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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빨간 머리 앤의 섬 PEI

민재 미첼 mjmitchell

by 민재 미첼 MJ Mitchell

10. 빨간 머리 앤의 섬 PEI


노바스코샤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프린스 에드워드 섬 Prince Edward Island (줄여서 PEI)을 방문한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빨간 머리 앤의 명성 때문에 거의 필수 코스가 됐다. 캐나다의 대서양 연안 4개 주-노바스코샤, PEI, 뉴브런즈윅, 레브라도&뉴펀들랜드를 묶어 아틀란틱 캐나다 Atlantic Canada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캐나다의 대표적 여름 관광지이다. PEI는 노바스코샤주의 북쪽에 떠있는 작은 섬이며 캐나다에서 가장 작은 주 province다.

PEI는 섬 자체로도 물론 아름답지만 빨간 머리 앤의 섬으로 너무 유명하다. 캐네디언에게는 PEI라고 불리지만 한국, 일본, 대만 등의 극동아시안들에게는 그냥 '빨간 머리 앤의 섬'으로 통한다. 소설 '빨간 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을 집필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 Lucy Maud Montgomery (1874 ~ 1942)'의 고향이자 소설의 배경이 바로 이 섬이다. 섬에는 소설 속 앤이 살던 초록 박공지붕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집과 몽고메리의 박물관이 있다.


비스듬히 누운 노바스코샤의 가운데 부분에서 북쪽 바다를 건너면 PEI다. 노바스코샤에서는 섬과 육지를 오가는 배 ferry를 이용할 수도 있고 뉴 브론즈윅 New Brunswick 주와 연결된 다리를 이용해서 섬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PEI의 주도시인 샬럿타운 Charlottetown은 노바스코샤에 있는 우리 집에서 약 340Km 떨어져 있고 다리를 이용하면 차로 3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당일치기 관광도 충분한 거리이다. 섬은 1997년 완공된 컨페더레이션 다리 Confederation Bridge로 육지와 연결돼 있다. 바다 위에 놓인 이 다리의 길이는 무려 12.9Km이고 다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캐나다의 연합과 동맹의 뜻이 담겨있다. 캐나다의 각 지방 정부와 작은 섬 PEI와의 인적, 물적 자원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모두의 뜻을 모아 건설되었다고 한다.

Confederation Bridge

PEI는 캐나다에서 제일 작은 주이지만 캐나다의 역사와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제주도보다 3배 넘는 크기이고 인구는 15만 7천 명 (2019년 기준) 정도에 불과하다.(제주 인구 67만 명-2020년 기준) 인구밀도가 낮은 한적한 목가적 풍경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PEI는 캐나다의 중요한 감자 생산지이다. 캐나다에서 소비되는 감자의 약 70% 정도가 이 섬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작은 섬이 가진 큰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섬에서는 감자 외에도 보리, 블루베리, 낙농업을 위한 건초 등이 생산된다. 감자 꽃이 피는 계절에는 섬 전체가 온통 흰 감자 꽃 천지가 된다고 하니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도록 아름다울 것 같다. 더구나 길쭉한 모양의 섬은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가진 덕에 해안선이 길고 섬 어디에서나 바다가 가까워서 여름 휴양지로 인기가 좋다.


내가 처음 PEI에 간 것은 이민 오기 전 휴가차 시댁이 있는 노바스코샤를 방문했을 때였다. 처음부터 PEI방문을 계획했던 건 아닌데 공교롭게도 남편의 친구가 PEI에서 결혼을 한다고 우리를 초대해 준 덕에 뜻하지 않게 섬을 방문할 좋은 기회가 생겼던 것이었다.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것만도 기쁜데 그곳이 빨간 머리 앤의 관광지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설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결혼식이 먼저였는지 앤의 초록박공지붕집 방문이 먼저였는지 자세히 기억도 안 난다. 그렇지만 완전 캐나다 시골 스타일의 우아한 숙소(Bed and Breakfast)를 잡았던 기억과 앤의 박물관을 방문한 기억, 그리고 작고 예쁜 교회에서 치러진 친구의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첫 PEI 방문에서 초대받은 결혼식은 내가 처음으로 참석한 캐나다 결혼식이었다. 엽서에나 나올 것 같은 하얀 교회 안에서 화동이 꽃을 뿌리고 멋진 드레스를 차려입은 들러리들과 함께 엄숙하고 차분한 결혼식이 진행됐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서약 후 그 자리에서 바로 결혼 서류에 서명을 했고 퇴장하는 행복한 부부를 위해 하객들은 비눗방울을 불며 축하했다. 그리고 장소를 옮겨 다과와 음료를 마시며 신랑 신부의 이야기도 듣고 밴드의 음악에 맞춰 온 가족, 친지, 지인들 모두 밤새도록 춤을 추는 피로연을 즐겼다. 식장에서 시간에 맞추어 후다닥 결혼식을 치르는 한국보다 여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PEI에 들어서면 어디에나 빨간 머리 앤이 있다. 길거리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도 빨간 머리 앤의 인형이 주렁주렁 열매처럼 걸려있고 감자칩 겉봉투와 블루베리 음료 병에도 활짝 웃고 있는 앤을 볼 수 있다. 앤의 섬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제각각 개성이 다른 모습을 한 인형들이지만 하나같이 빨간 머리를 양갈래로 땋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양쪽 뺨에는 주근깨가 가득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은 이 인형을 보자마자 노래를 부른다. 아니 이 노래는 앤을 떠올리기만 해도 자동 재생된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일본에서 만들어진 앤의 애니메이션은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그런지 앤의 박물관에 가면 한국 사람, 일본 사람, 대만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Anne of Green Gables Museum

앤의 초록 박공지붕 집은 아담했다. 집안에는 소설 속 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가구와 옷, 부엌살림 등을 잘 재현해 놓았다. 앤이 그토록 입고 싶어 했던 벌룬소매 드레스가 걸려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초록 박공지붕은 단순히 앤의 삶을 재현해 놓은 것 뿐 아니라 옛 캐네디언의 삶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사박물관과도 같았다. 집 주변으로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보기 좋았다. 알고 보니 이 역시 소설 속 앤의 집 주변 환경에 가장 가깝도록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활짝 핀 접시꽃을 보며 앤이 내 곁에 와서 말을 걸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계몽 출판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지만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위해 무려 50권으로 이루어진 책 세트를 사주었다. 책들은 배달될 때부터 맞춤 책꽂이와 함께 도착했다. 우리 삼 남매는 마루에 책꽂이를 놓고 번호 순서대로 가지런히 책을 정리했다. 자주색 책들이 빼곡히 꽂힌 책꽂이가 나는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맞벌이하는 부모님들은 날이 저물어야 집으로 돌아왔고 오빠들 역시 언제나 늦게 집에 왔다. 막내인 나는 하교 후 빈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는데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은 나의 가장 가깝고 좋은 친구였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으며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옛 노래는 그때 들은 것들이다. 그 시절 읽은 고전 문학들은 나에게 풍부하고 입체적인 상상력을 갖게 해 주었고 나의 유년시절은 그로 인해 조금 덜 외로웠다. 나는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빨간 머리 앤'은 물론이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작은 아씨들' '걸리버 여행기' '소공녀' '소공자' '보물섬' 등의 이야기들을 읽고 또 읽었다. 책꽂이에서 무작위로 뽑아 읽기도 하고 번호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기도 했다. 너무 늦게까지 책을 읽는다고 어른들에게 핀잔을 들으면 이불을 덮어쓰고 랜턴을 비춰가며 읽기도 했다. 나는 책 속에 나오는 이름도 낯선 주인공들과 그들이 사는 나라가 신기하고 궁금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빨간 머리 앤의 나라에도 가보고 작은 아씨들이 사는 나라에도 가보고 싶었다.

그러니 PEI는 내게 설레는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릴 적 상상하고 꿈꾸어 본 앤이 사는 마을이 아닌가! 소설 속 앤과 소설을 읽는 그 시절의 나는 비슷한 또래였고 앤처럼 내 얼굴에도 주근깨가 가득했었다. 힘든 역경 속에서도 바르게 커가는 앤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방문한 앤의 집에서 나는 앤보다 훌쩍 커버린 나를 만났다.

나는 앤의 박공지붕집 방문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다. 모든 감정이 몸속 어딘가에서 교통정체에 걸린 듯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서 조금 어지러웠다. 앤이 없는 앤의 집에서 앤의 삶을 기웃대며 사진을 찍다가 문득 꿈을 담았던 소녀의 마음보다 현실이 보였다.

잘 쓰인 문학작품은 훌륭한 경제적 재화財貨가 되었다. 세계인들이 가상의 인물 앤을 추억하기 위해 모인다. 기념품점에 있는 수천 가지의 상품마다 앤이 그려져 있었다. 앤과 감자가 PEI를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PEI의 섬주민은 앤 하나로 족하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태어난 지 백 년이 넘었는데도 앤은 늙지도 않고 여전히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를 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PEI에 가득하다. 캐나다의 영원한 자랑거리가 된 앤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앤을 달콤하게 환상하지 않게 되었다.

PEI 풍경

몇 해 전 후배 H가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도 나는 역시 그녀를 데리고 PEI에 갔다. 그녀에게는 앤의 박물관 방문이 우리 집 방문만큼 중요했었다. 부랴부랴 운전을 해서 도착한 앤의 집 앞에서 나는 한껏 감동에 찬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주었고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룬 H는 감격했다. 행복에 취한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서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자신의 버킷리스트 달성을 자축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서둘러 술을 파는 마트 앞에 차를 세웠다. 그때가 정확히 오후 5시 58분이었다. 우리가 차를 막 주차하려는데 한 젊은 여자가 마트에서 나와 문을 닫는 장면이 보였다. 설마... 하는 순간 마트의 문을 걸어 잠근 그녀는 문 앞에 놓인 자신의 차에 올라타더니 쌩하고 사라졌다. 우리는 벌써 영업이 끝났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녀를 불러 세우지도 못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우리가 마트 앞에 주차하는 순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떠난 후, 문 앞에 다가가 보니 오후 6시까지 영업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럴 수가! 직원이 정해진 시간보다 2분 빨리 퇴근하는 바람에 H는 안타깝게도 축하주를 마시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른 마트까지는 너무 멀었고 먼 길을 운전해서 달려온 우리는 지쳐있었다. 주위의 식당으로 달려가서 술을 파냐고 물어보니 식당에서 마시고 갈 수 만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숙소에서 바비큐를 해 먹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라서 식당 음주는 포기하고 나왔다. 결국 H는 앤을 만난 역사적인 날 축하주 없이 퍽퍽한 바비큐를 먹어야 했다. 그런 안타까운 사연에도 불구하고 H는 여전히 앤을 사랑한다. 언제나 다시 앤을 보러 오고 싶어 하는 H를 기다리며 다음에는 꼭 오후 5시 58분 이전에 마트에 갈 것을 다짐했다.


이제 내게는 PEI를 찾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이민 첫해에 우리에게 방을 내어주고 잠시 함께 살도록 허락해 준 남편의 외조부모님들은 PEI 출신인데 그분들이 이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당 한편의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PEI는 내게 단순히 빨간 머리 앤의 섬일 뿐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주신 분들의 영원한 휴식의 장소가 됐다. 그래서 PEI는 내게 더욱 각별하다.


우리 엄마는 캐나다 여행 중 특히 PEI의 경치를 좋아했다. 몇 해 전 우리 집에 방문한 엄마를 모시고 PEI에 갔었는데 엄마는 너른 목초지와 감자밭과 목장과 숲과 바다를 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차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고 '좋다' 소리를 끊임없이 했다. 연로한 엄마에게는 그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 될 것이기에 더욱 특별한 여행이었다. 잠시나마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준 PEI가 고맙기 그지없다. PEI는 여러모로 내게는 특별한 섬이다. 앤과 감자와 아름다운 기억이 그곳에 담뿍 고여있다.


글 - 민재미첼 그림 - 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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