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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노바스코샤의 여름

민재 미첼 mjmitchell

20. 노바스코샤의 여름 - 가족의 여름 나기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짧은 봄이 지났다. 드디어 여름이 왔다. 노바스코샤의 여름은 내게 선선하기만 한데 (7월 둘째 주 최고 기온 26°c) 캐네디언들은 더워서 녹아내릴 지경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한겨울에도 해만 쨍쨍하면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아온 탓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캐나다에서는 한여름에도 여벌의 겉옷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건물 안은 온통 냉장고처럼 춥기 때문이다. 추위에는 더없이 강한 캐네디언들이 더위에는 맥을 못 추기에 어디를 가나 에어컨을 세게 틀어서 춥다. 특히 장 보러 마트에 가면 신선 냉장고에서 나오는 찬기와 에어컨의 찬기가 섞여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다. 한여름에도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겉옷이나 스카프는 장보기 필수품 중 하나다.

노바스코샤보다 더 북쪽, 래브라도에서 살다 온 시댁 식구들은 더위에 더욱 약하다. 나는 시댁에 갈 때 겨울이나 여름이나 한결같이 두꺼운 겉옷을 꼭 챙긴다. 시댁의 실내 적정 온도가 늘 18°c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각 방마다 따로 온도 조절이 가능하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다. 온, 냉방 시스템이 집안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니 공간별로 온도를 조절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내 기준으로 보면 시댁은 겨울에도 춥고 여름에도 춥다. 어느 한 여름날,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내 기준 더운 거면 진짜 더운 거임) 그만 방심하고 반팔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시댁엘 갔다. 현관문을 열고 시댁에 발을 들이는 순간, 어머 깜짝이야! 나는 냉동창고에 온 줄 알았다. 나는 추워도 너무 춥다고 생각했는데 시댁 식구들은 태연하기만 했다. 실내가 너무 추워서 나는 해가 쨍쨍한 밖을 오가며 체온을 조절했다. 나 혼자 양서류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내 사정을 딱하게 본 남편이 실내 온도를 25°c로 올려버렸다. 그런데 어느새 알아챈 시아버지가 자신은 주방에서 요리를 해야 한다고 실내 온도 선택권을 주장했다. 시아버지의 맛난 요리를 먹기 위해서 나는 과감히 양보했고 시어머니의 점퍼를 빌려 입는 걸로 합의를 봤다. 시댁에서는 늘 시아버지가 요리를 하기 때문에 실내 온도 18°c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노바스코샤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에 캐나다에서도 소문난 여름 휴양지다. 캐나다 내륙의 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대서양 바닷가를 찾아온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바다에 첨벙첨벙 들어가서 수영을 한다. 나는 찬물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신기하기만 하다. 바닷물이 차가워서 겨우 발만 담그는 나를 15년째 놀리는 시아버지는 바닷가에 갈 때마다 나를 바다에 빠뜨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아직껏 대서양 바닷물에 몸을 담근 적이 없다. 온 가족이 다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갈 때도 나는 시아버지를 피해 멀리 떨어져 있곤 한다. 물론 시아버지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면 나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간다. 도망가지 않으면 차가운 대서양 바닷물에 빠지게 될게 뻔하다. 한국의 바닷물이 얼마나 따뜻한지 시아버지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대서양 바다를 사랑하는 시아버지의 여름 취미는 요트 세일링 sailing이다.


노바스코샤가 고향인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결혼과 동시에 북쪽 래브라도에 있는 직장에 취직을 했고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광산 지대인 래브라도의 척박한 환경과 혹독한 겨울 날씨를 견디며 은퇴 후 고향인 노바스코샤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두 분은 은퇴를 했고 희망대로 노바스코샤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왕성한 취미 활동이 시작되었다.

시아버지는 경비행기 활주로를 만들려고 일부러 넓은 땅을 사서 이사했다. 당신의 오랜 꿈인 비행기 조종사가 되려고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실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트랙터로 정원을 밀어 버리고 100m에 달하는 활주로도 미리 닦아 놓았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계획은 시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당시 60세를 훌쩍 넘긴 연세의 시아버지 건강 상태로 비행 훈련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논란의 핵심이었고, 사고라도 나는 경우에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 뻔하다며 온 가족이 시아버지를 뜯어말렸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캐나다라고 알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이때만큼은 온 가족이 근심과 걱정을 토로하기 바빴다. 결국 시아버지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시어머니의 오랜 설득으로 그는 경비행기를 사는 대신 요트를 샀다.


시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요트와 함께 자랐다고 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세일링 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랐기 때문에 따로 항해 기술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만 디지털화된 기계 장비에 대한 공부를 따로 받았다. 새로 산 시아버지의 요트는 이름이 따로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아빠의 장난감'이라고 불렀다. 시아버지는 여름 내내 요트에서 살다시피 했다.

요트 세일링은 바람의 역할이 9할이다. 그런데 바람이 늘 원하는 방향으로 불어 주는 것은 아니다. 나야 세일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는데도, 선장과 선원이 바삐 움직이는 걸 보면 항해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배가 가야 할 방향과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을 때, 배의 추진력을 높이려면 돛을 잘 조절해야 한다. 줄을 감고 풀며 두 개의 돛의 각도를 조절하고, 때로는 돛을 접기도 하고 펼치기도 해야 한다. 차라리 보터보트를 타지 왜 이렇게 귀찮은 요트를 탈까 싶은데, 세이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또 다른가 보았다. 바람을 길들여서 항해를 한다는 것이 세일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일링을 좋아하는 시아버지라도 혼자 하는 항해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세일링에 숙련된 사람이라면 혼자서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한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보통은 위험하기 때문에 단독 세일링을 하지 않는다.

키를 잡은 시아버지가 선장이 되고 시어머니, 혹은 내 남편이 선원이 된다. 정해진 선원은 없다. 그날 요트에 탑승한 사람 중,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선원이 되어야 한다. 내가 선원에서 제외된 이유는 간단하다. 시아버지의 래브라도식 사투리 영어 발음을 못 알아들 어서였다. 긴박한 선장의 지시에 재빨리 반응하지 못한다면 배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선원의 민첩성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시아버지의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장과 선원이 바삐 움직이는 요트에서도 공주처럼 편안하게 앉아만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선원은 선장의 신호에 맞춰 돛 줄을 풀거나 감아야 한다. 바람이나 배의 방향이 바뀌면 신속하게 돛의 방향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요트에는 돛을 조절하는 밧줄이 아주 많다. 자칫 잘못하면 몸의 일부가 밧줄에 감겨서 살이 찢어지거나 잘려 나갈 수도 있다. 해적영화에 나오는 선원들이 험상굿은 흉터가 많았던 것은 공연한 설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귀찮고 위험한 세일링이 왜 좋은 걸까?

바람만 잘 받는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항해가 시작되었다. 요트 세일링의 묘미는 조용함과 평화로움이다. 엔진소리 요란한 모터보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있었다. 빠르게 항해하는 요트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배가 물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배는 빠르게 나아가는데 엔진 소리 대신 바람소리와 찰랑이는 파도소리만 들리니까 처음에는 비현실처럼 느껴졌었다. 눈앞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뿐이고 귀에는 파도소리, 그리고 피부를 스치는 싱그러운 바람, 이것은 고요함, 평온함, 그 자체였다. 문제는 바람이 늘 원하는 대로 불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람이 없으면 요트는 한없이 느리고 답답해진다. 요트에도 작은 엔진이 달려있어서 배를 정박하고 출항시킬 때 사용한다. 바람이 없어서 코앞에 있는 건너편 항구까지 작은 엔진으로 힘겹게 갔었던 기억이 있다. 시아버지의 폼나는 요트도 바람이 없으면 통통배 신세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직 요트에서 1박을 해본 적 없는데 배 위에서 맞이하는 밤은 환상적이라고 들었다. 세상은 온통 밤하늘의 별들과 파도 소리뿐이라고 했다. 시부모님들과 시누이 가족들은 종종 요트를 몰고 나가서 몇 밤을 배에서 보내기도 했다. 요트에는 침실과 화장실, 주방, 거실이 있지만 대부분의 공간이 비좁아서 불편하긴 하다. 비좁은 배안에서 먹고, 자고, 화장실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흔들리는 배안에서 밤새 뱃멀미를 할지도 모른다. 겪어본 사람은 뱃멀미가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알 것이다. 멀리를 잘하는 나 같은 집순이에게 세일링은 불편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레저가 아닐 수 없다.

여름이 짧은 노바스코샤에서 요트는 물보다 땅 위에 있는 날이 더 많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그림엽서 같은 데서 보아온 풍경, 수많은 요트가 일 년 내내 줄지어 정박해 있는 아름다운 선착장의 풍경은 아마 지중해나 캘리포니아 쯤되는 따뜻한 지역일 것이다. 노바스코샤에서는 물이 얼기 전에 기계를 이용해서 요트를 땅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요트를 정박하고 관리를 책임지는 요트클럽의 연회비만도 적지 않게은 것으로 알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세일링에 열정이 없다면 지불하기 쉽지 않은 비용이다. 나는 시아버지 덕분에 해마다 공짜 세일링을 즐길 수 있어 감사할 뿐이지만 어쨌든 요트는 '아빠의 장난감' 치고는 갖고 놀기 참으로 귀찮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게 사실이다. 집순이는 이해하기 힘든 시아버지의 여름 취미다.



해마다 여름이면 남편은 캠핑을 떠난다. 일 년 내내 기다려 온 남편의 가장 큰 여름 행사다. 장소는 <본 포르타지 아일랜드 Bon Portage Island>(줄여서 BP섬)다. 매 해 같은 장소로 가지만 남편은 한결같이 아이처럼 좋아한다. BP섬은 노바스코샤 서남쪽 쉐그 하버 Shag Harbour 근처의 무인도다. 사람이 살지 않지만 버려진 무인도는 아니고, 조류 보호 구역으로 특별 관리를 받는 섬이다. 이 섬은 도요새, 물오리, 맹금류 등 이동하는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생태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제적으로 지정된 조류 보호 구역이다.

우리가 울프빌 살 때 음악 파티를 자주 열던 이웃 M 씨는 생태학자이자 이 섬의 관리자이다. 특별 관리를 받는 섬이다 보니 반듯이 관리자의 허락이 있어야 섬에 입도할 수 있다. 섬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M 씨가 모는 배를 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캡틴이라고 불렀다.

BP섬에 들어가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섬에는 생태 연구자들이 먹고 잘 수 있는 오두막이 있긴 하지만 수도와 전기 시설이 없다.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도 없다. 화장실은 천연발효 방식의 친환경 재래식이다. 섬에 입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먹을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생수를 꼭 가져가야 한다. 섬에서는 정해진 장소에서만 불을 피워 요리를 할 수 있고 발생한 쓰레기는 남김없이 섬 밖으로 되가져 나와야 한다. 섬 안을 함부로 헤집고 다녀서도 안된다. 새를 쫓을 우려가 있어서 반려견은 출입금지다.

여름이 오면 잠시 BP섬이 열린다. 물론 아무나 입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듯이 캡틴의 초대가 필요했다. BP섬에서 사람들은 매일 밤 장작불에 고기를 굽고 기타, 바이올린, 아코디언, 하모니카 (캡틴의 기가 막힌 하모니카 연주!) 연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며 여름밤을 즐겼다. 별빛과 파도 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그리고 음악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나 낮에는 노동으로 섬을 즐기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쓰레기를 청소했고 새로운 화장실을 만들었다. 부서진 선착장을 고치기도 하고, 몇 년에 걸쳐 작은 오두막을 하나 더 짓기도 했다. 남편은 가지고 간 텐트 방수천막을 오두막을 짓는데 썼다면서 자신의 오두막 지분을 강조하곤 했다. 이렇게 BP섬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철새처럼 해마다 섬에 들러 행복한 기억을 만들었다.

나도 신혼 초에는 남편을 따라 두 번이나 BP섬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섬에 가지 않는다. BP섬의 캠핑은 한국에서의 캠핑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캠핑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살 때 몇 번 경험했었다. 불편하긴 해도 할만했었다. 그런데 BP섬에서 한 캠핑은 그야말로 <쌩야생>이었다. 며칠 동안 땅바닥에 텐트를 치고 자는 것은 그렇다 쳐도 씻지 못하는 고통은 참기 어려웠다. 바다 수영 후 가져온 생수로 살짝 세수만 했다. 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야생인이 되어야 했다. 그나마 BP섬은 위협적인 야생동물이 없어서 다행이다. 곰이나 늑대가 나오는 숲 속 캠핑이라면 불편에 더해서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어느 정도 야생에 적응한 사람만이 BP섬에서 아름다운 여름밤을 보낼 자격이 있다. 나는 '자격미달'이 확실했다.

일 년 내내 BP섬 캠핑만 기다려 온 남편은 신이 나서 짐을 챙겼다. 캠핑용 나이프는 언제나 준비물 목록 1순위였다. 섬에는 위험한 야생 동물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섬에 들어가면 남자들이 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녔다. 크기와 모양은 모두 제 각각 달랐다. 남자들은 요리를 할 때 차고 있던 칼을 꺼내서 고기를 썰고 사과를 깎았다. 나무를 쪼갤 때도 썼고 땅을 팔 때도 썼다. 선착장을 고칠 때도, 화장실을 고칠 때도 허리춤의 그 칼을 꺼내 썼다. 허리춤의 칼은 만능으로 쓰였다. 남자들은 길을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도 허리춤의 칼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캠핑 때문에 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칼을 허리에 차고 싶어서 캠핑 오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팬데믹 기간 동안 섬을 방문할 수 없었던 까닭에 팬데믹이 끝난 직후 캡틴의 초대를 받은 남편은 몹시 흥분했었다. 그는 제일 먼저 캠핑칼부터 챙겼고 평소에 안 하던 허리띠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며 며칠 동안 샤워를 안 해도 되니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남편이여! 그대에게 잠시 쌩야생을 허하노라!


노바스코샤의 여름은 짧은 만큼 바쁘다. 여름의 시작과 동시에 온 세상이 화들짝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미루어둔 공사가 시작되고, 겨울 내내 주차되어 있던 옆집 캠핑 트레일러는 분주하게 오고 간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동네 여기저기에서는 잔디 깎는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방학을 한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마당을 뛰어다닌다. 캐네디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여름을 즐기는 듯하다.

캘거리에 사는 시누이네 가족들은 반려견까지 데리고 노바스코샤에 여름을 보낸다. 바다가 없는 캘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카들은 노바스코샤의 여름학교에서 '요트' 수업을 듣고 있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요트를 조정하는 선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시누이가 차가운 북대서양 바닷물에 비키니차림으로 뛰어드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바닷물에만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 바다로 강으로 호수로 수영을 하러 다닌다. 참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여름을 즐긴다.


나는 아직까지도 여름이 조심스럽다. 수영도 못하고 벌레도 싫다.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고 놀아 본 적이 없어서 여름 놀이에 영 서툴다. 나는 사실 계절에 상관없이 그냥 집에 만 있어도 좋다. 우리 집은 목조주택이라 아무리 더워도 내게는 집안이 제일 시원하다. 한여름이라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내게는 필요 없다. 창밖으로 새소리 들리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면, 집안에 있어도 여기가 캠핑장이고 여기가 천국이다 싶다. 캐네디언의 야생 캠핑에는 적응훈련이 필요한데 나는 아직 그 훈련을 할지 말지 고민 중이다. 이민자인 내게는 캐나다에서 사는 것 자체가 캠핑 같은데 따로 훈련을 더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한국의 아파트에서 살 때에 비하면 노바스코샤 내 집은 조금 세련된 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따로 캠핑을 갈 필요가 내게는 없다. 매일 아침 눈떠서 이미 잔뜩 생긴 기미와 잡티지만 더 이상 생기지 말라고 선크림을 꼼꼼히 발라 주는 것으로 야생적응 훈련을 대신할까 생각 중이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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