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울프빌에서 살 때의 일이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고 추웠다. 길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날이 풀리고 쌓인 눈이 녹고 있었다. 삼거리 교회 앞을 지나는데 교회 정원에 못 보던 것이 눈에 띄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보이지 않던 조형물이 눈 속에서 드러났다.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곳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크리스마스 조형물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구간 안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마구간밖에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날은 해가 바뀌고도 몇 달이나 지난 4월 11일이었다. 생뚱맞게 4월 11일 삼거리 교회 정원에 모습을 보인 아기 예수와 동방박사가 봄의 전령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4월 11일을 나만의 경칩일로 정했다. 그리고 내 경칩의 전령사는 개구리가 아니라 아기 예수와 동방박사가 됐다.(경칩: 일 년 중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날씨가 풀린다는 날.)
한국에 사는 개구리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노바스코샤의 겨울은 길다. 나처럼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게는 체감적 겨울이 더욱 길다. 노바스코샤는 해양성 기후에 속해서 캐나다 내륙보다 덜 춥고 눈도 덜 내린다. 그러나 한국(서울기준)에 비하면 눈이 훨씬 많이 내린다.
이민 초기 시절의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눈이 정신없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것을 목격했다. 단 하룻밤에 내린 눈이 거의 내 키만큼 쌓였다. 그날은 체감온도 -30도의 눈 폭풍이 불던 날이었다.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날씨가 무섭기도 했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눈 폭풍이 얼마나 센지 경험해보고 싶어 진 나는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털모자에 털부츠, 두툼한 외투까지 걸치고 눈폭풍을 향해 나가려고 현관문을 밀었다. 그런데 밖으로 밀어야 열리는 우리 집 현관문이 바람 때문에 열리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고 온몸으로 힘겹게 문을 밀었다. 현관문이 조금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눈과 바람이 집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간신히 문 밖으로 몸을 밀어 넣고 현관문을 닫았다. 바람이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서 겨우 두어 걸음 걸을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버텨도 중심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바람의 힘은 엄청났고 바람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바람에 휘청이는 몸을 겨우 추스르고 조금 더 걸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 몸 위로 뿌려지는 눈 snow 때문에 눈 eye을 뜰 수가 없었다. 겨우 실눈을 뜨고 바라본 눈앞에는 하얀 장벽이 있는 것 같았다. 화이트 아웃이었다. 흰 눈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경험하는 화이트 아웃은 생각보다 공포스러웠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온통 새하얀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공포였다. 게다가 눈폭풍 속의 눈은 결정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피부에 박히는 듯했다. 털모자와 목도리에 장갑도 끼었건만 거센 바람을 타고 눈의 결정은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피부가 노출되는 곳은 쓰리고 아팠다. 그날밤 나는 현관문 앞에서 힘겹게 몇 걸음 걸어 보고는 겁이 나서 얼른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캐나다의 눈 폭풍을 처음 경험 한 날이었다.
Port-Royal National Historic Site
까만 장화를 신고 해가 쬐는 곳에 서면 발이 따뜻해진다. 이민 온 후 나는 종종 장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대며 온돌을 그리워했다. 한국에서는 외출 후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양말부터 벗었다. 한국의 바닥 난방은 한 겨울에도 집안에서 양말 없이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양말을 벗어야 '아 이제야 내 집에 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힘든 하루에 대한 보상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 따뜻한 바닥이 주는 안도감과 위로가 이곳 노바스코샤에는 없다. 대부분의 주택에서 공기를 덥히는 난방을 하기 때문에 양말은 자기 전에 벗는다. 손발이 찬 나는 한겨울에 양말을 한 겹도 아니고 두 겹을 껴 신고 실내화를 신고 지낸다. 그러니 한국의 바닥난방이 얼마나 그립겠는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찜질방을 좋아한다. 나는 찜질방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따끈한 방바닥에서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보일러나 전기장판이라도 켜고 누워 있으면 후끈하고 뜨끈한 기운이 근육을 편안하게 풀어주어서 잠시나마 삶의 고단을 덜 수 있다. 찜질 문화에 적응한 한국사람들은 웬만한 뜨거움 쯤이야 거뜬히 참아내고 '시원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뜨끈한 대한인이다. 강철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추운 나라에서 사는 나 같은 이민자에게 등을 지질 수 있는 온돌은 꿈일 뿐이다.
어느 날 나는 감기 몸살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이불을 산처럼 두껍게 덮고도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남편은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한사코 걷어냈다. 추운 건 몸에서 열이 나기 때문이고 열을 내리려면 몸을 차게 해야 한다고 남편이 아무리 여러 번 친절하게 설명해 줘도 나는 서럽기만 했다. 내가 아프면 제일 먼저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두꺼운 이부자리 속에 나를 누이고 따뜻한 음식을 먹여주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따뜻한 이불속에 눕혔고 어쨌든 나는 병이 나았다. 그래서 이불을 걷어내는 남편의 간호 방식이 야속하고 슬프게만 느껴졌다. 몸이 아프면 곱절로 서러운 법인데 이불까지 빼앗기니 아픈 와중에 기운이 없어서 싸우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던 기억이 있다. 문화가 다르니까 간호방식도 다르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막상 내가 병상에 누워있으면 이해고 뭐고 서럽기만 하다. 감기 몸살 걸렸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 추운 나라에서 겨울을 나려면 두꺼운 이불이 꼭 필요하다.
이민 온 지 10년이 넘었어도 아직도겨울이 지긋지긋하게 싫다. 길고 춥고 습한 겨울을 견디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5월이나 돼야 봄다운 봄이다. 그러서 4월이 제일 힘들다. 그야말로 잔인한 4월이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꽃소식에 상대적 박탈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나는 장범준의'벚꽃 엔딩'을 비롯한 온갖 봄노래를 들으며 잔인한 4월을 견딘다. 추위에 약한 나는 노바스코샤에서 일 년에 삼분의 이 이상을 내복을 입고 산다.
캐네디언에게 놀라는 일 중 하나는 '이 추운 땅에 문명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 추운 땅에서 살았던 선주민들이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눈물겨운 인간의 자연 적응기를 보는 듯한 선주민들의 겨울나기는 경이로울 뿐이다. 그들에 비하면 나에게는 너무 많은 방한 용품과 따뜻한 난방기구들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뼈 시린 이민자의 삶이다.
Fort Anne National Historic Site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8. 천천히 흐르는 시간
노바스코샤는 한국에 비해 뭐든지 느리다. 한국에서와 같은 '빨리빨리'는 없다. 갓 이민 온 한국 사람에게는 이게 정말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다. 만약에 속도로 국가의 우위를 가린다면 캐나다는 단연코 꼴등이 분명하다.
처음 이민 왔을 때(2009) 입, 출금이 가능한 현금카드 (신용카드 아님 주의)를 신청하고 수령하기까지 한 달 반이 걸렸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했더니 다들 '설마'라고 했다. 근데 그게 실화였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은행카드는 신청하자마자 나왔다. 그야말로 그까짓 것 일도 아니었다. 신청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친절한 은행원의 미소와 함께 건네받는 은행카드 아니었던가. 한국에서는 간단하고 신속하게 처리되는 그 일이 여기서는 며칠, 아니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걸렸다. 온 나라의 시스템이 이러하니 나 혼자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Lunenburg
이민 온 후, 처음 암 검진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집으로 전화해서 알려 준다고 해서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다 되어 가도 전화가 없기에 아는 이민 선배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만약 암에 걸렸다면 한 달 안에 전화 왔을 거야'
암이 아니라니 다행이긴 했지만 암 검진 후 일주일 뒤에 친절하게 전화해서 알려주는 한국의 문화에 익숙했던 나는 그 상황이 몹시 황당스러웠다. 검사를 받기 위한 터무니없이 긴 여정에 비해 미완성된 결말 같았다. 끝끝내 검사 결과를 따로 통보받지는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검사결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패밀리닥터와 상담을 해야 하지만, 따로 전화가 없으면 검진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노바스코샤에서는 암검사를 받기까지 길고 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다음은 내가 암 검사를 받기까지의 여정이다.
-암 검진을 받기 위해 전화로 예약하고 한 달을 기다려 패밀리 닥터를 만났다. (1달 경과)
-다시 집에 가서 패밀리 닥터가 소개해준 전문의의 전화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세 달쯤 지나 전문의에게서 전화가 왔고 예약을 했다.(3달 경과)
-다시 3주를 기다려 전문의가 지정해 준 검사 장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3주 경과)
이처럼 암 검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예약전화를 위해 수화기를 든 후 3개월 하고도 3주가 지나서야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해서 예약하고 기다리고, 잠시 상담하고 또 예약전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한국에서 이민 온 초보 이민자라면 이 느리고 복잡한 시스템에 지치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느리고도 느리다.
핼리팩스 거리 풍경
뭐든지 느려서 나를 애먹였던 에피소드가 많고도 많지만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지난 9월 초에 창문을 교체하기 위해 인부를 고용하고 각방의 창문 사이즈를 공장으로 보내 주문 예약을 했었다. 우리는 창문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12월 중순에 완성된 창문이 도착했다. 맞춤 창문을 배송받는 데까지 3개월이 넘게 걸렸다. 창문은 남편이 최애 하는 캐나다산이다. 창문 공장이 노바스코샤주가 아닌 다른 주에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나는 여기까지는 대충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느긋한 공사 인부가 말썽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일하던 인부가 갑자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휴가를 보내야 한다며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창문 공사를 서둘러 끝내고 휴가를 가면 좋으련만 캐나다에서는 그런 빨리빨리 마인드는 통하지 않았다. 인부는 1월에 다시 돌아와서 창문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나는 우리 집 창문 교체 공사를 하는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집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인부의 발자국과 창문을 제거하고 나오는 먼지를 매일매일 청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번에 몰아서 짧은 시일에 끝내면 좋으련만 하루하루 찔끔찔끔 공사를 해나가니, 집청소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큰 고역이 아닐 수없었다. 흙 묻은 작업화를 신고 하루만 집안을 돌아다녀도 청소가 힘든데 한 달이 넘도록 작업화를 신고 집안을 돌아다녔으니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점심 휴식, 커피 타임, 스모킹 타임을 다 누리면서 느릿느릿 일하던 인부아저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날 지경이다.
이처럼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게으른 것 같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한 때 하이브리드 차가 있었다. 중고로 샀기 때문에 고장이 잦았고 그 당시 흔치 않은 하이브리드였기에 부품을 공수받기 위해서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어떨 때는 부품은 있는데 공구가 없어서 (어떤 도구인지는 모르나 그들이 툴 Tool이라고 표현했음) 다른 주에서 공구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다시피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캐나다에서 개인용 자동차는 필수다. 자동차가 한번 고장 나면 그야말로 발이 묶이는 상황이다. 그런데 수리를 위해서 또 하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수리를 위한 기다리기에 지친 우리는 결국 하이브리드 차를 팔고 새 차를 구입했다. 차를 고치는 비용은 둘째치고 차수리를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갑갑증이 더 미칠 노릇이었다.
핼리팩스 거리 풍경
노바스코샤의 상점이나 식당, 우체국, 병원 등 어디에서나 만나는 사람들은 느긋하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상냥하긴 더없이 상냥하지만 매우 느리다.좋게 말하면 서두르는 사람이 없고 다르게 말하면 느려 터졌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과 다른 속도가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가끔은 답답하지만 나도 이제는 많이 적응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제 나도 조금은 느긋하다. 노바스코샤에서는 모두가 느리니까 나 혼자 바빠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온 나라가 느리니까 바쁘게 재촉할 이유가 없다. 성가시게 조르는 사람도 없으니 여유롭고 자유롭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하다. 노바스코샤는 한국과 같은 행성에 있지만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그래서 이민자는 노바스코샤의 시간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에서 온 이민자라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