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미첼 mjmitchell
한국에 있는 엄마의 전화는 늘 '밥은 먹었니?'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당연히 끼니를 때웠냐는 질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무엇을 먹었는지 들려주면 '쌀밥'이 없음을 콕 짚으며 '밥을 안 먹고 어찌 사냐'며 잔소리를 시작한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쌀밥이 '식사'이고 '끼니'이고 '생명'이다. 그러니 쌀밥이 없는 식사를 엄마는 이해하지 못한다. 밥이 없으면 그건 식사가 아닌 것이다. 신혼 초에 엄마가 내 남편은 주로 뭘 먹는지 물었을 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캐나다 사람에게는 우리의 쌀밥처럼 매 끼니 빠지지 않고 먹어야 하는 '주식主食'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노바스코샤로 이민 왔을 때 남편의 외조부모님들과 함께 살았다. 이민 첫 해에 오갈 데 없는 우리가 외할아버지댁에 얹혀 산 것인데 덕분에 캐네디언의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저녁식사는 외조부모님들과 우리 부부가 늘 함께 했고 외할머니가 차린 식탁은 대부분 소박했다.
생선과 감자를 튀긴 '피시 앤 칩스 fish and chips'가 가장 흔한 메뉴였고 굽거나 튀긴 고기에 채소 샐러드나 양파 버섯볶음을 곁들여 먹기도 했다. 연로하신 두 분은 부드러운 라자냐, 미트볼, 그라탕, 고기 파이 등도 즐겨 드셨다. 대부분의 서양 식단은 국물이 없고 건조하다. 그래서 목을 축이기 위해 식탁 위에는 늘 음료수가 놓인다. 와인이나 맥주, 탄산음료, 우유, 과일주스 등 각자의 기호에 맞는 음료를 곁들인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상차림은 단출하다. 반찬이라는 개념이 없고 무언가를 반듯이 먹어야 한다는 주식의 개념도 없다. 다만 고기와 채소를 골고루 먹으려고 노력한다.
가족들은 각자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서 먹으니 설거지 거리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할머니의 음식에는 향신료가 거의 없어서 식사가 끝난 접시는 깨끗했고, 먹을 만큼 개인 접시에 덜어 먹으니 음식물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음식을 조리할 때 간을 하지 않았다. 정말 박절하다 싶을 정도로 소금도 후추도 뿌리지 않았다. 조리 후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면 그제야 각자가 간을 했다. 심지어 병환 중인 할아버지도 당신의 음식에 손수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드셨다. 그러니 간이 짜네 싱겁네 하는 타박이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60년이 넘는 결혼 생활 중이다. 아버지는 고급음식이 많다는 개성 출신이고 엄마는 간이 짜기로 소문난 안동 출신이다. 아직까지도 두 분은 '간'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종종 말싸움을 한다. 만약에 아버지도 당신의 국그릇에 손수 간을 했다면 두 분의 말싸움을 줄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봤다.
캐나다에서는 요리하는 남자가 흔하다. 할아버지도 병(파킨슨병)이 깊어지기 전까지 직접 요리를 하곤 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양파버섯버터구이를 잊을 수가 없다. 물론 맛도 있었지만 그것은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마지막으로 해주신 요리였기에 기억에 남는다.
소박했던 할머니의 식탁이 크리스마스에는 화려해졌다. 할머니는 칠면조 요리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 가지 속 재료를 넣은 커다란 칠면조를 오븐에 넣고 오래도록 익히는 것인데 나는 사실 칠면조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닭고기보다 퍽퍽하고 질겨서 맛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캐나다 가족들은 명절에 한국인인 나만을 위해 스테이크를 준비해 준다. 결혼 초, 크리스마스 때 시아버지가 나를 위해 사슴고기를 구워 주었는데 먹는 내내 사슴의 커다란 눈망울이 생각났다. 그래서 다음부터 사슴 고기는 사양하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이후로 시아버지는 나를 위해 소고기나 햄 구이를 따로 준비해 준다. 남편의 가족들은 감사하게도 내 개인취향을 존중해 준다. 대부분의 캐네디언들은 타인의 취향에 간섭을 하지 않고 강요도 없다. 나는 캐나다의 이런 점을 특히 좋아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시댁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 시아버지의 요리를 대접받는다. 시아버지의 특별한 요리 사랑 덕분이다. 그는 요리에 진심이다. 집을 지을 때 시아버지가 직접 부엌을 설계했고 (주방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 있음 주의) 향신료를 위한 커다란 붙박이장을 짜 넣을 정도로 요리를 사랑한다. 시아버지의 요리는 갖가지 고급 식재료에 진기한 향신료를 아낌없이 사용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가 요리할 때 뒷모습은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연상시킨다. 흥겹고도 진지하다. 시아버지의 요리사랑 덕에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해봤던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시댁 식구들은 대부분 자유롭고 평화롭다. 권위적이지 않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준다. 나이와 지위로 구별되는 차별이 없다. 시부모님은 당신들이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도 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는다. 피치 못하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부탁한다. 며느리인 나를 편하게 대하면서도 심부름을 시킨 적이 거의 없다.
이곳의 잔치 문화는 주최자가 음식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각자 먹을 음식을 싸 오라고 미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며느리인 나는 시댁에 가서 음식을 하지 않는다. 시부모님이 주최하면 음식 준비는 주최자의 몫이기 때문에 시부모님이 음식 준비를 하고 나는 빈 손으로 가서 먹고 오기만 하면 된다.(식후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것 정도는 남편과 내가 함) 따로 부탁을 받는다면 요리를 도울 수 있겠지만 시부모님은 내게 요리에 대해 부탁을 한 적이 없다.
시부모님은 명절에 대한 생각도 유연하다. 개인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는 신념이 확고해서 명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는 대전제를 따른다. 그래서 명절에 반듯이 가족들이 다 모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시부모님들도 건강, 여행 등의 이유로 명절 때 가족 모임을 취소하는 경우도 많았다. 캐나다에서는 한국과 같은 명절 스트레스는 없을 듯하다.
나는 시부모님을 위한 요리나 용돈, 선물 등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다. 시부모님께 단 한 번도 용돈을 드려 본 적이 없지만 캐나다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문화 자체가 없다. 그리고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하는 시부모님은 우리들보다 훨씬 여유롭게 살기 때문에 돈을 드릴 필요가 없다.
캐나다는 극빈층이거나 신체적 장애, 노령 등의 이유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은 정부로부터 보호, 감독을 받는다. 잘 짜인 사회보장 제도는 많은 사람을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게 해 준다. 사회보장제도가 가족 간에 불편한 돈 부탁은 하지 않게 만들어 주고 노후를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생활의 여유가 생각도 자유롭고 유연하게 만든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가 적당해서 스트레스가 적다.
누가 어디를 가더라도 미리 연락하지 않은 방문은 실례다. 시부모님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도 예외는 없다. 한국식으로 현관문 비밀 번호를 알려 달라는 캐나다 부모님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올 때는 꼭 미리 연락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아무 때나 연락 없이 부모님 댁에 들른다. 그것은 시부모님이 사전에 아무 때나 들러도 좋다는 허락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식사대접을 기대하진 말아야 한다. 배가 고프면 우리가 냉장고를 뒤져 아무거나 꺼내 먹어도 되지만 아무리 아들이라도 내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엄마 밥 차려줘'라고 말하지 않는다. 캐나다에서는 성인인 자식이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천하의 불효자가 된다. 한국사람에게는 좀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캐나다에서 배고픔은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누구의 희생도 강요하지 않는 평등하고 공평한 문화라고 생각된다.
요리에 진심인 시아버지에 비해 남편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끼니를 대충 때운다. 절대적인 특정 주식主食은 없다. 요리를 즐기지는 않지만 고기 굽는 실력은 나보다 월등하다. 한국 음식도 곧잘 먹지만 여전히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로 먹고 (조리가 쉬움) 햄버거와 피자,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과 메이플 시럽을 뿌린 펜케이크도 좋아한다.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 채소를 많이 먹으려 노력한다. 주로 생샐러드로 먹는다.
우리 주방 한편에는 토스트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언제나 식빵과 버터, 땅콩버터, 잼, 토스터, 빵칼이 놓여있다. 토스트는 주로 남편의 아침 식사용이다. 그렇다고 빵이 주식이라고 말하기엔 빵에 대한 의존성이 부족하다. 한국 사람들의 쌀밥에 대한 집착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남편은 한동안 아침 식사로 오트밀에 우유를 넣어 죽을 만들어 먹더니 요즘은 삶은 달걀을 으깨서 마요네즈에 섞어 빵에 발라먹는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아내인 내게 '밥 차려 달라'라고 하지 않는다. 내 배가 고픈 것은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어찌 보면 인기적이고 냉정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캐네디언에게서 인정 없고 모질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만약 도움을 원한다면 부부간에도 무뢰한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나는 이런 캐나다 문화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
남편과 나는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먹는데 식사가 끝나면 남편의 접시는 깨끗한데 비해 내 접시는 온통 시뻘겋다. 남편은 서양식을, 나는 한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서양 음식에 비해 한식은 음식물 찌꺼기도 많이 남는다. 게다가 남편은 접시 하나만 필요한데 나는 찌개나 국을 담을 그릇이 더 필요하다. 한국음식은 설거지를 많이 만들기도 하고 빨간 고춧가루 색을 지우기 위해 설거지물도 더 많이 필요하다. 맛난 음식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인가 보다.
캐나다 음식에 비해 한국 음식을 만드는 일에는 공이 많이 든다. 한식은 칼질도 많고 조리 시간도 길다. 짜네 싱겁네 하는 타박을 안 듣기 위해, 음식의 '간'에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반찬의 가짓수가 곧 설거지해야 할 그릇의 수이다 보니 한식을 조리하고, 먹고, 치우는 일은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여자들이 책임지고 해야 한다. 심지어 한국의 여자들은 명절과 제사 때마다 남편 가문의 효와 체면까지 떠안아야 한다. 이게 다 엄마들의 손마디를 굵게 만들고 허리를 휘게 만든 가사노동의 대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식은 너무 맛있다. 엄마의 깊은 손맛이다. 마치 엄마의 뼈와 영혼을 주고 바꾼 음식인 것 같다. 엄마들의 희생이 가득한 음식이다.
문화는 서로 비교해서 가치와 우위를 따질 수 없다. 그러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인의 가혹한 희생이 따른다면 변화와 수정을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누군들 지구 살이가 쉬울 까만은 유독 우리 엄마들에게 더욱 고단한 지구행성 살이다. 희생에 길들여진 엄마들은 자신들의 딸들에게도 똑같은 삶을 강요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전화해서 남편 밥상을 잘 차려 주라고 꾸준히 잔소리를 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잔소리를 멈췄다. 몇 해 전,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캐나다 남자의 자립적이고 능동적이며 실용적인 식생활을 보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엄마는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세상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안 그래도 고단한 지구 살이인데 나를 편하게 하는 삶의 방식을 조금 차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다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행복 추구 욕망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행복은 진짜가 아님을 명심하자.
글 - 민재미첼 그림 - 조현아
나는 평소에 스포츠는 관람을 위한 것이고,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활신조를 가자고 살았다. 나의 가장 역동적인 신체 활동은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울 때였고 학창 시절 동아리에서 탈춤을 배울 때였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생존을 위한 활동 외에는 대부분 앉거나 누워 있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신체의 나이 듦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준비가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내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었다.
이민 오기 전부터 나는 허리를 자주 삐끗해서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았었다. 허리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목이었다. 목디스크가 진행 중이고 거북목 증상도 심하다고 했다. 정형외과 의사가 이대로 가다가는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진통제 주사 한 방 맞고 나면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지니까 스트레칭 정도만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이민으로 정신없이 짐을 쌌다. 2주 만에 한국 생활을 정리해야 했기에 건강검진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더군다나 캐나다는 병원 진료가 무료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의료 문제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이민 후 처음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가보고 나서 남편은 캐나다 사람이지만 캐나다 의료 시스템에 대해 '공짜'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 나는 허리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남편 부축을 받으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침대는 고사하고 의자도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이 어딘가에서 휠체어를 빌려와서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캐나다 병원은 한국과는 매우 달랐다. 진료를 위한 침대를 배정받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의료 서비스가 최상인 나라에서 온 내 눈에 환자를 대하는 캐네디언 간호사들의 태도는 냉정하게만 보였다.
캐나다에서는 위중한 환자 우선이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먼저 의사를 만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기도 한다. '위중증 환자 우선'은 아무리 높은 사람이 와도 깰 수 없는 철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증상이 경미하거나 외상이 없는 통증 환자는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진료 순서가 한없이 미루어진다. 나는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갔다가 18시간이나 기다리고도 의사를 못 만나고 집으로 귀가 한 경험도 있다. 다행스럽게 기다리는 동안 위경련은 저절로 잦아들었었다.
캐나다의 응급실에서는 긴 기다림 끝에 의사를 만난다고 해도 한국에서 처럼 신속하게 진통제 주사를 맞을 수 없다.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후에야 겨우 진통제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검사하고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나는 통증에 몸부림쳐야 했다. 모든 게 무료지만 주사 한 대를 맞기 위한 절차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응급실이 전혀 응급실 답지 않았다.
응급하게 환자를 대해주지 않는 응급실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위급한 상황이 시작되면 바로 911에 전화해서 엠블런스를 요청했다. (위수술 전 위식도 경련으로 10번 넘게 엠블런스를 부른 경험 있음) 엠블런스를 부르면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즉석에서 간이 검사 후 진통제 주사를 놓아준다. 게다가 의사를 만날 때까지 간이침대에 누워 응급의료 구조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서 안심이 된다.
캐나다에서는 별다른 외상이 없는 통증 환자들에게는 유독 엄격하게 군다. 마약성분 진통제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의사들이 처방을 신중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웬만해서 의사들에게 진통제를 처방받기는 힘들다. 그래서 캐네디언은 주로 타이레놀 Tylenol이나 애드빌 Advil로 버틴다. 한국에서처럼 아무 정형외과에 들어가서 '진통제 주사 한 방 놔주세요.'를 할 수 없다.
캐나다의 사회 의료 시스템 Social Medical System의 최대 장점은 '무료'이고 단점은 '복잡한 절차와 긴 기다림'이다. 소셜메디컬시스템에서 모든 의료 시설과 의술이 공공재公共財이다 보니 환자 입장에서 흡족한 의료서비스를 기대하기 힘들다. 이것이 캐나다의 의료 현실이다.
나는 캐나다로 이인 온 후에 허리를 삐끗하는 일이 잦았고 급기야는 양쪽 팔이 저리기 시작했다. 패밀리 닥터와 상의하고 물리치료사 physical therapist를 소개받았다. 물리치료사를 만난 첫날, 두 명의 치료사가 커다란, 아주 커다란 각도기와 T자를 가져와서 나를 세워 두고 몸 여기저기의 길이를 재고 각도를 측정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21세기에 신체를 기계로 스켄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각도기와 T자로 재다니! 이 무슨 구시대적 방법인가 싶었다. 그리고는 플라스틱으로 된 척추 모형을 들고 와서 손으로 비틀어 형태를 잡더니 나의 척추가 이렇게 생겼다며 한마디를 했다.
'This is too flat'
맙소사! 굴곡이 전혀 없는 막대기 같은 나의 척추 모형을 대면하는 나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잦은 목과 허리 통증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놀란 나의 표정을 살피던 물리치료사가 상냥하게 설명했다. 꾸준한 물리치료와 운동치료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들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위해 몇 가지 물리치료를 해 주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한국의 물리치료에 비하면 대단히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트레드밀에서 걷기, 간단한 스트레칭, 저주파 치료, 온열 찜질이 전부였다. 게다가 기구들이 한국에서 경험했던 각종 최신식 기구에 비하면 구식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치료사들은 올바른 자세를 위한 생활습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나의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고치기 힘들 거라고 했다.
내 경추(목뼈)는 마땅히 가져야 할 굴곡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물리치료사에게 배운 대로 적당한 걷기 운동을 했고 좋지 않은 자세를 고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습관이 되어버린 자세를 단기간에 고치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한동안 꾸준히 물리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정기적인 물리치료로도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없었는데 때마침 남편의 친구가 카이로프렉틱 Chiropractic을 소개해 주었다.
카이로프렉틱(이하 - 카이로)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척추 지압요법'이라고 나온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도수치료'라고도 부른다. 꼭 필요한 의료만 무상으로 지원해 주는 캐나다이기에 카이로는 개인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치과, 카이로, 안과, 안경 맞춤 등을 위한 개인 의료 보험을 따로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물리치료까지만 무료였고 카이로는 내 돈을 내야 한다. 나는 개인 의료 보험의 혜택으로 카이로 치료를 받고 있다.
카이로에 가면 의사 (치료사 아님 주의)가 의료용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나의 목을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힘주어 돌린다. 갈 때마다 언제나 왼쪽, 오른쪽, 딱 두 번 돌려준다. 한국의 도수 치료를 영상으로 본 적 있다. 영상에서는 한국의 정만큼이나 듬뿍 지압과 마사지를 해 주던데 캐나다 카이로는 오직 두 번 목을 돌릴 뿐이다. 물론 환자의 증상에 따라 카이로 의사의 치료가 다르다. 나는 경추치료라서 목만 두 번 돌려줄 뿐이다. 의사가 목을 한번 돌릴 때마다 우두둑 소리가 난다. 소리는 커도 통증은 없다. 오히려 시원하다. 가끔 허리가 아프다고 특별히 부탁을 하면 내 팔을 가슴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후 몸통을 비틀어 준다. 그러면 등에서 우두득 소리가 난다.
카이로 치료는 주사도 없고 약물 처방도 없다. 외과적 수술은 당연히 권하지 않는다. 지압으로 척추의 탄성을 높이고 뼈와 근육이 제자리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꾸준한 운동을 권한다. 인체에 무리를 주지 않는 치료라고 생각한다. 내 취향에는 딱 맞는다. 그러나 치료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8년째 카이로 치료를 받는 나의 경추는 이제 곡선을 조금 찾았다. 그러나 아직도 종종 목이 아프다. 일을 하는 중간에라도 자주 목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의 통증이 두통과 함께 몰려온다. 카이로 초기에는 증상이 심해서 일주일에 3일이나 치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증상이 조금 호전되어서 일주일에 한 번 치료를 받으러 간다.
내가 다니는 카이로는 체스터 Chester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다. 작은 지역 사회에 있어서 그런지 의사와 직원, 내원객들이 모두가 서로 친하다. 의사 R 씨는 그 마을 토박이로 온 동네 사람을 훤히 안다. 누구네 손자가 대학을 가고 어느 집 강아지가 아프다는 둥 사소하고도 살가운 이야기를 서로 스스럼없이 나눈다. 카이로에 가면 물리적인 치료뿐 아니라 마음의 위안도 받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카이로에 다니면서 운동을 꾸준히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운동, 재활을 위한 운동이다. 특히 카이로에서 가르쳐준 목 운동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다. 걷기 운동과 간단한 요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운동을 8년째 하는데 한결같이 하기 싫다. 그래도 생존을 위해 해야 한다. 아프면 나만 손해다.
어린 딸 둘을 키우는 K 씨는 캐나다 의료 시스템에 대한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캐나다는 정글이에요. 야생에 던져진 후 건강한 놈만 살아남는 정글이요. 스스로 건강을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캐나다에서 살아보면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캐나다에서는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병원에 간다 한들 감기에는 아스피린 처방이 전부이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캐나다의 의료 체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들을 더욱 강하게 키우려 한다. 야생에 던져도 살아남을 수 있기도록 말이다.
의료 시스템이 후진 캐나다에서 병원 신세를 지지 않으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타국에서 아프면 더욱 서럽고 외롭다. 어리석게도 예전에는 내 몸을 사랑하고 관리할 줄을 몰랐다. 몸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깊게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 느리고 답답한 의료 시스템을 가진 캐나다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더욱 악착같이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캐나다에서는 운동이 최고의 생존 전략이다.
글 - 민재미첼 그림 - 조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