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미첼 mj mitchell
우리가 한국에서 살 때의 일이다. 남편과 나는 한 대형 마트에 갔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마트 안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에게는 전혀 틀별해 보이지 않았던 이 풍경이 남편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금 전쟁이 났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돼 물어보았다. 남편의 대답은 이랬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걸 보면 전쟁 때문에 미리 사재기를 하려는 것 아니겠어? 보라구, 온 도시 사람들이 다 뛰쳐나왔잖아"
그랬다. 남편이 한국에 와서 제일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높은 인구밀도였다. 남편은 오로라를 수시로 볼 수 있다는 극지방의 작은 도시 래브라도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노바스코샤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왔다. 그러니 어디에서 한국만큼 바글바글한 인구밀도를 경험해 봤겠는가. 그 당시에 나는 남편이 많은 사람을 보고 놀라는 것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노바스코샤에서 10년 넘게 살아보니 이제는 나도 한국의 인구밀도에 놀라기도 한다. 그렇지만 남편은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인구밀도에 놀라지 않는다. 한국에 적응해서가 아니다. 중국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K 문화 열풍으로 한식이 널리 알려졌지만 남편이 한국에 도착한 17년 전만 해도 외국인들에게 한식은 낯선 문화였다. 남편은 캐나다에서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길거리 음식이 마냥 신기했다고 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남편이 붕어빵 장수를 만났는데, 붕어빵을 만드는 것을 한참 관찰해 보니, 아저씨가 붕어 뱃속에 초콜릿을 가득 채워 넣고 있더란다. 초콜릿을 아주 꾹꾹 눌러 채우는 것을 보니 이건 내가 꼭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초콜릿이라면 환장을 하는 남편은 얼른 붕어빵을 사서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가 이내 뱉어냈다고 했다. 그것은 초콜릿이 아니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붕어빵 뱃속의 그것, 바로 단팥이었다. 남편의 말로는 당연히 초콜릿이라고 기대했는데 초콜릿이 아니라서 너무 충격이었다고 했다. 요즘도 가끔 붕어빵의 뱃속 정체에 속았던 이야기를 할 정도인걸 보면 충격이 꽤 컸나 보다. 그는 지금도 붕어빵이라면 치를 떤다.
남편이 처음 된장찌개의 냄새를 맡았을 때, ‘발냄새가 심한 썩은 양말을 끓이면 이런 냄새가 나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위가 상했다고 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한 숟가락 떠먹고 나서는 된장의 진한 풍미에 매료됐다고 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도 좋아하지만 남편은 특히 돼지 감자탕을 좋아해서 즐겨 먹었다. 맛도 맛이지만 남편이 감자탕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편을 매료시킨 건, 감자탕을 배달해 주는 아주머니의 배달 솜씨였다. 쟁반을 머리에 이고 손도 짚지 않고 편하게 걷는 배달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남편은 그녀를 '마스터'라고 칭찬해 주곤 했다. 남편은 특히 식당마다 푸짐하게 나오는 반찬을 좋아했다. 한식이 유명해진 요즘은 한국의 반찬 인심이 좋다는 소문이 전 세계에 자자해졌다. 어디를 가도 한국과 같은 반찬 리필 서비스는 없나 보다.
어떤 외국인들은 한식도 이것저것 잘 먹는 개방적 입맛을 가졌는데 남편의 입맛은 조금 보수적인 편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한식을 잘 먹지만 아직도 두부나 떡의 식감을 낯설어하고 (먹기는 먹음) 깻잎은 못 먹는다. 생 두부를 먹고 고소하다고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나는 두부의 고소함을 공감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생두부를 억지로 먹여 봤는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남편 말로는 요리된 두부는 양념맛으로 먹지만 생두부는 부드러운 지우개를 씹는 것 같아서 싫다고 했다.
남편은 한국에서 4년을 살았다. 그동안 나를 만나 결혼하고 여행도 다니며 여러 경험을 했지만 언제나 고향인 캐나다를 그리워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직장을 옮겨야 할 상황이 생겼고, 남편은 고민 없이 ‘이제 캐나다로 돌아갈 때가 됐어’ 라며 귀향을 결심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랴부랴 짐을 꾸려 노바스코샤로 왔다. 나는 그렇게 캐나다 남자와 캐나다에서 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국제부부가 그렇듯이 파트너 중 한쪽, 모국에 사는 사람이 관공서, 은행, 공과금 등의 업무를 도맡아서 한다. 우리 부부도 역시 그랬다. 한국에서 살 때는 부부 공동의 문제뿐 아니라 남편의 모든 문제를 일일이 내가 도와주어야 했다. 그런데 캐나다로 이사 온 후, 우리의 역할은 완전 반대가 됐다. 모든 일이 남편의 몫이 되었다. 관공서 일 처리, 공과금 납부 및 은행 업무, 세금 정산, 자동차 구입과 보험 계약, 부동산 계약, 집수리 등등 살면서 처리해야 할 계약과 서류 업무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이런 일들은 실수하면 경제적 손실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당연하게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일을 전담하게 된다. 그래서 남편은 좀 더 책임감 있는 삶의 경영자가 되어야 했던 반면, 생활 업무에서 벗어난 나는 한층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캐나다로 이사 온 후부터 가정 경제의 모든 업무를 담당해야 했던 남편은 처음에는 책임의식도 부족했고 경험도 부족해서 실수가 많았다. 게다가 서로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우리 부부는 의견 일치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두고도 생각하는 방법이 영 달랐다. 같은 결론을 가지고도 방법적인 문제로 오래 토론을 해야 했기에 많이 다투기도 했고 서로에게 많이 배우기도 했다. 다행히 남편의 장점은 숨김없는 투명함과 의리로 뭉친 공동체 의식이다. 그래서 공동 경제를 꾸리는 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지출이나 저축 등의 방법적인 문제에서 의견이 어긋나곤 했다.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통의 캐네디언처럼 남편 역시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일에 있어 기본 매뉴얼이 우선이고 임의로 매뉴얼을 바꾸지 않는다. 늘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한 경쟁 사회에서 자란 한국 사람의 눈에는 정해진 대로만 일을 처리하는 것이 답답하게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내 눈에는 캐나다의 일 처리 문화가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캐네디언들은 한없이 상냥하고 순한 얼굴을 했지만 업무 처리는 냉정하다.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철저히 매뉴얼 대로만 일 처리를 하는 듯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 외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정해진 원칙과 임무를 매뉴얼대로 하면 되니까 눈치를 볼 이유가 없어서 그런지 눈치가 뭔지도 모른다.
내 남편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영어 사전에서 ‘눈치’를 찾으면 재주 Tact, 감각 Sense, 표현 expression 등의 단어가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눈치’의 뜻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눈치-일의 정황이나 남의 마음 따위를 상황으로부터 미루어 알아내는 힘. 눈치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이 챙겨야 하는 특별한 감각이다. 그런데 캐나다 문화에서는 이런 눈치는 없다. 분명하고 직접적인 의사 표현만이 유효하다. 눈치로 알아차리는 문화에서 자란 탓에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명확한 의사표현에 미숙한 것 같다. 캐나다 남자와 살면서 나의 감정이나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것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치가 없는 문화에서는 상대방이 표현한 만큼만 인정되고, 딱 그만큼 까지만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러니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서 ‘말 안 해도 서로 눈치껏 행동'하며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말하는 ‘청소하자’는 뜻은, 먼지 털고,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까지 하는 모든 과정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남편에게 ‘우리 청소하자’라는 말은 상당히 모호한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너는 청소기를 돌려, 나는 걸레질을 할게'와 같은 대화만이 남편을 움직이게 만든다. 신혼 때 우리 부부는 어떤 일을 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꼭 필요했다.
남편은 참으로 촌스럽고 자유롭고 똑똑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다. 촌스럽고 자유로운 이미지는 서로 어울리지만 똑똑하고 바보 같은 이미지는 서로 상반된다. 그런데 내 남편이 딱 그런 상반된 이미지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마치 ‘있는데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된다. 천사와 악마, 따뜻함과 냉정함, 부드러움과 딱딱함, 어린이와 어른의 정서를 다 가졌다. 인간이 가지고 있을 법한 모든 감정을 풍부하게 가졌고 풍부하게 표현도 한다. 감정이 아주 흥미진진하고 입체적이다. 기쁠 땐 엄청 기쁘고 슬플 땐 또 그렇게 잘 운다. 그를 만난 후 나의 지구별 여행은 더욱 흥미진진 해 질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남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이스하키가 빠질 수는 없다. 부드럽던 캐네디언들이 ‘아이스하키’ 경기 때에는 싸움꾼이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내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스하키 중계를 볼 때, 남편은 다른 남자로 빙의된다. 캐나다 대표 팀의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달콤한 로맨스 따위는 발을 붙일 틈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 남자들의 축구사랑보다 캐나다 남자들의 아이스하키 사랑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심지어 남편의 친구 J는 비디오 게임도 ‘아이스하키’ 경기만 한다. 내가 왜 매일 같은 게임만 하냐고 물어보니 ‘캐네디언에게 다른 게임이 뭐가 더 필요한데?’라고 내게 반문할 정도다. 캐네디언에게 아이스하키는 절대적인 자부심이고 자존심이다. 남편은 특히 미국팀이나 러시아팀과의 경기에 열을 올린다. 열을 심하게 올리기 때문에 그런 날은 다른 분이 내 남편에게 빙의될 거라는 각오를 해야 한다. 아주 거친 분이 빙의될게 뻔하다.
대부분의 캐네디언들이 예의 바르고 공손하지만 놀 때는 미친 듯이 논다. 일 처리는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노는 건 아주 화끈하고 개방적이다. 자메이카 여행을 같을 때 그곳 현지인들이 캐나다에서 왔다고 하면 모두들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모두 미쳤어요! 크레이지!!"
남편을 비롯한 대부분의 캐네디언들은 인생의 한 순간, 재미있는 그 순간을 마음껏 좋아하며 표현한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순간을 즐긴다. 온전히 몰입해서 마음껏 자신의 즐거운 감정을 표현한다. 멋지다! 끝내준다! 아름답다! 내 인생 최고야! 등등의 감탄사가 마구 쏟아진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문화에서 자란 내가 보기에는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몰입해서 좋아한다. 자메이카 관광지에 놀러 간 캐네디언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즐거워했으면 '당신들 다 미쳤다'라고 표현했겠는가. 놀 때 놀 줄 아는 캐네디언들이 진정한 호모루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
서로에게는 각기 다른 즐거움이 있고, 누구나 그 즐거움을 위해 사는 것이 소중한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캐네디언들은 다른 사람의 취향 존중이 지극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다. 자식의 취향도 부모인 나와는 별개의 취향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자식이 괴상망측한 차림새를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네가 좋다면 그렇게 하렴 You can do it if you like it> 캐네디언들이 자주 하는 말이고 내 남편도 내게 이 말을 자주 해준다. 이 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마음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이 마법의 주문이 캐네디언을 눈치 없이 행복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캐네디언들은 놀 때 미친 듯 놀고 일할 때는 원칙대로 일한다. 일의 진행 속도가 느려도 원칙을 고수한다. 원리 원칙에 충실한 일 처리는 사고나 실패의 위험은 낮아지겠지만 변화, 발전의 속도가 느리고 유연하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캐나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느리고 융통성이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일반화 일까?
캐나다를 닮은 남편은 느리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다. 지켜야 할 원칙과 규칙은 시간이 지연되더라도 칼같이 지키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미친 듯 열광한다. 그리고 그 외의 것에는 시큰둥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취향은 마음을 다해 존중해 준다. 그리고 늘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언젠가 내 절친 G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남편이랑 살려니 쉽지 않다’라고 내가 말했더니 ‘말도 같고 문화도 같은 남편이랑 살아도 쉽지 않다’라고 내 친구가 응수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누구와 산들 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 함께 사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더구나 애초에 성별이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일이 쉬울 리 만무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편은 의견 조율에 상당히 적극적이며 약속을 지키는 의리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에도 의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남편은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고 고치려고 애쓴다. 이런 점은 나도 남편에게 많이 배우는 중이다. 남편에게는 인권과 평등, 지구 환경 보호 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절대적 규칙이 있다. 아이같이 순수하고 매사에 둔하다가도 인권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정의의 잣대는 날카롭고 예리하다. 도로 주행할 때 노란 중앙선을 절대적으로 지키듯이 남편이 지키는 절대 인권과 절대 평등, 자유가 든든하고 믿음이 가서 좋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신기한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 넓은 지구에서 부부로 만나 사는 신기한 인연이 얼마나 많고 많은가. 이 모든 인연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기적이 내게도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