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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별 마실 Oct 07. 2024

나에게도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골방 신세가 된 팩스 이야기

내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컬러복합기는 아침부터 바쁘다.

아침에 긴급회의가 있단다.

거래처에서 이메일로 받은 제안서를 사장님을 비롯해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수만큼 준비해야 한단다.

'위잉~ 위잉~'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형형색색의 그래프들이 문신처럼 그려진 A4용지를 쉴 새 없이 토해낸다.


내가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직원들이 접근하기 우며 눈에도 잘 띄는 자리로 배정받았다.

그때 나는 회사의 중요한 계약서들을 국내는 물론 멀리 뉴욕까지 나르며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감광 롤페이퍼도 하루 두세 번은 교환해야 했다.

웬만한 거래처들과 주고받아야 하는 서류는 거의 내가 담당하였다.

내 몸에는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어서 먼 곳과 서류를 주고받기에 최적화된 역량을 인정받았다.

특히 긴급하고 중요한 서류는 등기우편으로 보내기 전에 내가 먼저 처리해야 한다.

내가 흑백으로 서류를 전송하고 나면

직원이 전화로 상대편이 받았는지 확인만 하면 업무처리를 바로 이어갈 수 있었다.

계약서에 찍힌 도장이 흑백으로 표시가 되어도 문제없었다.

일단 도장이 있다는 사실로 서로 신뢰할 수 있었다.

나중에 우편으로 받아 진짜 빨간색 도장이 찍힌 서류를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오전 근무시간이 한 참 지나고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나에게 전달을 의뢰하는 서류 한 장 없어 좀이 쑤신다.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마부는 운전사로 변신했지만 말은 퇴출되었다고 했던가.

시대의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빠르게 인간이 쓰는 사물들이 변했다.

일이 없이 있으려니 눈치도 보인다.

아 참, 오전 10시경에 2쪽짜리 서류가 보내져 오기는 했다.

대출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대부업체 홍보문이다.

MZ 신입사원이 여지없이 재활용 이면지 함으로 던져버렸다.

이젠 감광롤페이퍼를 교체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문서를 쉴 새 없이 뽑아야 할 때에는 몸이 너무 뜨거워서

열을 식히기 위해 한참 동안 입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나에게도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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