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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BTS와 국격 17. 하고 싶은 걸 하렴!

민재 미첼 mjmitchell

15. BTS와 국격


오래전에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 스타일>이 유행할 때, 북극권의 이누잇 마을에도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고 했다. 그 당시 싸이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이는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했었다. 캐네디언 친구들도 '강남 스타일'이 유행할 때에 나를 만나면 두 팔을 X자로 뻗는 일명 '말' 춤을 인사처럼 추곤 했었다. 그때당시 나는 싸이의 국제적인 인기가 신기하면서도 그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에 우쭐했었다.

그런데 BTS의 인기는 싸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싸이는 단 한곡만 히트를 했을 뿐이지만 BTS는 발표하는 곡마다 세계적 히트다. 대 히트다. 그들의 노래 중 꽤 많은 곡들이 오랫동안 미국 음악 순위 경쟁에서 정상에 오르며 거대한 팬덤 문화를 만들고 있다. BTS의 공식 팬덤인 <아미 ARMY>의 구성원은 인종과 국적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아미의 총 회원수가 밝혀진 적은 없다지만, BTS공연 때마다 수십만 명의 보라색 아미들을 모여드는 것을 보면 전 세계에 흩어진 아미의 총수는 수억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다. BTS는 싸이보다 길고 오래 사랑받는 중이어서 팬덤층도 두툼한 것 같다.

욕설이 난무하고 외설적 표현이 많은 미국 팝에 비해 BTS의 노랫말은 찬송가라고 할 만큼 건전하다. 평화와 사랑과 자유가 담겨있다. 미국팝에 비하면 홀리holy하기까지 하다. 십 대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는 노랫말이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전 세계 아미들이 한국말 노래 가사를 따라 부고 BTS가 먹고, 입고, 방문하는 장소 등이 모두 이슈가 된다. 공연을 하는 도시 전체가 축제처럼 한국음식, 한국문화에 빠진다. BTS의 영향으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세계인이 수두룩하다. 몇 해 전에 미국의 한 외식업체에서는 BTS 이름으로 특별 메뉴를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저명한 문화평론가들은 BTS의 인기를 '비틀스 The Beatles'에 견주기도 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다. 미용사인 내 친구 S는 BTS와 자기가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손님들에게 자신의 인기도 올라갔다며 신기해했다. 세계 어디엘 가더라도 한국은 몰라도 BTS는 다 안다. 이 정도라면 BTS는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리는 '국제 연예부 장관'이라는 '없는 자리'라도 일부러 만들어 임명해야 마땅할 듯하다. 대한민국은 이제 자랑스러운 BTS 보유국이 됐다.

몬트리올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BTS뿐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의 인기 또한 한국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몇 해 전에 남편과 함께 우리 동네 영화관에 '기생충'을 보러 갔었다. 노바스코샤에서 제일 큰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상영한다니 더없이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캐나다의 영화관에서 본 첫 한국 영화였다. 영화관 안에는 나의 모국어가 가득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막을 읽고 있었지만 나는 한국말을 알아듣고 그들보다 한 박자 먼저 웃고는 했었다. 이런 즐거움을 만들어 준 '봉준호' 감독에게 감사했다. 내 주위의 캐네디언 친구들은 한결같이 기생충의 독특한 스토리 전개가 재미있다고 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와는 구성이 영 다르다고 했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가 이들에게는 낯설고 신선했나 보다. <기생충>은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국제영화상,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각본상 등 4개의 상을 수상했다. 나는 아카데미 시상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불릴 때마다 '진짜? 이게 진짜야?'를 수없이 되뇌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와! 대한민국의 영화예술이 이 정도 수준까지 왔다니 하는 생각에 정말 자랑스러웠다. 이 외에도 <대장금>, <미나리>, <오징어 게임>, <킹덤> 등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렸다.

어디 이뿐이랴. 한국의 운동선수들이 전 세계에서 활약 중이며, 한국 기업의 상품들은 전 세계에서 팔리고 있다. 이제는 캐나다 언론에서도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선수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고, 한국 기업의 상품 광고를 하루에도 수십 번 본다. 길에서 현대나 기아 자동차를 만나는 일은 이제 숫자를 세기도 귀찮을 정도로 잦다.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K열풍이 끓어올랐다. 모든 한국산 Made in Korea 에는 앞머리에 K을 붙여 K-팝, K-뷰티, K-드라마라고 부른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산이라는 원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증서와 같은 것이다. 다른 나라 제품과 구별되는 <고퀄리티 핫 아이템>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격이 만든 프리미엄이 아닐 수 없다.

세계인이 좋아한다고 국격이 무작정 오르는 것은 아니다. 국격은 '나라의 품격'이다. 단순한 대중적 인기 만으로 국격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 '품격과 전문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BTS의 노랫말이 그들의 품격을 말해주고 손흥민의 멋진 골에는 그의 전문성이 들어있다. 한국의 모든 사람과 문화와 상품의 활약이 '국격'을 올리데 큰 역할을 했다.


얼마 전 '미스 아메리카' 100년 사 최초로 한국계 미국인이 뽑혔다(2021년). 지적이고 아름다운 그녀는 자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이 곧 미국의 정체성이라고도 했다. 나는 그녀의 인터뷰를 듣는 순간 감동과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 내 친구의 모습, 내 친구의 딸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처럼 나 역시 이민자의 나라에 산다. 그녀의 말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국이 널리 알려지고 국격이 높아진 덕분에 자신이 미스 아메리카로 뽑힐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덧붙였다.

그녀의 말대로 높아진 한국의 국격 덕분에 한국인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은 상당히 우호적이 되었다. 한국인은 더 이상 이름도 모르는 먼 '낯선 나라' 사람이 아니라 KOREA라는 분명한 이름을 가진 '멋진 나라' 사람으로 알아본다. 이 말은 세상 어디에 가도 약소국에서 왔다는 수모는 겪을 일은 없다는 말이고 더 이상 '한국이 어딘데?'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한국을 떠나 해외에 살고 있는 교포의 한 사람으로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없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 중,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어색한 발음의 '피에옹 채앵(평창)'이라는 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고 좋았다. 그때는 내 주위의 케네디언들이 내 나라의 도시 평창을 불러 주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또한 열심히 경기하는 선수들의 뒤로 보이는 내 고향 산천의 모습은 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한국 선수가 출전이라도 하면 목젖이 튀어나올 만큼 응원도 했었다. 흔히들 한국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어디선가 Korea의 Ko 소리만 들려도 귀가 쫑긋 하고 설렌다.

이민 와서 보니 손재주 좋고 똑똑한 한인이 정말 많다. 내가 만난 한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노바스코샤에는 내가 아는 한인 미용사가 5명이나 된다. 그들 모두 친절하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인기가 좋다. 과학, 수학, 음악, 미술 등에 재능이 뛰어난 한인 학생은 차고 넘친다. 교육열 높은 한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된 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같은 한국 사람이 봐도 한인들은 참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첨단 과학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 지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많은 나라, 치안이 안정적인 나라. 이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자랑스럽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대~ 한~ 민~ 국! 소리만 들으면 손이 먼저 짝짝짝 짝짝하고 반응한다. 이 손뼉 소리에는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결의, 도전, 당당함이 들어있는 것 같다. BTS 그리고 여러 훌륭한 한인들이 세운 대한민국의 '국격'과 '폼'이 박수 소리에 들어 있다. 역시 한국의 국격! 폼난다. 멋지다. 나는 어렵게 세운 국격이 하루 하침에 품위를 잃고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길 바라고 바란다. 대한민국의 국격 덕에 이민자들은 한결 힘이 난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울프빌 집 거실 뷰 (겨울 풍경)

17. 하고 싶은 걸 하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 한국에서는 나도 참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이민을 오고 보니 시간이 많아졌다. 다행히도 혼자 잘 노는 나는 <집순이>여서 낯선 곳에서 갑자기 얻은 시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민 온 곳은 한국과는 환경도 문화도 다른 곳이었기에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고 갈팡질팡했었다.


이민 초기에 살던 울프빌 집은 게스페로우 Gaspereau 강 언덕 위에 있었다. 강이 흐르는 계곡과 강 건너 마을이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눈에 다 담지 못할 광활한 자연 풍경이 내 집 창밖 뷰였다. 누구나 우리 집 거실 창 앞에 서면 '판타스틱! 원더풀!'을 연발했다. 그 판타스틱한 풍경을 품은 울프빌에서 보낸 5년여의 시간은 아름답고 행복한 전원생활이었고 나를 찾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울프빌 Wolfville의 중심은 아케디아 Acadia 대학이다. 학생 등의 유동인구를 제외하면 거주자 4천 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중앙로에는 줄지어 선 빅토리아풍 목조 주택이 우아하고 학기 중에는 대학가답게 젊은 에너지가 넘쳤다.

내가 살던 집은 울프빌 타운을 벗어난 외곽에 있었다. 주인집과 붙은 듀플렉스 구조 (한 건물에 두 가구가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의 집)였다. 우리 집과 맞붙은 이웃인 집주인은 에드먼턴에서 살며 여름휴가 때만 잠시 들렀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서 좋았다. 정원에는 사과나무와 배나무, 포도나무가 있었고 딸기밭과 라즈베리밭도 있었다. 인심 좋은 집주인은 정원의 과일과 베리를 마음껏 따먹어도 좋다고 우리에게 허락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해마다 싱싱한 과일과 베리를 질리도록 먹을 수 있었다. 집주인아주머니는 꽃을 정성껏 가꾸기도 했다. 휴가 때 와서 정원 손질 하느라 쉬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화단에 정성을 들였고 그 덕분에 나는 화려한 꽃들에 둘러 싸여 살 수 있었다. 화단에는 은방울꽃, 모란, 수선화, 레벤더가 가득했었다. 가장 가까운 이웃집은 약 200m쯤 떨어져 있었고 집과 집 사이에는 키가 큰 호프 밭있었다. 앞으로는 광활한 게스페로우 계곡이고 집 뒤로는 넓은 포도밭이었다. 집주인은 여름에 만 잠깐 들르고 집 주변은 온통 자연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간섭하거나 참견할 사람이 없었다. 자유였다. 도시에서만 살던 나는 그런 자유를 처음 느껴보았다.


자유! 구속받거나 얽매이지 않고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자유가 지금이라고 느낀 순간!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무엇이든지 내 자유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느낀 그 순간! 내가 한 행동은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뱀이나 귀신이 나온다고 실내에서는 휘파람을 불지 못하게 했던 엄마 때문에 나는 커서도 휘파람만큼은 꼭 실외에서 불었다. 생각해 보니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사회와 부모님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집안에서 휘파람을 불어 본 기억이 나긴 한다. 그렇지만 역시 실내에서 휘파람을 불려면 용기가 필요했고 휘파람을 불고 나서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 온 후, 내가 가진 완전한 자유의 공간에서 나는 자유로운 행동을 마음껏 하고 싶어서 휘파람을 불기로 했다. 휘파람 때문에 귀신이나 뱀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감히 실행하지 못했던, 금기시되었던 행동을 함으로써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자유의지를 담아 집안에서 힘차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휘~이 곡조 없이 휘파람을 불다가 뭔가 좀 허전해서 급기야 엄마가 금지시킨 옛 노래 <산까치야>의 곡조를 휘파람에 섞어 불었다. <산까치야>는 돌아가신 외삼촌을 떠올리게 한다고 엄마가 금지시킨 곡이었다. 한국에서는 부를 수 없었던 그 노래를 나는 캐나다에서는 마음껏 불렀다. 그것도 휘파람을 섞어가며 말이다. 엄마가 없는 캐나다에서 휘파람으로, 그것도 엄마의 금지곡을 부르고 '자유'를 실감했다고 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때 진심으로 참 자유를 느꼈고 행복했다. 그리고 어릴 적 보았던 외삼촌의 모습,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치며 휘파람을 멋들어지게 불던 젊은 외삼촌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외삼촌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그리운 외삼촌을 비로소 마음껏 추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일은 내 어린 시절 기억을 하나씩 들추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외동딸이자 막내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봉건적, 유교 제약 속에서 컸다. 캐나다에 와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니 우리 집안의 분위기가 좀 더 많은 제약을 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꽤나 보수적이었던 것 같다.

지체 높은 양반댁 셋째 딸로 태어난 우리 엄마는 어렸을 때 나들이를 하려면 가마를 타거나 몸종에게 업혀 다녔다고 했다. 지금도 외가 선산지기 할아버지는 엄마를 아기씨라고 부른다. 해방과 더불어 가세가 기운 엄마의 가문은 이제 족보뿐인 양반이 됐지만 양반이라는 자존심만은 꼿꼿했다. 그런 엄마는 두 아들을 선비처럼 키우려 했고 하나뿐인 딸인 나를 양반가 규수처럼 키우고자 했었다. 내게는 늘 교양책을 읽고, 수예와 꽃꽂이를 배우라 하셨고 부엌일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엄마가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어도 엄마는 양반의 품위를 유지하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나는 수없이 많은 '금지' 속에서 자랐다. 더구나 공인된 양반출신이었던 엄마뿐 아니라 아버지, 오빠들까지 나를 통제했었다. 양반이라고 우기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는 아버지와, 남아선호 사상 속에서 자란 두 오빠들까지 합세해서 '여자가 어딜' '여자가 무슨' '여자는 안돼'라는 소리를 내게 일상적으로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도록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그런 집안 분위기 탓에 나는 수많은 제약 속에서 어른으로 컸다. 어른이 되고 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민 오기 전까지는 너무 바쁘게 살아서 나를 제대로 파악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민 후에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나를 위해 써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바느질을 잘해서 인형 옷을 만들며 혼자 놀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인형 옷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나는 문득 '어린 나'를 만났다. '어린 나'는 늘 혼자였고 외로웠다. 나는 혼자 외롭게 노는 어린 나를 위로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 '어린 나'와 놀아주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내 마음을 위로하고 평안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근원을 알 수없었던 슬픔에 대한 치유가 되었다.

나는 매일 짬을 내서 열심히 '어린 나'와 함께 놀아 주었다.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꽃을 따서 머리에 꽂아 주기도 했다. 바느질을 해서 인형 옷을 함께 만들고, 음식을 만들며 소꿉놀이도 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함께 춤도 추었다. 나는 어린 나의 머리를 빗겨주고 예쁜 리본 핀을 꽂아 주었다. 그리고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아 주면서 어린 나에게 매일 말해 주었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어린 시절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그 말, 그 말을 나는 어린 나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렴.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렴"


손재주가 좋은 나는 수예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했다. 요즘 같으면 '흥이 많구나' 하고 가볍게 받아줄 수도 있을 테지만 당시 우리 집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전무용도 배우고 싶었고 발레도 배우고 싶었다. 물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지원해주지도 못했겠지만 엄마와 아버지의 핑계는 늘 '여자가 어떻게 상스럽게 춤을 추냐'였다. 춤을 좋아하는 내가 고등학교 때 '탈춤'을 배우기 시작하자 급기야 엄마와 아버지는 '상놈들이나 추는 탈춤을, 그것도 여자가 다리를 번쩍번쩍 들고 춤을 추다니'라고 하며 화를 냈고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나는 큰 야단을 맞았지만 몰래 탈춤을 계속 배웠고 대학에 가서는 전공보다 탈춤을 더 열심히 췄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이 반대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열심히 탈춤을 배웠다. 탈춤을 배우다 보니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는 탈춤뿐 아니라 모든 춤을 다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살 때 잠시 김포 여성회관에서 여러 가지 춤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수강생이 모두 여자라서 번갈아 돌아가며 남자 파트너 역을 해야 했다. 사분의 삼박자 리듬에 맞춰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우아한 왈츠도 배워 봤고, 빠른 리듬에 맞춰 몸을 유연하고 격렬하게 흔들어야 하는 라틴댄스도 배워 봤다. 오래 배울 수 있는 사정이 되지 않아서 기본기만 겨우 배우고 말아서 아쉬웠지만 상당히 재미있었다. 한 번은 친구의 권유로 에어로빅을 수강해 봤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음악에 몸을 움직이는 건 춤이나 에어로빅이나 비슷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는 '운동'으로 하는 에어로빅은 내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우연히 <스트릿 우먼 파이터 Street Woman Fighter>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았다. 대한민국의 여성 댄서들이 모여 최고를 겨루는 티브이 쇼인데 나는 그들의 춤에 반하고 또 반했다. 당당하고 멋진 여자들의 몸짓은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그녀들은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다양한 춤의 종류를 선보이며 고급스러운 테크닉을 뽐냈다. 이는 나뿐 아니라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한동안 온 대한국민이 일명 '스우파 댄스'라고 하는 춤을 따라 추게 만들었다. 참 재주 많고 흥 많고 멋진 한국사람들이다.

그리고 며칠 전 '리아 킴' 댄서의 춤을 보게 되었다. <Fly to the dance>라는 티브이 프로에서다. 뉴욕의 공원, 길거리 버스킹 가수의 Can't help falling in love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었다. 이제껏 그렇게 아름다운 춤을 본 적이 없었다. 거리의 음악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데도 몸짓 하나하나에 수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사랑의 열정과 좌절, 환희와 간절함, 애틋함, 망설임, 어리석음 등

우리가 겪었던 각기 다른 모든 사랑의 상황들이 그녀의 몸짓에서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그것은 몸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시였다. 같은 쇼에서 발레리나와 댄서들이 함께 군무를 추는 장면도 감동이었다. 발레리나의 빨간 발레복이 댄서들의 흰옷과 대비되어서 어떤 감정의 절정 같아 보였다. 중력을 거스르며 나풀나풀 떠다니는 발레는 달에서 추는 춤 같아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역시 나는 춤을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울프빌에서 살 때 이웃의 P와 M 부부는 종종 음악 파티를 열었다. 동네 사람들이 기타, 바이올린, 아코디언, 젬베 등의 악기를 들고 와서 마음껏 연주하고 즐겁게 놀았다.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싶으면 춤을 췄다. 각자가 알아서 자유롭게 즐기는 분위기였고 모두들 흥이 가득했다. 흔히들 대한민국 사람은 흥이 많다고들 한다. 그런데 내가 캐나다에서 만난 사람들, 비단 캐네디언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는데 하나같이 모두 흥이 넘쳐났다. 유럽인,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남미인 등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흥이 차고 넘쳤다. 지구상에 흥이 없는 민족이 과연 있을까? 전인류,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흥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세계 모든 민족, 모든 문화에는 노래와 춤이 있으니 말이다. 춤이야 말로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표현이고 자유의 몸짓이다. 나는 이 자유의 몸짓을 사랑한다.


그동안 자유의 열망은 내 속에 가득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껏 발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순종적이고 보수적인 여자가 되길 원했던 부모님의 뜻은 어그러졌다. 나는 크게 어긋나는 짓을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이 좋아하는 일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커가면서 종종 '별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때는 늘 죄의식이 있었다. 이제는 그 죄의식이 합당한 죄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강요된 죄의식이었다. 나는 이제 강요된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당당하게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캐나다 남자와 재혼을 해서 캐나다에서 사는 나를 두고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했었다. 그까짓 호적? 그게 뭐? 파려면 파라지! 호적이 없다고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닌데 그게 뭐라고! 나는 이제 그런 위협에 쫄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다! 캐나다에 와서 수많은 사람,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보니, 나는 별종 축에도 못 드는 것 같아 보인다. 세상은 넓고 개성 강한 별종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별종소리 좀 들이면 어떠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는데, 범죄가 아닌 이상 아무도 그것을 막을 권리는 없는 게 아닌가.


나는 이제 마음껏 노래하고 춤을 춘다. 잘 추지는 못해도 기분이 나면 막 춘다. 보는 사람이 없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신나게 출 수 있어서 좋다. 구속받거나 얽매이지 않고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느끼는 순간, 춤을 춘다. 엄마나 아버지가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격렬하게 춤을 춘다. 어떠한 별종 소리를 들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춤을 출 자신이 생겼다. 나는 신나게 춤을 추다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다시 속삭인다.

"하고 싶은 걸 하렴.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렴"

낯선 곳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기회를 준다. 이민 와서 보니 내가 알던 세상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었다.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 캐나다에서는 각양각색의 민족과 종교, 문화가 섞여 있다. 서로 다른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함께 배운다. 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니 내 것만 옳고 다른 이의 것은 틀리다고 우겨봐야 쉽게 먹히지 않는다. 다문화, 다민족 사회는 단일민족 사회에서 보다 '다른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의 차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것은 편협한 사고보다 입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고 취향을 존중한다면 비로소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걸 하렴,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렴!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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