 왕수지는 딱 봐도 왕재수지? "

"사무실 분위기가 기이하다. 엄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 고장이랑 왕재순데 두 사람 다 그 지경이면 앞으로 직장생활이 순탄치는 않을 것 같아. 그런데 엄마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안 되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도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할 것 같아,

내가 볼 때 일단 엄마가 그들이 기대하던 사람과 너무 달라서 처음부터 대 실망 수준으로 놀라지 않았을까 싶어.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라 아마 속으로 "허걱" 했을 거야. 나이 든 아줌마를 누가 좋아하겠어. 심지어 관장도 늙었다면서? 늙은 아저씨가 왜 늙은 아줌마를 좋아하겠어? 그 반대겠지. 엄마도 늙은 아저씨 진짜 싫어하잖아. 늙은 남자가 늙은 여자 싫어하는 것과 비교도 안 되게 싫어하더구먼. 음식을 흘려서 더럽다, 말이 장황하다, 아집만 남았다. 남의 얘기를 안 듣는다, 돈도 안 쓴다, 심지어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늙은 남자라고 했잖아."


"내가 그랬지. 그래서 내가 천벌을 받은 건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나온 관장의 행동은 지나친 거지. 대부분은 속으로 생각하고 말지, 함부로 내뱉지 않거든. 생각하는 대로 주저 없이 말해 버리는 걸 보니 꼰대 대마왕 납셨네 뭐. 근데 엄마가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은 전임자가 퇴사했기 때문이잖아. "

"그건 맞아, 그룹웨어에서 봤는데, 왕수지와 함께 입사한 전임자가 4월에 퇴사했더라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간 거야."

"전임자는 그 어려운 공채 시험에 통과해 입사하고선 왜 그렇게 일찍 퇴사했을까?"

"그건 나도 모르지.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 심하게 안 맞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나갔을까 싶기도 하고, 솜아, 잠깐, 전임자가 그들의 갑질과 괴롭힘으로 스트레스받아서 퇴사한 것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되는 것 아니야? 낮에 봤던 직원들 등살에 전임자가 퇴사한 게 내게는 기회가 된 거잖아. 완전 반전인데."

"퇴사 이유야 다양하니까 속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주 꼴통들의 집합소 같은 느낌이 들어."

"일이 서투르면 갑질이 더 심하겠지? 일을 빨리 배워서 실수 없이 해야 될 텐데 잘 될지 모르겠어."

"일을 빨리 배워서 잘하는 것은 기본이야."

솜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고 발걸음을 늦추었다.


"솜아, 네가 조직생활 선배니까 신입으로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아는 대로 알려줘."

"그보다 뭐랄까, 엄마가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걸 인정해야 해, 공공기관이니까 입사가 가능한 거지, 사기업이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충분히 어이없어 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엄마는 먼저 그 사람들도 엄마 못지않게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리고 직원들이 아들 딸 나이라고 아들 딸처럼 편하게 생각해선 안돼, 명심해야 될 거야.

직원대 직원으로 존중하는 것은 기본이고

함부로 하대해서도 안되고 심지어 말꼬리도 내리면 안 돼,

평소에 하듯이 너무 큰소리로 말하는 것도 별로라는 걸 알아 둬."


"존중에 관해서라면 원래 내가 좀 공손한 편이지 않아?"

"저번에 과일 가게 주인 아가씨한테 말꼬리 잘라먹었잖아,

엄마가 토마토를 고르면서 토경인지 수경인지 물어봤는데, 주인이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엄마가 "아무래도 수경 같은데, " 했잖아?"


"그게 뭐 어때서?"

"수경 같은 데요, 해야지 그런 걸 조심해야 돼.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누가 뭘 물어보는 걸 싫어해,

개인적인 것이든 업무적인 것이든 아예 물어볼 생각을 말아,

궁금한 것 있으면 고글에 물어봐,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려고 언제나 대기하고 있잖아.

직원들한테 딴지 걸지 말고 오지랖 떨면서 훈수 두는 것도 금물이야.

실적 낼 일 없으니까 파이팅 넘치게 일 안 해도 되니까 시키는 대로만 해, 그래도 중간은 갈 거야.

왕재수가 업무 가르쳐 줄 때 꼭 메모하고."



"그건 잘하고 있어."

"어쨌든 사무실에서 엄마가 최고령이잖아? 우리나라에서 고령자가 대접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야. 지갑을 열 때. 엄마도 지갑을 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늙음 비용, 에이징 코스트라고 해 두지 뭐. 그러니까 커피 셔틀 자주 하고, 커피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로, 알지?

힘든 시간이 있겠지만 그렇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수습기간 지나고 신입 딱지 떼고 일이 익숙해지면 거기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다고 할걸."

"왜?"

"아무래도 일이 없잖아, 사실 일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게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떼로 뭉쳐 무시하고 모욕하고 음해하는 거거든. 한가하니까 저희끼리 수군대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다가 자기들에게 맞서면 욕하고 모함하고 심지어 내쫓기도 하는 모양이더라고. 일종의 정치질이라고 봐야지.

그래도 엄마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무섭다. 잘할 수 있을까?"

"그걸 말이라고 해? 대한민국 아줌마가 뭘 못해? 대한민국 아줌마 속에는 보기 드문 범상치 않은 자질이 숨어 있거든. 주책과 오지랖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아줌마의 뚝심과 내공을 누가 이겨? 그러니 그걸로 충분한 거지. 존버 이즈 위너 알지? 그곳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무조건 승자라고, 엄마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오여사는 솜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미궁에 빠져 들 수도 있는 문제를 함께 나누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살피는 것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낮에 있었던 일은 나이 든 사람 티를 팍팍 내면서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이 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맞은 예방주사라고 생각하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오여사는 저 멀리 도망가던 희망과 용기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계곡물소리가 오여사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축복송처럼 들렸다.


'그래, 다시 기쁘고 감사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잘난 척 노, 비굴해서도 안 돼, 겸손하고 공손하게, 치우치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거야, 내가 벌인 일인데 내가 감당해야지!'

오여사는 솜과 구름천의 응원에 마음속으로 댓글을 쓰며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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