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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캐나다에서 생일 여행, 그리고 교통사고

민재 미첼 mj mitchell

by 민재 미첼 MJ Mitchell

22. 캐나다에서 생일 여행, 그리고 교통사고



2010년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부부는 노바스코샤 북쪽에 있는 케이프 브레튼섬 Cape Breton Island(이하-CB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해서 기념 삼아 1박 2일 일정으로 섬을 관광하기로 했다. 섬에는 국립공원이 있어서 캐나다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을 자랑한다. 그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울프빌에서 목적지까지는 자동차로 약 4시간 정도 걸렸다. 섬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출발했다. 섬에 도착한 우리는 아름다운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겼다. 숲과 바다를 양옆에 끼고 달렸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맑은 공기가 눈과 머리를 깨끗하게 세탁해 주는 것 같았다. 늦가을이라서 단풍의 절정기는 지났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울긋불긋한 가을의 정취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낙엽이 수북한 공원의 피크닉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가져온 김밥과 애플파이를 먹으며 느긋하게 자연을 감상했다. 그런데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비수기여서 국립공원 안의 모든 숙소가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쉽지만 우리 부부는 하루 만에 여행을 끝마쳐야 했다. 부랴부랴 국립공원을 돌아보고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을 향해 출발했다. 밤하늘에는 아주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있어서 그믐밤처럼 어두웠다. 달이라기보다는 날카로운 면도칼에 베인 밤하늘의 상처 같아 보였다. 별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예정과는 달리 밤운전을 하게 되었지만 남편은 투덜대지 않고 운전대를 잡았다. 마침 그날 밤에는 남편이 응원하는 팀의 아이스하키 경기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남편은 ‘잘하면 집에 가서 하키 경기를 처음부터 볼 수 있겠는 걸’이라고 말하면서도 과속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노바스코샤에서 과속 딱지를 끊으면 벌금이 엄청 비싸다. 제한속도에서 1~15 km/h 초과:벌금 237.50 달러, 16~30km/h 초과:295달러, 31km/h초과:410달러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은 20km/h이하:40,000원, 20~40km/h 이하:70,000원, 40~ 60km/h 이하:100,000원이다. 한국에 비하면 노바스코샤의 과속 벌금은 벌린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로 비싸다. 남편은 비싼 벌금을 내지 않으려고 속도를 지켜가며 운전을 했다. 노바스코샤에는 과속을 감시하는 카메라는 없지만 스피드건을 쏘는 경찰들을 볼 수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쫓아오는 경찰차를 만나는 등골 서늘한 경험을 하지 않으려면 과속에 더욱 주의해야 했다.


케이프 브레튼 섬 Cape Breton Island

우리는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국도를 조심조심 운전하고 있었다. 늦가을의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나아가던 우리 차 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물체를 먼저 발견한 내가 속도를 줄이라고 소리쳤다. 남편이 급하게 속도를 줄였다. 자동차 앞 어두운 도로 위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야생동물의 로드킬이 흔한 캐나다의 도로 사정에 익숙했기에 처음에는 야생동물의 사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이상해 보였다. 동물 사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그것은 교통사고의 잔해처럼 보였다. 작은 파편들이 2차선 도로 위에 가득 흩뿌려져 있었다. 우리 부부가 사고의 잔해를 보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서 있던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Help~~ Help ~~"

그 소리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섞여 처절하고 간절하게 들렸다. 사방은 너무 어두웠기에 자동차 불빛이 비추는 곳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큰소리로 ‘걱정 마세요. 우리가 당신을 도울 게요’라고 소리치며 얼른 우리 자동차를 길 옆으로 옮기고 헤드램프 2개를 꺼내 왔다. 하나는 자신의 머리에 두르고 하나는 나에게 주었다. 비상용으로 준비해 간 헤드램프가 있어 다행이었다.

남편은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계속 말을 걸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길가 수풀 사이 움푹 페인 수로에 자동차 한 대가 쏙 박혀 있었다. 뒤집혀 있지는 않았지만 몇 바퀴를 굴렀는지 유리창은 다 깨졌고 차 전체가 온통 찌그러지고 긁혀 있었다. 처참했다. 차의 앞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눈앞의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중년의 백인 남성이 계속 도와달라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조수석에 있는 자신의 딸을 먼저 꺼내 달라고 울며 애원했다. 십 대 소녀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남편은 차문을 열려고 힘을 주면서 침착하게 통성명부터 했다. 아쉽게도 자동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낸 남편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진정시켰다. 놀라서 덜덜 떨고 있는 나에 비해서 남편은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에게 출혈이 있는지, 호흡에 문제는 없는지, 통증이 제일 심한 부위가 어디인지 물었다. 중년의 아저씨는 무릎과 다리가 운석석에 꽉 끼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무릎의 통증이 제일 심하다고 하면서 아무래도 자신의 다리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조수석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소녀를 운전석의 아빠가 아무리 흔들어봐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깨어나지 않는 딸을 보며 비통함에 몸부림을 쳤다. 남편은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규칙적으로 호흡하라고 당부하면서 자동차 문을 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 당시 우리 부부에게는 휴대전화가 없어서 911에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을 떠날 때 휴대폰을 해지하며 캐나다에서는 휴대폰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했었기 때문에 전화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우리 부부도 각자 휴대폰이 있다.) 남편은 아저씨에게 휴대전화기가 있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신의 휴대폰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은 그에게 계속 말을 시키며 어떻게 해서 든 차 문을 열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야속하게도 차문은 열리지 않았고 엔진에서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찻길로 가서 헤드램프를 흔들어 오는 차를 세워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운전석에 꽉 끼어버린 아저씨는 다리의 통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출현의 양도 적었고 정신도 비교적 또렸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가 정신을 잃지 않게 하려고 계속 말을 걸었다. 어느 사이 조수석에 있던 그의 딸이 깨어나서 신음하며 울기 시작했다. 열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울부짖는 아빠의 마음과는 다르게 조수석 문도 열리지 않았다. 찌그러진 차가 사람의 몸을 완벽하게 가두어 버린 꼴이 되어 있었다.


나는 헤드램프를 손에 들고 흔들며 제발 지나가는 차가 있기를 바랐다. 도로는 깜깜했고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가득했다. 밤늦은 2차선 국도에는 지나는 차가 없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에서 희미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Help me~ Please help~!"

맙소사! 우리가 발견한 사고차량의 건너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편에게 사고자가 더 있는 것 같다고 소리쳤다. 남편은 처음 발견한 부녀 사고자에게 금방 다시 돌아올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키고 길 건너편 어둠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고가 난 지점은 삼거리였는데 두대의 차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튕겨져 나간 듯 보였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자동차를 발견했다. 이 차역시 온통 찌그러지고 깨졌지만 우리가 처음 발견한 사고차량처럼 수로에 처박혀 있지는 않았다. 남편과 내가 달려가 보니 젊은 백인 남자가 깨진 차창을 통해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남편은 그에게 출혈이 있는지 물었으나 청년은 대답도 없이 막무가내로 발버둥을 치다가 차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는 청년을 바닥에 누이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는 성치 않은 몸으로 힘겹게 버둥거리다가 기절을 했는지 조용해졌다. 남편은 나에게 청년이 움직이지 못하게 손을 꼭 잡고 있으라고 한 후, 다시 길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나는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무섭기만 했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머릿속이 자꾸 헛도는 느낌이었지만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저 남편이 시키는 대로 신음하는 낯선 백인 청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내 손을 잡은 채 죽게 될까 봐 속으로 계속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 생일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시킨 대로 청년에게 ‘잠들지 말고 천천히 숨을 쉬세요.’ 라며 계속 말을 걸었다. 청년의 축 늘어진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은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길 건너편으로 뛰어갔던 남편이 아무래도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남편은 중년의 사고자에게 ‘차가 폭발할 것 같지는 않으니 내가 가장 가까운 집에 찾아가서 신고하고 올게요. 나를 믿어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내가 얼른 신고하고 올게" 돌아선 남편이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때마침 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의 불빛이 보였다. 남편은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램프를 벗어 들고 크게 흔들며 멈추라고 소리쳤다.


우리 앞에 멈추어 선 트럭에는 젊은 백인 남자 둘이 타고 있었다. 남편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 휴대폰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재빨리 911에 신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고 차량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우리는 의용 소방대원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흙이 잔뜩 묻은 장화를 신은 그들이 그렇게 믿음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 한지 불과 4~5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체감으로는 몇 시간이 지난 느낌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한 의용 소방대원들은 내 손을 잡고 쓰러져 있는 남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리고 나에게 계속 그를 잘 살피라고 했다. 부녀 사고자에게 달려간 그들도 온 힘을 다해 차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사고자를 차에서 꺼낼 수 없었다. 곧이어 지나가던 다른 차 몇 대가 연이어 멈추어 섰다. 운전자와 탑승자 모두 차에서 내려 2차 사고 방지를 위해 경광등을 들고 교통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멀리서 소방차와 구급차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나의 모든 긴장이 풀렸다. 그제야 늦가을 밤의 추위가 맵게 느껴졌고 이제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긴장이 풀린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은 마치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비현실적이었다.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가 도착했다. 아주 커다란 소방차가 4대나 왔지만 중년의 사고자를 차에서 꺼내기까지는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자동차의 지붕을 완전히 뜯어 내고 차를 조각낸 후에야 사고자를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교통사고의 최초 발견자이기 때문에 참고인 진술을 해야 했다. 나와 남편은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고 현장 옆에 서서 진술을 시작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기 때문에 생일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설명하자 경찰관은 내게 생일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오늘이 이 숙녀분의 생일이래요. 다 같이 생일 축하해 주자구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피 벌스데이!!" "해피 벌스데이!"

소방차와 구급차의 불빛과 시끄러운 소음 속에 멜빵이 달린 때 묻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안전모를 쓴 소방대원들이 내 곁을 스칠 때마다 웃으며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해 주었다. 사고 현장을 살피고 사진을 찍던 경찰관들도 나를 보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이 정신없는 사고 현장에서도 태연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며 웃음 띤 얼굴로 내게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다니 이건 정말 헐리웃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얼떨떨했다. 마치 재난 영화의 엔딩 장면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사고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은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듯 보였고 나는 그날 내 생에 가장 많은 생일 축하 인사를 들었다.

어느 정도 사고 현장이 수습되고 나서 우리는 경찰관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다시 집을 향해 달렸다. 남편은 꼭 보고 싶어 했던 아이스하키 경기는 놓쳤지만 우리가 사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니 경기는 마지막 피리어드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남편이 응원하는 팀이 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쉬움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집에 도착해서 경기가 끝나기까지 불과 3,4분여 남았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남편의 응원팀이 무려 3골이나 연속해서 성공을 시켰다. 역전이었다. 대 역전! 쉽게 볼 수 없는 기적적인 막판 역전극이었다. 결국 남편의 응원 팀 <밴쿠버 커넉스>가 이겼다. 3명의 생명을 구했기 때문에 신께서 자기에게 3개의 골을 주신 거라며 남편은 아이처럼 뛰며 좋아했다.


며칠 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목격한 교통사고는 법정 다툼이 필요한 사건이라고 했다. 부녀 사고자가 피해자이고 기를 쓰고 차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치던 청년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라고 했다. 이 어리석은 청년은 음주운전 집행유예 기간 중 또다시 술을 먹고 사고를 냈던 것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브를 돌던 청년의 차가 (사고 지점 삼거리임)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부녀 사고자의 차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그날, 청년에게서는 술냄새가 났었다. 나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독한 술냄새를 분명히 맡았었다. 안타깝게도 중년의 아저씨는 한쪽 무릎뼈가 으스러져서 영원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의 딸은 가벼운 발목 골절뿐이었고, 사고를 낸 청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골절상뿐이라고 했다. 경찰은 사건의 재판과 해결을 위해 나에게 법적 증언을 부탁했다. 그날 밤, 청년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청년의 곁에 있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었다. 법원에서 내 증언을 비디오카메라로 녹화할 거라고 했다. 그 당시 나의 영어 실력은 법적 증언을 할 만큼 유창하지 못했다.(지금도 뭐 그닥...) 재판에서 나의 뜻이 한치의 오해 없이 명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통역 서비스를 신청했다. 그리고 아주 공신력 있고 실력 있는 한국인 통역사와 함께 증언 녹화, 녹취를 했다.

그 후에도 경찰이 내게 전화해서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나는 그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사고를 낸 청년은 음주운전이라는 큰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법정에서, 그것도 청년의 면전에서 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는 게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청년에게서 술냄새가 났습니다."

나의 이 증언은 이미 녹화를 다 끝마친 후였기에 증언을 위해 재판정에 출석하는 일만큼은 없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기도했고 그 기도는 결국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마지막으로 내게 전화를 한 경찰은 내 증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무사하고 정의롭게 사건이 종결되어 간다고 했다. 음주운전을 한 젊은이는 당연히 감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피해자 아저씨는 휠체어를 타고 퇴원했다고 전해주었다. 참으로 씁쓸하고 허망한 결말이었다. 패자뿐인 싸움에 참전한 기분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사고를 목격했을 때 침착하게 행동했던 남편이 감사하기만 하다. 나는 그날 기절하지 않은 내가 대견할 정도로 정신줄을 잡고 있기 힘들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었었는지 남편에게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비상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자기 나름의 행동 매뉴얼을 만들어 놓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요즘은 좀비 출현에 대한 비상 매뉴얼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 당신은 행운아야, 나 같이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과 결혼했으니 말이야. 좀비가 나타나면 내가 보호해 줄게!"

라고 하며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어 보여줬다. 좀비 출현을 걱정하는 남편을 둔 내가 정말 행운아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몇 년이 지난 후, 남편과 나는 기본 응급처치 수업을 함께 들었다. 심폐 소생술, 심장 충격기 사용법, 화상, 골절, 감전사고 등 비상 상황에 필요한 응급처치 요령을 배웠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배우고 보니 예전보다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덜해졌다. 나는 천성적으로 피와 주삿바늘을 무서워하고 다치거나 피 흘리는 장면을 보는 걸 두려워했다. 예전에 시외할머니 집에 살 때 할머니가 쓰러져서 911에 신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911 대원들이 와서 나를 보더니 할머니보다 내가 더 안정이 필요해 보인다며 나를 걱정해 줄 정도로 나는 사고 상황에 침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응급처치 수업을 듣고 나니 사건과 사고는 막역한 두려움이 아니라 현명하게 대처해서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지만 역시 내가 배운 응급처치를 영원히 써먹을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목격한 그날의 교통사고는 우리가 사고지점에 도착하기 불과 2,3분 전에 일어난 사고였다. 만약 우리가 2,3분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역시 음주운전은 본인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큰 죄악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이 교통사고가 모두에게 반면교사가 되길 바란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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