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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퀘벡 찍고 나이아가라 폭포

민재 미첼 mjmitchell

by 민재 미첼 MJ Mitchell

14. 퀘벡 찍고 나이아가라 폭포


몇 해 전에 남편과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여행을 떠났었다. 왕복 4,000Km를 달려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여행의 목적지가 나이아가라 폭포 Niagara Falls인 것은 순전히 내가 우겨서였다. 캐나다로 이민 온 후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질문을 들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질문은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 봤니?'였다. 캐나다 하면 역시 나이아가라 폭포가 떠오른다.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 남미의 이과수 폭포와 더불어 세계 3대 폭포라는 유명세 때문에 사람들의 질문 공세는 이어졌고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꼭 그곳에 가고 싶었다.


당시 4월 초였기에 겨울 여행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떠나는 날부터 눈이 펑펑 내렸다. 그러나 노바스코샤보다 훨씬 더 북쪽이 고향인 남편에게 눈 따위는 여행을 미룰 이유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노바스코샤를 벗어나니 눈은 그쳤다. 4월이면 한국에서는 꽃놀이가 한창이겠지만 우리는 도로 옆에 높게 쌓인 눈을 보며 장범준의 '벚꽃엔딩'을 들었다. 사방이 눈밭이었지만 여행을 떠나는 마음은 설렜다. 우리는 노바스코샤를 벗어난 후, 서쪽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래브라도 Labrador가 고향인 남편은 자신의 추억이 어린 옛길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나도 아직 래브라도는 방문해 본 적이 없다. 남편을 통해 들은 대로라면 아주 까마득한 북극 지방 같았다. 그곳에서는 오로라를 수시로 볼 수 있고 -60도가 되어야 휴교라서 - 30도나 -40도에 학교에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고 했다. 겨울이면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깜깜할 때 등교해서 깜깜할 때 하교 한다고 했다. (야간 자율학습 아님 주의)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라면 그리워서 다시 가보고 싶어 할 만도 한데 남편은 자신의 고향에 별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춥고 재미없는 도시라 방문을 권할만하지 않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꼭 한 번 자신의 고향에 나를 데려가서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학창 시절 핼리팩스의 할머니 댁에서 여름을 보내느라 해마다 오고 갔던 (노바스코샤에서 래브라도를 향하는) 북쪽 길을 내게 보여주었다. 물론 래브라도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북쪽 길을 드라이브하며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뉴브런즈윅주의 멍턴 Moncton을 지나 북쪽 해안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갔다. 시골길을 달리다가 퀘벡 Québec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쪽으로 갈수록 도로 옆에 쌓인 눈은 점점 높아졌고 눈 속에 드문드문 보이는 시골집은 굴뚝마다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이따금 빨간 지붕이 덮인 오래된 나무다리가 보였다. 눈이 많은 지역이라 다리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붕을 얹었다고 했다. 박공모양 지붕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서 빨간 지붕색이 겨울풍경 속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고풍스러운 나무다리는 빨간 지붕과 함께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일부러 차를 몰아 다리를 건너 보기도 했다. 나무다리의 삐걱 거리를 소리를 들으며 지붕 아래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는 동안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은 캐나다에서도 이런 나무다리가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라고 했다. 다리를 통행하는 주민들의 수는 점점 감소하고, 다리의 유지 보수 비용은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편은 나무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하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낡은 나무다리지만 내 눈에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퀘벡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야생동물 출몰 주의 표지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눈, 눈, 눈. 눈 eye을 돌리는 곳 어디에나 눈 snow이 가득했다.

우리는 눈 속에 파묻힌 세상을 구경하며 달리고 달려 어두워져서야 퀘벡주의 동북쪽 작은 도시에 도착해서 숙소에 들었다. 몬트리올 Montreal과 퀘벡시티를 포함하는 퀘벡주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캐나다 인데도 영 다른 나라 같았다. 자기 나라에서도 이방인처럼 보이는 남편이 낯설어서 재밌었다. 불어를 쓰는 퀘벡주에서 영어를 쓰는 남편은 영락없는 관광객이나 다름없었다.

호텔 샤토 프롱트낙 Château Frontenac

다음날 다시 차를 달려 퀘벡시티에 도착했다. 올드 퀘벡은 한국 드라마 '도깨비'로 유명해진 호텔 '샤토 프롱트낙' Château Frontenac을 비롯해서 마을 전체가 전통과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같았다. 아름다운 거리와 아기자기한 상점들에는 관광객이 넘쳐났다. 우리 차에 붙은 주차 딱지를 발견하기 전까지 올드 퀘벡은 아름다웠다. 우리가 사는 노바스코샤에서는 주말에 모든 공영주차장이 무료다. 게다가 퀘벡 올드타운 관광지 한복판의 공영주차장에 영어 안내판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이니까 당연히 주차 티켓을 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일! 올드타운 관광을 마치고 오니까 우리 차에 주차 딱지가 떡하니 붙어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일요일에도 주차 딱지를 끊는 퀘벡시에 주먹 감자를 날리며 퀘벡을 떴다. 젠장, 영어 안내판 정도는 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화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아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이번이 나에게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 몬트리올 방문은 후배 H의 여권 분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에는 한국 영사관과 식당, 쇼핑몰 외에는 가본 곳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올드 몬트리올을 꼭 구경하고 싶었다. 몬트리올에 친구가 산다는 것은 행운이다.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H와 L 부부는 고맙게도 반갑게 우리 부부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수다를 떨며 회포를 풀었다. 이들 부부도 캐-한 국제커플이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영어와 한국말이 정신없이 오고 갔다.

옛 친구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우리 부부는 몬트리올 관광을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날씨가 문제였다. 우리가 몬트리올 시내를 관광하는 날 어는 비 주의보 freezing rain warning가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체감온도 -10도의 추위 속에 내리는 비는 곧바로 얼어 버렸다. 나무들은 모두 얼음 코팅을 뒤집어썼다. 세상이 마치 유리구슬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반짝이며 아름답게 보였지만 운전에는 최악의 날씨이기에 우리는 자동차 대신 기차를 이용해서 올드 몬트리올로 향했다.


기차에서 내려 미끄러운 길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걸었다. 이 궂은 날씨에 누가 관광을 올까 했는데 명성이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의외로 관광객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우리가 찾아간 노틀담 대성당 Notre-Dame Basilica (1829년 완공)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프랑스계 이민자들의 구심점이 되어준 카톨릭, 종교의 힘과 권위가 올드 몬트리올의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우리는 입장료를 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성을 다해 꾸며진 내부장식은 고요하고도 장엄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재단 앞쪽에는 신을 위해 지어진 성(궁전)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당 안에 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솜씨 좋은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온갖 아름다운 성물들이 가득했다. 불자인 우리 부부는 초 두 개에 불을 밝히고 조용히 기도했다. 모든 사람을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게 만드는 힘, 종교의 힘이 성당 안에 충만했다.

노틀담 대성당 Notre-Dame Basilica

몬트리올은 추운 날씨 탓에 지하도시 Underground city 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보던 지하상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입체적인 연결구조였다. 놀랍도록 길고, 깊고, 복잡했다. 기차역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땅속으로 연결해 놓았는데 상점과 식당이 즐비하고 중간중간에 벤치가 놓인 휴식 공간도 있었다. 말 그대로 지하도시였다. 너무 복잡해서 우리 같은 관광객은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남편과 나는 복잡하고 어수선한 대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약간의 폐소 공포증이 있어서 지하철 타기를 꺼리는 내게 깊고 복잡한 지하도시라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복잡한 지하도시는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 어지러운 땅속일 뿐이었다. 우리는 궂은 날씨를 핑계로 몬트리올 시내 투어를 서둘러 마쳤다. 몬트리올 올림픽(1976년)으로 기억되는 이 도시는 늙고 지쳐 보였다. 어디에서나 길을 잃기 쉬웠고 어느 길로 가나 공사 중이었다.

몬트리올 Montreal

다음날, 나이아가라로 출발하기로 예정된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겨울 여행이 아니었다. 그날은 4월 8일이었다. 험한 기상 탓에 출발을 망설였으나 몬트리올을 벗어나면 기상이 좋아질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우리는 눈 속에 차를 몰았다. 두어 시간 운전하는 동안 눈이 오다 말다 하는 구간을 여러 번 지나쳤다. 그리고 퀘벡주가 끝나고 온타리오주 Ontario 가 시작되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화창해졌다. 그리고 또 한 참을 달려 캐나다에서 제일 큰 도시 토론토 Toronto를 만났다. 시골쥐인 우리 부부는 번잡한 토론토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고속도로를 타고 나이아가라를 향해 계속 달렸다.

남편과 나에게는 토론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토론토는 즐겁지 않은 곳으로 기억된다. 몇 년 전에 토론토를 방문했을 때 남편이 격은 일인데, 대낮에 길거리를 지나다가 쓰레기통에서 튀어나온 라쿤이 남편을 공격했던 것이다. 나는 호텔 안에 있어서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놀란 남편이 울상이 되어 호텔로 뛰어 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편 말에 의하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라쿤이 남편을 향해 날아오듯이 뛰어올라 머리를 덮쳤다고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남편도 정신없이 뿌리치고 도망쳤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남편은 토론토와 라쿤을 싫어하게 됐다.

토론토는 시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우리는 길을 헤매지 않고 도시를 지나칠 수 있었다. 온타리오 호수 옆에 자리 잡은 토론토는 캐나다 제일의 도시답게 크고 넓었다. 바다처럼 넓은 온타리오 호수의 푸른빛과 청명한 하늘의 푸른빛이 대도시 토론토를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토론토를 지나 곧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했다. 나이아가라! 세계적 유명세에 걸맞게 폭포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폭포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동안 멀리서 들리는 폭포 소리가 가슴을 울릴 정도로 컸다. 듣던 대로 미국 쪽 폭포보다는 캐나다 쪽 폭포 Horseshoe Falls가 규모가 커서 볼만했다. 보통의 폭포는 아래쪽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관찰하지만 나이아라가 폭포는 내 눈높이에서 폭포의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색달랐다. 즉 관찰자가 폭포 윗부분에서 굽이쳐서 곤두박질치는 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말발굽처럼 둥글게 깎여 들어간 폭포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가는 힘과 속도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었다. 폭포는 몸이 떨리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힘과 굉음 소리를 냈다.

나이아가라는 선주민의 언어로 '천둥소리를 내는 물기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랬다. 천둥 같은 물의 소리였다. 물이 일으키는 바람과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보라 또한 장관이었다. 땅을 흔드는 물의 힘, 자연의 울림이었다. 폭포 바로 아래까지 운항하는 보트가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5월부터 운항한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폭포 아래 구석진 그늘에는 아직도 물이 얼어있었다. 보트를 타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폭포의 뒤쪽 관광 Behind waterfall으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였을까. 폭포 뒤쪽으로 들어가서 물줄기를 가까이에서 느끼는 것은 멋진 체험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물이 축축한 동굴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폭포의 물줄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폭포를 거꾸로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이리 호 Lake Erie에서 흘러온 강물이 온타리오 호 Lake Ontario로 가기 위해서는 이 깊고 거대한 폭포로 곤두박질쳐야 한다. 낙폭도 크지만 강의 폭도 넓어서 천둥소리를 낼 만큼 큰 폭포가 되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소리와 진동은 자연의 힘 앞에 한없이 보잘것없고 왜소한 인간임을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이아가라 관광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폭포라지만 대도시에서 가까워서 접근성이 아주 좋았다. 주차장에서 폭포까지의 거리도 걷기에 적당해서 연로한 노인이나 어린아이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을 같았다. 폭포 가까이에 호텔도 많고 식당도 있기는 하지만 역시 다른 곳에 비해서 비싸기는 했다. 그래도 나이아가라를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기회는 일생일대의 좋은 경험일 테니 한 번쯤 해보시길 권한다.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나이아가라가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이아가라 방문을 강력 추천한다. 모든 사람이 이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에 반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아가라에 가봤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가봤다! 나이아가라 굉장하더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와 헤어지고 우리는 온타리오 호수를 끼고 달렸다. 이제 목표는 집이었다. 온 거리만큼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몬트리올을 들리지 않고 퀘벡에서 호텔에 묵기로 했다. 우리는 온타리오 호수를 옆에 끼고 신나게 달렸다. 마침 날씨가 좋아 호수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카누를 타고 떠난 누군가를 기다리는 슬픈 전설이 있을 법한 호수는 너무 넓어서 더욱 푸르게 보였다. 문득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큰 호수를 품고 있는 이 나라는 정말 어마 무시하게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땅덩이를 가진 나라가 아니던가. 캐나다에 비해 작디작은 한반도에서 온 나는 너무 넓은 캐나다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캐나다 대륙을 횡단해 보지는 않았지만, 노바스코샤에서 나이아가라까지 2000km의 거리를 운전하는 동안에도 '진짜 땅덩어리 넓다, 넓어'를 수없이 되뇔 정도로 캐나다의 넓이를 실감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넓은 땅 위를 우리를 열심히 운전해서 노바스코샤로 향했다. 이웃집에 맡겨 놓고 온 우리 집 고양이가 보고 싶어서 길을 재촉했다. 눈과 함께한 4월의 퀘벡,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은 참으로 캐나다다웠다. 춥고, 넓고, 크고 아름다웠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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