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미첼 mjmitchell
이렇게 강렬한 기시감(데자뷔) 이라니! 어쩌면 기시감이 아니라 진짜 내가 겪었던 기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 캐나다 여행 때의 일이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해서 처음 캐나다의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공기도, 바람도, 햇살도, 풀도, 나무도 모두 내가 전에 와 본 것처럼 친숙했다. 난생처음 와보는 이국땅이 낯설 만도 한데 모든 것이 반갑고 정겨웠다. 내 몸에 잘 맞는 편한 옷을 비로소 찾아 입은 느낌이었다. 그날 이전에는 캐나다는커녕 해외여행도 해 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그것은 기시감이 분명했다. 그런데 보통의 기시감은 짧은 순간을 기억하는 반면, 내가 캐나다에서 느낀 기시감은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고교시절 어느 날, 별로 가깝지도 않은 같은 반 친구가 불쑥 내게 말했다. '넌 이다음에 커서 외국에 나가서 살면 어울릴 것 같아' 너무 갑작스럽고 생뚱맞아서 나는 그 친구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짝이 없다. 혹시 무속인 같은 신기가 있는 친구였을까?
그리고 대학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주역을 공부하는 동아리가 있었다. 나는 그런 동아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식당으로 향하는 나를 한 친구가 불러 세웠다. 자신은 주역을 공부한다면서 내 사주를 공짜로 봐주겠다고 나를 꼬드겼다. 나는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못 이기는 척 내 생년월일을 알려줬다. 그는 공책에 뭐라고 쓰면서 내 사주를 풀어 보더니 대뜸 '바다 건너가서 살 팔자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당시 유학이나 이민 같은 것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던지라 그 친구를 비웃었다. 그리고 지성의 장이 되어야 할 캠퍼스에 사주풀이를 배우는 동아리가 있다는 것에 개탄하는 수준에서 그 친구가 풀어 준 나의 사주팔자라는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살았다. 적어도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캐네디언 남편과 결혼하고 캐나다로 이민 온 후에 사라졌던 이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바다 건너가서 살 팔자' 나는 정말 캐나다에서 살 운명이었을까?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캐나다에 대해 잘 몰랐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막연히 미국과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미국과 캐나다는 비슷한 점도 물론 있지만 많은 부분이 달랐다. 캐나다와 미국은 선주민들이 살던 땅을 유럽 이주민들이 차지했고, 그 땅 위에 국가를 세우고, 전 세계로부터 모여든 이민자들이 모여 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이렇다. 미국은 대통령제이고 캐나다는 입헌군주제로써 총리가 행정부 수반 역할을 한다. 캐나다는 영국으로부터 독립 (1867년) 했지만 여전히 영국 왕을 국왕으로 인정한다는 점이 미국과는 크게 다르다. 캐나다 지폐에 영국 여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캐나다와 영국, 양국의 관계는 마치 친척 같다. 물론 대다수의 캐나다 국민들조차 자신들이 아직도 입헌군주국으로 영국왕을 국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국민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에 큰 문제 거리로 삼지는 않는 것 같다.
어느 나라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웃한 나라와는 잦은 다툼으로 인해 사이가 안 좋기 마련이다. 캐나다와 미국도 그렇다.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신생국이었던 미국은 북미대륙 전체를 미국으로 편입하려는 야욕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캐나다 영토를 침공했다. 이에 격분한, 아주 많이 격분한 캐나다군이 미국의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에 불을 질렀다(1814). 당시는 캐나다 독립 전이라서 역사에는 영국군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캐나다 땅에 살다가 입대한 캐나다 군인들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캐나다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되며 캐네디언들의 자부심이 됐다.
오래전, 첫 캐나다 여행을 앞두고 나는 남편에게 캐나다에 놀러 가면 간 김에 미국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는 안 가고 싶단다. 왜냐고 물으니 '거긴 악어가 많잖아'라고 했다. (캐나다는 추워서 악어 없음) '악어? 설마 악어가 무서운 거야?'라고 내가 물으니, '무서운 게 아니라 위험하잖아. 난 악어가 있는 미국이 싫어'라고 했다. 그때는 그저 싱거운 농담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살다 보니 남편이 미국에 가기 싫은 핑계는 수 천 가지이며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이유를 댄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의 미국 불호(不好)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치안의 불안이다. 미국의 방송 채널을 함께 공유하는 캐나다에서는 실시간으로 미국에서 일어나는 충격적인 뉴스를 본다. 개인 총기 소유가 불법인 캐나다에서도 물론 총기 사고가 없는 건 아니지만 미국만큼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미국 뉴스는 연일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총격사건을 보여준다. 그에 비하면 캐나다 뉴스는 심심하고 싱거울 지경이다. 캐나다 뉴스에서는 미국의 총기 사고 뉴스를 전한 다음에 어린이들이 조용하게 명상하는 장면을 내보낸다. 그리고 심신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명상을 권한다. 뉴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따라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게 된다.
캐나다에서 10개월을 살다가 너무 심심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친구가 있다. 그렇다. 어찌 보면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나라다. 캐나다는 상점도 일찍 닫고, 피시방, 노래방도 귀하다. 카페나 술집은 비싸고 영업이 일찍 끝나니까 집에서 놀거나 야외활동과 스포츠를 오락 삼아 한다. 땅덩이가 한없이 넓은 나라지만 인구밀도가 낮아서 몇몇의 대도시만 빼면 대부분 목가적인 풍경의 시골이다. 조용하고 범죄율도 낮다. 사람과의 거리가 넉넉해서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고 가족과 자신을 살피는 시간과 여유가 많다. 내 적성에는 잘 맞는 이런 캐나다의 장점이 그 친구에게는 맞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캐나다라는 나라자체는 한국사람들에게 호불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강남에서 부잣집 사모님으로 살던 한 한국사람이 노바스코샤에 이민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캐나다가 선진국이라고 듣고 왔는데 선진국은 개뿔! 관공서에 가도 텔레비전은커녕 의자 하나 제대로 없더라' 그 한인 아줌마는 노바스코샤 관공서에 들렀다가 큰 실망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회 전체가 느리고 불친절하고 촌스러워서 아이들 교육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줌마는 쇼핑몰에서 직원들이 자신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것에 화가 난다고 했다. 자신은 누구보다 쇼핑몰에서 큰 고객일 텐데 그걸 몰라주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했다. '아니 척 보면 몰라, 누가 돈을 많이 쓸지 말이야. 그럼 나한테 붙어서 살갑게 굴어야 할거 아냐. 근데 여기 점원들은 아주 꼿꼿하더라고. 묻는 말에만 답하고, 아휴 바보들! 그러니 캐나다가 아직 가난한 거야. 돈 벌 줄을 모른다니까' 나는 이 한인 아줌마야 말로 저급한 세계관을 가진 강남 자본주의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했다. 캐나다 쇼핑몰의 직원들은 월급을 받는 만큼만 일을 하는 느낌이다. 한국의 점원들처럼 간쓸개 다 빼줄 것처럼 싹싹하게 굴지 않는다. 그래서 돈과 지위와 권력으로 어깨에 힘주고, 돈으로 권력을 부리던 사람은 캐나다에 와서 실망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아무도 자신을 돈 많은 사모님으로 대해 주지 않아서 실망하나 보다. 나중에 소문을 들어보니 그 아줌마는 밴쿠버로 이사를 했다고 들었다. 밴쿠버에서는 사모님 대접을 받을지 궁금했다.
나는 캐나다 관공서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좋다. 무엇이든지 보기 좋고 편하게 꾸민다는 것은 누군가가 돈을 내야 그렇게 꾸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노력과 시간을 들여 예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이 낸 세금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국가의 사무를 위해 존재하는 관공서에 단지 눈호강을 위해 텔레비전을 사느라 세금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텔레비전이 없으면 책을 가져와서 읽으면 된다. 텔레비전이 있고 번듯한 소파가 놓여 있어야만 선진국이라는 발상은 참으로 후진국 국민다운 발상 같았다. 국민의 세금을 가려서 쓰고 소중하게 사용하며 국가의 제정 낭비를 막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노바스코샤에서 운전 중에 다른 자동차의 경적 소리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실수로 역주행 도로에 진입을 했는데도 마주 오던 차의 운전자는 경적을 울리는 대신 친절한 미소와 손짓으로 돌아 나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파란불이 들어온 교차로에서 출발을 잠시 주춤거린다고 함부로 경적을 울리는 차도 없다. 자신은 법을 지켰으니 상대방의 실수에 화를 낼만도 한데 대부분의 노바스코샤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관대하다. 혹시 한국에서 운전으로 상처받았거나 무시당했다면 이곳 노바스코샤 도로 운전을 추천한다. 다만 지나친 양보운전으로 인한 교차로에서 출발 주춤 거림과 규정 속도보다 느리게 달리는 앞차를 참아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교차로에서 잠시도 못 참고 앞 차를 향해 경적을 울렸던 한국 사람이라면 노바스코샤 운전이 참을성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정해진 규칙만 지킨다면 얼마든지 안전하고 자유롭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나와 같은 이민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새로운 이민자들이 와서 규칙과 약속을 파기하고 흔드는 일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법치가 흔들리면 당연히 불안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의 결혼이 합법인 캐나다에 와서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면 이는 사회적 불안요인이 된다. 동성애자들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다만 그들끼리 사랑한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는 핍박받을 이유가 될 수없다. 캐나다에서 이미 무수한 사회적 의견수렴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차별금지법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반한다고 해서 반대한다면 이것은 마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려고 하는 꼴이 아닌가. 나는 새로운 이민자들이 캐나다의 법을 존중해 주고 잘 따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것처럼 캐나다의 평화가 더욱 공고히 유지될 것이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캐나다에 사는 사람 모두는 캐나다의 평화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래서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은 종교색이 짙은 이민자들의 정착에 두려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캐나다의 법과 규칙은 대체적으로 평등하고 차별 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 (선주민들에게 행해졌던 탄압과 동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과거사 문제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임)
요즘은 '인간답다'는 개념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 최첨단 과학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유와 평등의 잇슈가 충만한 21세기에도 주권국을 침략하는 범죄행위가 버젓이 자행된다. 전쟁과 기아, 불평등과 소외가 인간 세상에 가득하다.
'인간'의 삶을 빼앗고 죽이는 건 주로 '인간'이다. 이들은 모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동물이다. 인간처럼 같은 종끼리 서로를 말살하려고 대량 살상을 자행하는 생물 종이 과연 있을까? 같은 종에게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가하는 생물종이 호모 사피엔스 말고 또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어쩌면 다른 어떤 생물종 중 가장 폭력적이고 위험한 생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답다'는 말의 의미는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앞으로는 '인간답다'라는 의미는 포악하고 파괴적이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움을 상징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인류의 미래가 두렵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DNA를 물려받을 후대 사람들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누군들 지구행성에 오고 싶어 왔겠는가! 우연히 왔으니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삶은 독립된 삶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종의 특성상 호모사피엔스는 서로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국제 사회에서 정의를 위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캐나다가 좋다. 누군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을 떠나 경제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정의가 있음을 세상 모든 인류에게 일깨워 주는 캐나다 정부의 행보가 마음에 든다. 해마다 적지 않은 수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전 세계 여성과 아동 및 소외계층의 지원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캐나다 정부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 나라에도 물론 범죄자도 있고 인종차별자도 있다. 나쁜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에 천국은 있을 수 없다. 완벽한 나라, 완벽한 정부도 없다. 삶에 대한 정답도 없다. 그러나 인간끼리 질서를 지키고 약속을 지키며 서로 돕고 의리를 나누는 것이 삶에 대한 정답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나는 캐나다 사회가 지금까지는 그러한 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적어도 '인간 다움'이 더 이상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의미로 이해되도록 사회와 국가가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내 사주팔자가 나를 캐나다에서 살도록 만들었는지는 어쨌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캐나다에 도착해서 느낀 강력한 기시감이 정말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아닌지도 물론 알 수없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나고 자란 땅은 아니지만 이 캐나다가 어쩐지 친숙하고 편하다는 것이다.
살다 보니 우연히 캐네디언 남편을 만났고, 살다 보니 우연히 계획에도 없이 이국땅에 와서 살게 되었다. 또 살다 보니 캐나다라는 나라가 멋지고 호감이라는 걸 알게 됐다. 힘든 지구 살이지만 이처럼 '우연'이 있어서 삶은 흥미진진하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불가능 확률 추진기'가 작동한 것 같다.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종종 생긴다. 우연이던 필연이던 혹은 사주팔자던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다. 흥미진진한 삶인 건 확실하다.
겁먹지 말자. 어디에 살든 호모 사피엔스의 삶이다. 좀 번잡스럽고 수다스럽고 욕심 많은 호모 사피엔스지만
지능이 높은 호모 사피엔스만이 지구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평화와 평등만이 각인되길 바란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노바스코샤 시골의 시댁에서 맞이한 첫 밤을 잊을 수가 없다. 모순되게도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깜깜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들기 최적의 상태라고 알고 있는 '조용함'과 '어두움'이 오히려 잠을 방해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다. 세상이 진공 상태에 들어간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완벽한 어둠에 갇혀 있다는 게 너무 생소해서 내 몸의 감각이 예민해졌고 그 때문에 쉽게 잠들 수없었다. 그날 밤 노바스코샤 어느 시골마을에 빛이라고는 밤하늘의 달과 별뿐이었다.
나는 첫 캐나다 여행에서 강렬한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캐나다를 친숙하게 생각했지만 역시 기시감은 기시감일 뿐 현실은 달랐다. 한국 도시형 인간인 나는 캐나다 시골에 와서 어리둥절한 경험을 수없이 많이 했다. 이민 온 후, 나는 생소한 문화와 낯선 환경에 대한 충격으로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참 많이도 했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이민을 와서 낯선 나라에 적응하려니 그야말로 고군분투였다. 밴쿠버 공항에서 느낀 한없이 편안한 기시감과는 달리 현실은 역시 낯설기만 한 남의 나라였다.
노바스코샤에 와서 만난 낯선 것들을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이곳은 자연환경이 한국과 다르니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이 있다. 그 벌레들 입장에서 보면 낯선 한국 사람인 나는 특선 메뉴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다 보면 모기뿐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날벌레들이 유독 나만 괴롭혔다. 알레르기가 심하고 피부가 약한 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나를 물어 댄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해서 이름이 '노씨움스 no-see-ums'이다. 이 날벌레 때문에 나는 정원 산책용으로 그물옷을 샀다. 주위가 온통 숲이고 호수이다 보니 모기도 많고 각종 날벌레 투성이라서 양봉할 때 입는 것 같은 그물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촘촘한 그물옷도 작은 노씨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모기, 노씨움스 만 사람을 공격하는 게 아니다. 블랙 플라이 Blackfly. 홀스 플라이 Horsefly는 더욱 고약하다. 물리면 피가 날 정도로 강력하다. 아무리 동물을 사랑하지만 내 허락도 없이 나의 피를 빨아먹는 것들은 다 싫다.
시어머니는 한국제품 '버물리'의 왕팬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벌레 물려 가려울 때' 바르는 K-약품 '버물리'를 잘 안다. 나는 캐나다에서 '벌레 물려 가려울 때' 사용하는 약품을 이것저것 써봤지만 '버물리' 만큼 효과가 빠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버물리를 많이 사 와서 캐나다 가족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시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나에게 따로 돈을 주시며 더 사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캐나다 약국에서도 '버물리'를 발견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노바스코샤의 낯선 문화중 단연코 으뜸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실내에서 신을 신고 다니는 문화다. 서양사람들은 집안에서도 신을 신고 다닌다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집안과 밖의 구분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것은 마치 집과 자연의 구분이 없이 노마드로 살던 고대 인류의 삶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시댁 식구들을 보면 캐네디언들이 신을 신고 벗는 문제를 얼마나 자유분방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시아버지는 사계절 내내 침대에 올라갈 때만 신을 벗는다. 외출할 때 신었던 신발을 신고 온 집안을 누비다가 잠자려고 침대로 올라갈 때 비로소 신을 벗는다는 말이다. 그와 반대로 시어머니는 집 안팎을 구분 없이 여름 내내 맨발로 다닌다. 맨발로 집안과 정원을 누비다가 졸리면 그냥 침대로 올라가서 잔다. 물론 신을 신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시아버지와 신을 벗고 다니는 시어머니는 한집에 산다. 시어머니는 추운 겨울에는 실내화를 신거나 양말을 신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집안과 정원을 구분 없이 다닌다. 이처럼 우리 시댁은 집안에서 신발을 신던 벗던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다. 영혼은 자유로울지 몰라도 집안에는 흙먼지가 가득하다.
집안에서 신을 신기도 해서 그런지 캐나다에는 한국과는 다른 가구형태가 있다. 새집으로 이사 왔을 때 발견했는데, 안방 붙박이 옷장 안에 비스듬한 선반이 낮게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옷장 안의 선반은 수평이 잘 맞추어진 반듯한 선반이었다. 그런데 새집에서 발견한 선반은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서 뒤쪽이 더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 비스듬한 선반의 사용방법을 고민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구두 보관용 선반이었던 것이다. 안방 옷장 안에 신발을 보관하는 문화가 있다니. 어이없기도 하다가 우리 시댁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쓸모없는 비스듬한 선반이었다. 결국 몽땅 떼내버렸다.
캐나다에서 911 대원이나 경찰이 집안에 커다란 부츠를 신고 들어 온다고 해서 놀라지 마시라. 인터넷 설치기사, 공사 인부, 가구 배달 기사 등도 신을 신고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신을 안방 장롱에 보관하기도 해서 그런지 한국처럼 집 현관에 큰 신발장이 있는 집은 드물다. 현관에 신발장이 없는 모습은 한국사람 눈에 참으로 생소하게 보인다.
캐네디언들이 집안의 '바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언제나 쓸고 닦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바닥'에서 살아본 사람에게는 거북하기 그지없는 문화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는 '바닥'에 대한 청결을 포기하고 산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반씩 골고루 닮은 남편 덕이다. 남편은 내가 실내화로 신으라고 사다 준 슬리퍼를 신고 정원과 집안을 구분 없이 오갔다. 그리고 운동화 끈 풀기 귀찮다고 신을 신은채 집안 화장실로 저벅저벅 걸어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남편의 이런 행동이 다 스트레스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런 캐네디언과 한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스트레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방식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타협을 할 것인가 고민할 끝에 남편과 내가 모두 자유롭고 편하게 사는 길을 선택했다. 방법은 에라 모르겠다였다. 바닥의 청결을 포기하고 사니 편하긴 하다. 바닥 걸레질을 덜 한다고 당장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앉아 생활하지 않으니 청결에 무뎌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 집안에서 신발을 벗는 게 원칙이다. 남편도 서서히 내 원칙에 길들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캐나다 남자와 결혼하고도 한동안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캐나다와 한국의 이부자리가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캐나다로 이민 오고 나서야 아주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침대 매트리스 위에 커버를 깔고 매트를 깔고 사람이 눕고 이불을 덮는다. 즉 한국에서는 커버, 매트, 사람, 이불의 순서인 반면 캐나다에서는 커버 위에 사람이 눕고 시트를 덥고 그 위에 이불을 또 덮는다. 즉 커버, 사람, 시트, 이불의 순서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이 시트의 역할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는 침대 커버와 덮는 시트를 다 합쳐서 침대 시트라고 한다. 커다란 이불을 자주 빠는 대신 침대 시트를 자주 빠는 것으로 잠자리 청결을 유지한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한국사람들은 덮는 시트천을 자꾸 깔고 잔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덮는 시트를 침대 커버나 매트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트와 이불을 꿰매버렸다. 한국의 솜이불처럼 사방을 돌아가며 바느질 한 건 아니고 목부분만 시트와 이불이 분리되지 않게 듬성듬성 꿰맸다. 세탁할 때는 시트만 뜯어서 빨고 다시 꿰맸다. 그제야 한국 손님들에게 시트는 깔개가 아닌 홑청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빨래하기 불편해서 솜이불을 잘 안 쓰지만 나는 때때로 두툼하고 무거운 솜이불이 그립다. 한국의 솜이불은 이불 홑청 (요나 이불 따위의 겉에 씌우는 한 겹으로 된 천)을 씌워 더러움을 방지하고 세탁할 때는 홑청만 벗겨 빤다. 어릴 적 엄마가 이불 홑청을 빨고 꿰매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보면서 컸다. 어린 나는 엄마가 이불 빨래를 하는 날이면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빳빳하게 풀을 먹인 흰 홑청을 바느질할 때면 우리 삼 남매는 이불 위에서 뒹굴고 놀았다. 바느질하는데 성가시다고 엄마가 잔소리를 해도 어린 우리는 이불 위에서 철없이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웠다. 까슬까슬하고 빳빳한 새 홑청을 씌운 이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서 잠이 솔솔 왔다.
겨울이 길고 추운 캐나다에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쓰던 것 같은 두툼한 솜이불은 없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얇은 시트와 담요를 여러 겹 덮고 그 위에 두꺼운 이불을 덮었었다. 시외할머니가 사준 일명 밍크담요가 보온에는 효과가 탁월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한국에서 누빔 이불을 사 왔다. 누빔 이불 위에 두꺼운 이불을 덮으니 보온과 무게가 모두 만족스러웠다. 잘 사온 누빔 이불 하나 오리털이불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었다.
캐나다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 명절을 빼놓을 수는 없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거의 전 세계적인 명절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문화가 어디나 비슷할 줄 알았는데 캐나다에 와서 보니 조금 달랐다. 우선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증정 장소가 다르다. 전 세계의 산타가 모두 아이들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가는 줄 았았는데 이곳의 산타는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선물을 두고 간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도착지라는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트리 밑에는 산타의 선물뿐 아니라 모든 가족의 선물이 모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는 온 가족이 잠옷 차림으로 트리 주위에 앉아 한 사람씩 선물을 개봉한다. 이렇게 크리스마스트리가 크리스마스 선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한국에 살 때는 알지 못했다.
벽에 걸어두는 크리스마스 양말 ( Christmas stocking)은 말이 양말이지 거의 포대자루만큼 크다. 한국말로는 양말 socks이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스타킹 stocking이라고 하니 사이즈의 차이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 양말은 모두 돌아가신 시외할머니가 털실로 짜주신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의 양말은 모두 같은 디자인에 색만 조금씩 다르다. 할머니는 각자의 양말에 일일이 양말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주었다. 나도 캐나다에 오자마자 할머니로부터 내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크리스마스 양말을 선물로 받았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산타가 가득 채워준 크리스마스 양말 속 선물을 다 확인한 후에 온 가족이 함께 크리스마스 아침을 먹는다. 캐나다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장 큰 명절답게 선물과 음식과 웃음이 넘치는 날이다.
한국에서 나는 거의 도시에서만 살았다. 파주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로 이사 왔다. 지금은 파주도 서울 생활권으로 도시화가 되어 규모도 커졌지만 내 어릴 적 파주는 촌이었다. 사방이 논과 밭이었고 근처에 미군부대도 있었다. 추운 설날 꽝꽝 언 교하 강을 건너 먼 친척집으로 세배 가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탔고 강둑에서 연을 날렸다. 내 기억 속 파주는 모든 것이 청명하고 깨끗했다.
캐나다에서 첫겨울을 맞이했을 때 콧속으로 들어오는 청명하고 찬 공기가 갑자기 어릴 적 파주를 떠올리게 했다. 약간 달큰하고 비릿한 맑고 찬 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는데 페속을 짜릿하게 파고드는 차고 맑은 공기가 한순간에 나를 어린 시절의 파주도 데려다주었다. 아주 오랫동안 고향의 향기를 잊고 살았는데 엉뚱하게도 노바스코샤에 와서 고향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파주에서도 못 느낄 고향의 내음을 노바스코샤에서 느끼다니 내가 생각해도 신비로운 시공간을 뛰어넘는 경험이었다.
길고 추운 겨울의 나라에서는 어떻게 겨울을 보낼까? 캐네디언들은 겨울을 견디는 각자의 취미가 있다. 시아버지의 겨울 취미는 모형 기차 레일을 만드는 것이고, 시어머니의 취미는 뜨개질과 자수이다. 내 남편은 스키를 즐기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비디오 게임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게 사실이다. 내가 아는 지인은 눈이 오면 온 가족이 집 현관에서 스키를 신고 나간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는 것이 그 가족의 겨울 취미다. 참으로 캐나다스러운 가족이 아닐 수없다. 역시 겨울 스포츠가 캐네디언들에게는 제일가는 겨울 취미이다.
캐나다는 겨울 스포츠를 잘하기로 유명한 나라다. 한국의 많은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는 것만큼 많은 캐나다의 아이들이 아이스하키나 스케이트, 스키 등을 배운다. 인구 1만 명이 될까 말까 한 시댁 시골 동네에도 실내 아이스링크가 있고 아이스하키, 컬링, 스케이트 등의 경기가 활발히 치러진다.
난생처음 아이스하키 경기를 구경하러 가서 생긴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시아버지가 나를 처음으로 아이스하키 경기장에 데려간 날, 우리는 아이스링크와 관중석 사이를 구분 짓는 유리벽 바로 뒤에 앉았다. 아이스하키는 스피드가 있는 데다가 몸을 심하게 부딪치는 스포츠라서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쉽게 깨지지 않는 투명 유리판을 세워 관중을 보호한다. 그런데 경기 중 선수 한 명이 유리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어찌나 강하게 유리벽을 박았는지 유리벽이 휘청하며 큰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서 들고 있는 커피를 내 옷에 쏟고 말았다. 이걸 본 시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우리 며느리가 오늘 아이스하키를 처음 보러 왔다우'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환영의 박수를 쳐주었다. 다행히 커피는 뜨겁지 않았고 나는 아이스하키 첫 관람의 기억을 커피 향과 함께 간직할 수 있게 됐다. 아무튼 캐나다 하면 겨울 스포츠, 특히 아이스하키를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모자이크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민자의 나라에는 단일 민족국가에 비해 다양한 문화와 삶이 있는 게 당연하다. 캐나다와 같은 다민족, 다문화 국가에서는 획일화된 취향을 강요할 수 없지만 자연환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각자의 방법대로 길고 추운 겨울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지혜가 있을 테고 사람들은 서로 그 지혜를 나누고 배우기도 한다. 나 역시 새로운 나라에서 배우고 적응하는 중이다. 이따금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나면 나 자신에게 조그맣게 속삭인다. '괜찮아, 낯설어서 그런 거야. 차차 익숙해질 거야.'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