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여사는 왕수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여사의 마음은 관장에 대해 생각하느라 복잡하기만 했다.
'말로만 듣던 사무실 빌런? 꼰대의 끝판왕인가, 아님 텃세? 아님 기선제압?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인가? 사실은 별 것 아닌데 자의식에서 나온 혼자만의 생각인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지하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 옆으로 나 있는 자동문이 수영장 출입문이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습기가 훅 끼쳤다. 수영장으로 통하는 출입문 앞에 데스크가 있었다. 데스크의 첫인상은 처참했다. 상상하고 기대하던 모습대로 라면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밝고 환한 사무실 한편에 업무용 책상이 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데스크는 사무실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협소하고 초라했다. 그녀는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함께 내려온 왕수지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책을 읽듯 말했다.
"여기가 주임님 자리예요, 정확히 말하면 저희가 교대근 무니까 주임님이 출근하기 전까지는 제자리이기도 해요. 옆자리는 수영 기능직 주임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쓰는 자리고요."
오여사는 왕수지가 시키는 대로 소지품을 기계박스 위에 대충 놓고 자리에 앉았다.
왕수지는 오여사가 할 일을 알려주었다. 혹시 매뉴얼이 있냐는 오여사의 말에 왕 수지는 시스템 업체의 사용 설명서를 출력해 주었다. 왕수지는 한 가지 업무 설명이 끝날 때마다 "집에서 살림하다가 오신 거 아니잖아요,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시죠?"라는 말을 했다. 그녀가 살림을 하다가 왔건 일을 하다가 왔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왕수지가 왕재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왕수지는 이곳에서 자기가 갑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듯 지시적이고 단정적인 말투를 했다. 오여사는 왕수지를 보며 난데없이 멸종된 도도새가 환생한 것 아닌가 하다가, 도도새와 도도한 여성이 무슨 상관인가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왕수지는 오여사의 지나가는 작은 웃음도 놓치지 않고 "왜 웃으세요?" 했다.
오여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하고 얼버무렸다.
왕수지는 시간이 갈수록 '내가 왜 이런 데서 이런 아줌마에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나, ' 하는 듯한 짜증과 불만이 말끝마다 묻어났다. 왕수지의 짜증과 불만 섞인 태도는 그녀의 고압적인 태도와 뒤섞여 오여사를 주눅 들게 했다.
오여사가 보기에 어려운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책 잡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행여 실수라도 하는 날엔 그 봐란 듯한 태도로 이래서 나이 든 사람을 채용하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매뉴얼 옆 빈자리에 왕수지가 일러 주는 업무 내용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왕수지는 매뉴얼에 다 있는 내용이니까 메모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오여사는 메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들을 때는 알 것 같아도 돌아서면 금방 헛갈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수영장 강좌 안내와 결제, 시설물 관리와 단체 문자 그 밖의 자잘한 잡무들이 주를 이루었다. 아무리 봐도 촌각을 다투는 일은 없어 보였다. 시켜주기만 하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다. 오여사는 스프레드 시트 정도야 누워서 떡먹기 정도로 잘 다루던 이전 근무지의 특성화 고등학생들이 생각났다. 그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훌륭하게 해 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부여된 숙제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해치우고 싶은 사람처럼 속사포처럼 쏘아 대던 왕수지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기능직원(수영강사) 대 여섯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왕수지는 그들과 곧 하나가 되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자유수영 시간이 끝난 회원들이 탈의실에서 나와 데스크를 지나가고 있었는데도 통로 중간을 차지하고 장난치고 웃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몇몇 회원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데스크 주위가 왁자지껄하게 되어 수영장인지 시장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래도 되나 하고 있을 때 출입문이 열리고 관장이 들어왔다. 관장이 직원들을 보며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하며 너털웃음을 웃자 입 주위에서 턱 끄트머리까지 볼썽사나운 주름이 잡혔다. 직원들은 맛집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며 관장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야 곧 죽어도 피자 아냐, 아직도 몰라? 나는 삼시 세 끼를 피자로 먹어도 좋은 사람이야."
"관장님 입맛 장난 아닌데요." 하며 자기들끼리 좋아 죽겠다는 듯이 낄낄대면서 함께 나갔다. 관장은 오여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온갖 낯선 분위기에 오여사는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다. 그곳에만 시간이 멈춰진 느낌, 관장이나 직원이나 그 나물에 그 밥 같았다.
게다가 방금 전에 목격한 관장과 직원들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공공서비스의 최일선에 있는 기관에서 회원들의 편의에 무감각한 태도가 설마 일상은 아니겠지.' 하며 겨우겨우 걱정근심을 수습했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이런저런 일로 직장생활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이 밀려왔지만 낯선 환경에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과잉된 자의식이 빚어낸 생각일지도 모른다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직원들과 회원들이 다 나가고 데스크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오여사는 주일학교에서 자기가 맡고 있는 중고등부 아이들이 떠올랐다. 학생들이 담임을 배정받을 때 제일 꺼려하는 선생님, 부동의 1위는 나이 든 아저씨, 2위는 나이 든 아줌마였다. 다행인 것은 처음에 나이 든 선생님을 만나 한숨을 쉬고 인상을 찌푸리던 학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선입관을 말끔히 해소했다. 나이 든 아저씨와 아줌마들의 성실성과 끝을 모르는 섬김은 바쁘고 가난한 청년 선생님들과 비교불가였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서도 반전을 일으킬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반전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직원들과 지내야 한다. 마치 처음 시집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비롯해 시댁 식구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처럼 오여사는 관장을 비롯해 왕수지와 수영직원들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녀가 잘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오여사는 출근을 준비하면서 재차 돌려 보았던 영화 인턴의 주인공을 소환했다. 벤(로버트 드니로) 보다 그녀는 젊었다. 그리고 벤이 취직한 회사는 18개월 만에 220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고속성장한 의류쇼핑몰이다. 아무리 시니어 인턴이라고 해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직종의 회사이다. 젊은 감각, 최첨단 능력이 필수인 곳에서 벤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강점으로 대표인 줄스 오스틴(앤 해스웨이)의 마음을 사지 않았던가.
반면에 그녀가 일하는 곳은 공공기관이다. 최첨단 능력이 필요치 않다. 흔히 고인 물이라고 부르는 곳이 아닌가? 철밥통을 무기 삼아하던 대로 하는 곳이 일상인 곳, 민원인들에게 쳐 발려야 그제야 삐그덕거리며 달팽이처럼 느리게 따라가는 곳이다. 물론 연륜과 처세술, 논리, 유머까지 갖춘 벤만큼은 아니지만 오여사도 친화력과 이해심만큼은 남부럽지 않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부딪혀 봐야지,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는데 까지는 해 봐야 한다. 벤의 내공은 없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대한민국 아줌마의 뚝심과 저력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중2 무서워서 북한이 쳐들어 오지 못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그런데 그중2를 가볍게 눌러 버리는 이가 갱년기 아줌마라고 하지 않던가. 중2를 제압하는 갱년기 아줌마 출두요! 오리지널 꼰대 이든 젊 꼰이든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오여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는 결의를 다지며 퇴근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