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인주의자의 스웨덴 살이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
작년에 '스웨덴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스웨덴이 세계인의 주목 아닌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 역시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주변에서 많은 질문을 받아 그에 대한 답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 https://brunch.co.kr/@f2525cfe93794dd/4). 도대체 왜 집에 놀러온 친구에게 밥을 안주는 것일까? 곁가지를 쳐내고 말하자면 스웨덴의 개인주의 문화 때문이라는 것인데,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선문답같은 명제가 스웨덴 문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서로에게 낯을 가리고, 사생활을 공유하지 않고,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 등으로 스웨덴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설명된다. 때로는 정 없고 차갑게도 느껴지고, 때로는 서로를 향한 존중으로도 느껴지는 이 스웨덴 사람들의 개인주의의 다양한 면모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ENTP다. 유사과학이라 비난받는 MBTI지만, 대략적인 성향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이만큼 쉽고 편한 구분도 없다. ENTP는 주로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좀 제멋대로인 데가 있고, 논쟁을 좋아하는 타입으로 묘사된다. 누군가 농담으로 EN-들은 하도 말 (보다는 논쟁)을 하고 싶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글까지 쓴다고 했는데, 약간 찔린다.
아무튼 나는 극강의 E로, 매우 외향적이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한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즐기고, 뜬금없이 연락처를 주고 받거나 또 실제로 연락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그득한 장소에 들어서는 일은 긴장보다는 즐거움과 기대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 무언가를 하길 좋아했다. 혼자 서점에 가고, 혼자 밤에 글을 쓰고, 심지어 첫 해외여행도 혼자 간데다 어학연수를 할 지역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먼 곳을 골랐다. 그러니 누군가가 내게 혼자인 시간과 타인과 공유하는 시간 중 고르라고 하면 쉽게 답을 내기 어렵다. 결국 누구든 혼자일 때와 함께일 때의 자신만의 적절한 밸런스가 필요한 법이다.
내 성향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한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라면 스웨덴이 잘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분명 개인주의가 가장 극단에 있는 나라다. 친구를 만들기 쉽지 않고, 소위 '눈칫밥'을 먹게 되는 일도 적지 않게 생기고, 이에 서럽고 속상한 마음이 드는 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다같이', '무조건' 같은 단어에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스웨덴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달갑게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는 너 왜 그 나이에 석사를 또 하느냐, 결혼 생각은 없느냐, 연인이 있느냐, 있다면 무엇을 하느냐와 같은 질문을 최소한 초면에는 듣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개인적인 질문을 하더라도 이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대답하기 위해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아도 된다. 또한 스웨덴은 토론 문화가 발달해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앉아 토론하고, 또 이를 미디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니, 논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아닌가?
반면, 외향인으로서 스웨덴 사회의 폐쇄적인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내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그렇지 않았다. 한다리 건너 아는 스웨덴인 친구가 이곳에 있었고, 이 친구를 통해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여기저기에 초대받아 다니며 외향인에게 필수인 '인간 에너지'를 잔뜩 충전받고 다녔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게는 있다. 그가 내 친구라고 해서 그의 친구들이 자동으로 내 친구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는 많은 이들이 어릴 때부터 알았던 친구들과의 좁은 관계를 유지한다. 많은 경우 그들의 파트너까지가 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타인'이다. 적당히 친한 직장 동료, 인사를 나누는 이웃 정도 까지는 어렵지 않게 될 수 있지만, 명절이나 생일 등을 함께 보내는 커뮤니티는 무척 좁다. 이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외국인들, 특히 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은 스웨덴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나라 출신 사람들과의 커뮤니티에서 안정감을 찾는 경우가 많다. 나는 정말로 운이 좋게도 내 친구의 여자친구와 정말로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고, 그 덕에 내 또래의 많은 여자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내 '친구'냐고 한다면, 그 대답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자라지 않았고, 학교에 함께 다닌 적이 없고, 여행이나 생활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고, 취업을 도와주는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에서는 타인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물론 80 노인을 대할 때 어느 정도의 존중을 표하는 것은 흔하지만, 나이나 위계에 따라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변하지 않는다. 일례로 시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도 흔하고, 교수님이나 상사는 당연히 이름으로 부른다. 일종의 존댓말 (du 대신 ni, 혹은 대문자 DU)이 있긴 하지만 이를 쓰는 경우도 흔치 않을 뿐더러 이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나이 뿐만이 아니다. 상대의 직업이나 직위, 혹은 배경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여러 요소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고, 사생활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이 교양있는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최소한의 주의해야 할 선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스칸디나비아 전반을 지배하는 사고를 표현한 말이 있다. 바로 '얀테의 법칙 (Jantelagen)' 인데, 이는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 법칙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따라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가르치려 들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등의 열가지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매우 엄격한 행동 양식으로 여겨지는 이 법칙은 사실 바꾸어 말하면, 타인 역시 나를 같은 수준의 엄격함으로 존중할 것이라는 상호 기대로 이어진다. 어떤 경우든 사람은 똑같을 수 없다. 나이가 다르고, 교육 수준이 다르고, 재산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 심지어 쌍둥이조차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 필연적인 다름을 고려하면, 역설적으로 어차피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얀테의 법칙이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네가 남보다 '더 낫지 않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네가 남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모두가 동등함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웨덴 문화가 겸손보다는 평등을 추구한다는 힌트다.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제법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이더라도 서로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 모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예를 들면 파트너가 있는지, 누군가와 함께 사는지, 성적 지향성이 어떠한지 등의 부분이다. 사실 이러한 정보는 딱히 비밀이 아니다. 자녀 때문에 일찍 미팅을 마무리해야 하거나, 파트너를 지칭할 때 'he/she'로 지칭하는 등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를 초면에 서로 묻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그리고 이에 관해 지나치게 사적인 언급을 삼가는 것이 예의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바쁜 현대인이다. 스웨덴어 선생님의 성적 정체성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고, 이는 그의 교수 능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싱글이든, 여자 혹은 남자친구가 있든, 자녀가 있든 없든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에 대해 신경쓰고 파고들 이유도 없고, 나의 선택이 아닌 일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체의 평가를 내려야 할 이유가 없다. 누가 내 멱살을 잡고 넌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사귀어야 해! 라고 나를 탈탈 터는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요리 팁을 찾을 때, 구할 수 있는 재료에 기반한 레시피를 찾느라 주로 스웨덴 레시피 사이트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가금 포트락 파티 등 한국 요리를 할 일이 생겨 한국 사이트에서 레시피를 보다가 뭔가가 낯설게 느껴졌다. 바로 많은 채널이 '아이들이 좋아해요', 혹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과 같은 멘트를 쓴다는 점이다. 물론 요리를 해서 가족 구성원과 나눠먹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자신이 그 요리를 얼마나 좋아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매운 정도나 재료 구성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보기 어려운 반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이 음식을 얼마나 즐기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이 큰 차이점으로 느껴졌다. 사랑하는 이들이 내가 한 음식을 잘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지만 '나' 역시 내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다. 관계의 기반은 희생이지만, 나의 존재를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나의 세계에 초대할 수 있을 때 나의 세계가 더욱 커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앞서 말했듯, 나는 스웨덴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잘 맞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내가 모두를, 아니 심지어는 한국인의 경험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분명 많은 이들이 스웨덴의 문화가 차갑고 외롭다고 느낄 수 있다. 이를 자주 느낄 때가 바로 스웨덴어 학교에서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때이다. (참고로 스웨덴에서는 학생/취업/난민 등의 이유로 거주하는 중이기만 하면 스웨덴 정부가 제공하는 외국인 대상에서부터 고등학교 정규 교육에 해당하는 수준까지의 스웨덴어 수업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많은 이들, 특히 유럽 근방 국가 출신이 아닌 이들이 외로움을 호소한다. 가족 및 커뮤니티 중심적인 문화가 강한 중동이나 동유럽 등지에서 온 이들이 이 개인주의적 문화에 가장 큰 반기를 든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커뮤니티 내에만 머물고, 자신의 모국어만 말하려 한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사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스웨덴 사람들과도 교류하고 싶어한다.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스웨덴 사람들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특히 노인들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스웨덴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민자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아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영어가 능숙하고, 외국인을 대하는 데 익숙한 대학원 및 회사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데 반해 어떤 이들은 상점이나 복지 센터 등 연령대가 높고 외국인과 많은 교류를 하지 않는 스웨덴 사람들을 주로 만난다. 그러니 같은 스웨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더라도,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나는 '그룹화'되지 않은 동아시아 개인 이민자이고,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 사회에 큰 규모의 분리된 커뮤니티가 존재하는 특정 집단 출신의 가족 단위 이민자다. 만나는 사람들도, 비춰지는 모습도 다르니 같은 사회에 살더라도 자연히 상충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스스로를 '외국인'이라 칭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이민자'라 칭한다. 나는 이 이 사회에 계속 머무를 지 결정하지 않았으니 '외국인'이고, 이곳을 두번째 집으로 정한 이들은 '이민자'이다. 잠깐 경험해보고 떠나는 사람과,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의 경험과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외국인이 이 문화를 그냥 받아들이고 적당히 적응한다면, 이민자는 이 문화에 적응하는 한편 변화를 추구할 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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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집 뒷집 건넛집의 수저 갯수까지 아는 가족적인 커뮤니티에서 살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런 문화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의 선을 긋는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고 장벽을 느끼는 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문화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여러 문화가 서로 만났을 때, 자신의 문화만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의 장점을 배워나갈 수 있다는 것이 다원주의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이나 문화를 비난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기본이다.
스웨덴, 혹은 다른 나라로의 유학 혹은 이민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의 성향과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적 배경을 잘 고려하여 결정하시기를 권한다. 직업의 기회나 언어, 혹은 경제 수준 등이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흥이 많고 타지인에게 관대한 중남미에서 보낸 20대는 환상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피곤한 때도 많았다. 누군가는 지루하고 차갑다고 생각할 스웨덴은 반대로 편안하고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이처럼 성향 차이도 있지만, 같은 나라라도 학생일 때와, 결혼해서 살 때와, 직장인일 때의 경험이 다 다르니 이 역시 잘 고민하여 스스로를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결정을 하시길!
마지막으로, 이 글 제목에 있는 <나는 나> 라는 노래가 어떤 가수의 노래인지 아신다면, 그렇다. 당신은 아마도 MZ세대에서 밀레니얼 끝자락에 간신히 걸쳐있는, 그래서 Gen Z와 함께 묶이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어쩌면 '젊은이'로 묶어주는 데에 감사를 느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