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와서 처음 갖은 내 직업은 '베이비시터 Babysitter'였다. 오래전의 일이었다. 울프빌로 이사 가자마자 아이 돌보미를 구한다는 지역신문 구인 광고를 봤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이 돌보는 일에 자신은 있었지만 역시 영어 실력이 문제였다. 가뜩이나 어눌한 발음으로 아이들과 잘 소통이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일단 면접을 보기로 했다. 영어에 자신도 없고 길도 서툴렀던 나는 상대 쪽에 양해를 구한 후 남편을 데리고 면접을 보러 갔다. 감사하게도 아이들 아빠가 남편과의 동행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아이들의 엄마가 아파서 아이 돌보미를 구한다는 사연은 구인 광고를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
1월 중순의 햇살 좋은 날이었다. 면접을 위해 찾아간 그들의 집은 오래되고 커 보였다. 알고 보니 실제로 300 년도 더 된 집이라고 했다. 집 정원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우리를 맞아 준 아이들 아빠 B 씨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매우 정중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장작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났고 거실에서는 백합 향기가 났다. 해가 드는 거실 창가에 줄지어 선 화분마다 백합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이들 엄마 S 씨는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자주색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덮고 있던 담요에서 천천히 손을 꺼내더니 우리에게 손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어색하게 서로 통성명을 했다. S 씨는 병색이 완연한 마른 얼굴에 깊고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 아빠 B 씨가 꼬마 아이 둘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두 아이는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에 짙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따뜻한 곳에서 놀다 왔는지 아이들의 빰은 발그레했다. B 씨가 두 아들을 소개해줬다. 첫째 아이 M은 5살 7개월이었고, 둘째 아이 A는 2살 9개월이었다. 작은 아이는 아직 기저귀를 하고 있었다. 암 투병 중이라 대화가 힘든 엄마 S 씨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필담으로 면접을 시작했다. S 씨가 내게 궁금한 점을 종이에 적으면 B 씨가 그것을 나에게 읽어주었고, 내 남편은 옆에서 나의 어설픈 영어를 도와주는, 그런 아주 이상하고 어색한 면접이었다.
S 씨는 제일 먼저 나의 경력을 물어보았고 나는 한국에서의 내 이력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S 씨는 다시 한번 나에게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도 오래전에 한국에서 3개월 살았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한국살이 내용은 이러했다. 아시아를 동경했던 그녀는 한국의 C시에 영어 교사로 취업을 해서 갔었는데 원장이 월급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달엔 주겠지, 주겠지 하며 3개월을 기다려도 월급을 주지 않길래 그 길로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수년 동안을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공연히 얼굴이 벌게지고 부끄러웠다. 속으로 이 면접은 망했구나 싶었다. 한국에서 월급을 3개월치나 못 받은 경험이 있으니 한국사람을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C시의 학원 원장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S 씨는 미소를 지으며 손글씨로 이렇게 썼다. '나는 한국에서 3개월밖에 살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잘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S 씨에게 그렇게 말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웃으며 말을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망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S 씨와 B 씨 그리고 남편까지 합세해서 갑자기 한국 이야기를 하느라고 수다가 시작되었다. 캐네디언들은 대개가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하기를 좋아한다(특히 내 남편). 엄마 S씨도 오랜만에 한국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상대를 만나서인지 필담으로 내 남편과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한식 이야기, 궁궐 이야기, 아름다운 산과 강 이야기를 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같아 보였다. 면접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들의 대화가 재미없어졌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거실 한쪽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에게로 다가갔다. 두 아이 다 낯을 많이 가렸는데 기저귀를 찬 작은 아이 A는 제 형 등 뒤로 숨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작은 칠판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곁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같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집을 그리면 내가 색칠을 했고, 내가 꽃을 그리면 아이들이 색분필로 예쁘게 색칠을 했다. 우리는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칠판을 가득 채워 가고 있었다. S 씨와 B 씨, 그리고 남편은 아직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벽난로에서는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고 백합꽃 향기가 거실에 가득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엄마 S 씨가 나를 불렀다. S 씨 앞에 다가가자 그녀는 야윈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을 꼭 쥐고 그녀는 아주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을 잘 돌봐주세요. 부탁드려요"
나는 그렇게 이상한 면접을 이상하게 통과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 '베이비시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5년 동안 아이들과 내가 함께 만들어갈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에 대해서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의 아동보호법에 따르면 어린 아동은 반듯이 보호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법으로 정해진 나이 (만 12세 이하. 각 주마다 다름 주의)의 아동은 혼자 집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수이더라도 보호연령의 아이들만 집에 있게 하는 것도 안된다. 보호자 없이 아동이 공공장소에 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동을 방치하는 것은 모두 아동 방임죄에 해당되고, 방임 아동을 보고 신고하지 않아도 범죄가 된다. 캐나다는 이러한 아동보호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요즘이야 외국 생활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많다 보니 그런 실수를 하는 한국 이민자들이 없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아이들만 집에 두고 잠시 쇼핑을 다녀와서 아동방임으로 신고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실리곤 했었다. 잠시도 아이를 혼자 두고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보니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베이비시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 일은 주로 십 대 청소년들이 아르바이트로 많이 하는 일이다. 지인의 딸 J는 중학생이 되고 얼마 후 '베이비시터' 교육을 받았다고 내게 자랑을 했다. 이제 자기는 공식적으로 '베이비시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물론 베이비시터는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베이비시터 일을 원하는 청소년들은 간단한 안전교육, 아기 돌보는 법 등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돌봄이 필요한 아동의 부모가 원하는 방법대로 다양한 베이비시터의 역할이 있다. 놀아주는 시터, 양육하는 시터. 쉽게 설명하자면, 잠깐 와서 아이들과 놀아 주는 가벼운 시터가 있고,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양육해야 하는 보모와 같은 시터도 있다.
내가 베이비 시터 일을 시작하고 딱 2주가 지난 어느 날, 집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는 남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남편은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이들 엄마 S 씨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느꼈지만 남편의 입에서는 내 예상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흘러나왔다. 힘들게 입을 뗀 남편은 울면서 아이들 엄마 S 씨의 사망 소식을 전해 주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사망이라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S 씨는 하늘나라로 가기에는 너무 젊었고, 남겨진 아이들은 너무 어렸다. 엄마 없이 커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남편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기만 했다.
S 씨가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아이들 M과 A를 위한 특별팀이 꾸려졌다. 아이들의 아빠 B 씨를 필두로, 아이들의 외할머니 H여사, 아이들의 이모 K 씨, 그리고 내가 팀의 구성원이 되었다. S 씨의 장례를 마치고 나를 부른 특별팀원들은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해요. 우리와 한 팀이 되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며 부탁을 했다. 그들의 부탁은 정중했고 간곡했다. 그리고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을 돌보는 순번을 정하고 돌봄 시간표를 정리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빠 B 씨는 그의 집 이층 방 하나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육시설과 학교(만 5세부터 학교 감)에서 돌아오면 B 씨가 아이들을 돌보았다. 주말에 아이들은 이모 K 씨의 집에 가서 자고 왔다. 외할머니 H 여사는 종종 아이들의 저녁을 챙기고 잠시 놀아 주었다. 나는 B 씨가 출장을 가거나 운동을 갈 때 아이들을 돌보았다. B 씨는 일주일에 세 번 저녁시간에 운동을 갔고, 한 달에 두어 번 출장을 다녀왔다. 출판사 일로 해외 출장을 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날은 내가 아이들의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한동안 아이들은 물론이고 아이들 아빠 B 씨를 비롯해서 H여사, 이모 K 씨까지 모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황망함과 슬픔과 우울함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서로에게 조언하곤 했다. 우리는 정해진 순번에 맞춰 아이들을 돌보고 교대할 때 다음 순번 주자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서로를 격려했고 끈끈한 동지애를 쌓아갔다.
어린 A에 비해 만 5세를 넘긴 M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힘들어 보였다. 어린 동생이 엄마를 찾으면 몹시 화를 내곤 했다. 그 모습은 보기에 안쓰러웠다. 마치 자신의 슬픔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아이들을 달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몰래 돌아서서 눈물을 닦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아이들이 사는 집은 아주 컸다. 300살이 넘은 빅토리아풍의 우아한 목조주택이었다. 아래층에는 벽난로가 있는 넓은 거실이 있었다. 그 거실은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집의 거실보다 컸다. 서양의 흑백 영화에서 보면 사람들이 큰 거실에 잔뜩 모여 왈츠를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거실의 크기를 보면 단박에 이해가 될 지경으로 넓다. 거실 건너편에 주방이 있고 주방 옆에는 역시 벽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이 있다. 계단 옆으로 이어진 긴 복도를 따라가면 큰 서재가 나온다. 집에는 벽난로가 많았다. 서재에도 역시 장작 난로가 있었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B 씨의 서재답게 창문을 빼고는 사방이 모두 책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는데, 아이들의 손이 닫기 쉬운 아랫부분에는 동화책이 꽂혀있었다. 엄마 S 씨가 나를 채용할 때 제일 간곡하게 부탁한 게 'NO 텔레비전 시청'과 'NO 비디오 게임'이었다. 나는 서재에 수두룩하게 꽂혀있는 동화책 덕분에 텔레비전이나 게임기 없이도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S 씨가 일본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했었기 때문인지 서재에는 영어로 쓰인 일본 동화책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우리 전래 동화 중에 일본의 것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이야기가 많아서 놀랐다. 우리 전래 동화가 그쪽으로 건너 간 건지 일본의 것이 우리 쪽으로 건너온 건지는 몰라도, 캐나다에서 영어로 된 일본 동화를 읽는데 내가 아는 이야기라서 읽기가 수월했다.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다가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첫째 M이 내게 알려주었고 어설픈 나의 영어 발음도 고쳐주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M과 A도 같은 이야기 책을 수십 번 읽어 달라고 졸랐기 때문에 그들은 내용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틀리게 읽으면 아이들이 득달같이 바로 잡아 주었다. 제법 엄격해서 더욱 귀여웠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 갈수록 내 어눌한 영어 실력은 우리들의 소통에 큰 지장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집 뒤로는 작은 호수를 품은 농장이 있었다. 염소와 토끼, 오리, 닭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게 꾸며 놓았기 때문에 마을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M과 A와 농장을 산책하며 한국말로 동물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너무 쉽게 배웠고, 거의 복사기 수준으로 발음도 똑같이 따라 했다. 아이들은 특히 '나비'와 '토끼'라는 발음을 좋아했다.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도 '래빗 labbit이나 바니 bunny' 대신 '토끼'라고 할 정도였다. 습득능력과 활용능력이 너무 좋았다. 예를 들면 'There are two 토끼's over there'라고 말하기도 했다. 복수형 어미 s를 붙여가며 말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들을 보며 언어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느 날, 큰아이 M이 집안을 뒤져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색색의 손바닥이 여러 개 찍힌 커다란 도화지를 들과 와서 내 앞에 펼쳐 놓으며 말했다. '이거 봐요, 엄마가 만든 걸 내가 찾아냈어요' 자세히 보니 아빠 B, 엄마 S, 첫째 M, 둘째 A의 손바닥이 색색으로 찍혀 있었고 손바닥마다 글씨가 쓰여 있었다. S 씨의 필체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구나. 너희들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구나' 다행히도 엄마가 쓴 문장을 또박또박 읽어 나가는 첫째 M은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엄마의 손바닥 무늬에 자신의 손을 대보며 웃고 있는 동안 나는 살며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왔다.
S 씨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보니, 그녀는 아이들 곁을 떠날 준비를 해두었던 것 같았다. 암 투병 중임에도 틈틈이 책 읽는 목소리를 구식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두었다. 호흡이 편치 않아 느리기도 하고 중간중간 쉼이 많은 엄마의 책 읽는 소리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매일 밤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녹음테이프가 늘어져서 엄마의 목소리를 영영 못 듣게 될까 봐 무척 아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분, 혹은 15분, 이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듣다가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껐다. 아이들은 잠자리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야금야금 들었다.
S 씨는 아이들의 옷장 서랍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보기 쉽게 스티커를 붙여 두었다. 아직 글을 모르는 작은 아이 A를 위해서는 글씨 대신 그림을 그려 표시해 두었다. 양말이나 속옷을 정리하기 쉽고 찾기 쉽게 해 놓은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킨 후, 헤매지 않고 재빨리 새 옷으로 찾아 갈아입힐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 꼭 해야 할 일들을 매일 상기시키고 다짐을 받아 두었나 보았다. M과 A는 입버릇처럼 '엄마가 이건 꼭 하라고 했어요' '엄마가 이건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엄마와 약속했어요'라고 말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철이 드는 것 같아 대견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봄이 되면 아이들은 '엄마의 정원 Mom's Garden'이라고 부르는 화단을 정성껏 가꾸었다. 화단에는 S 씨가 생전에 심어 놓은 애플민트, 로즈메리, 라벤더, 금잔화, 모란, 튤립 등 갖가지 허브와 꽃나무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좋은 화단을 차지하려고 옥신각신했다. 결국 현관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 '엄마의 정원'은 첫째인 M이 돌보기로 했고, 왼쪽은 둘째 A가 돌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서로 자기의 '엄마 정원'이 더 아름답다고 입씨름을 하기도 했다.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엄마 S 씨가 참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은 늦어도 오후 8시에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우리 특별팀 모두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노바스코샤는 여름에 9시가 넘어야 어둑해진다. 그래서 여름에 아이들을 재우려면 다른 때보다 더 애를 먹곤 했다. 침대로 가야 할 때마다 아직 밝은 데 왜 자러 가야 하냐며 투정을 했다. 8시에 잠들려면 7시부터 씻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혀야 했기에 나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항상 '밖에 아직 해가 있으니까 조금 더 있다 잘게요'라며 떼를 썼다. 그럴 때면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어 준다고 꼬드기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아이들이 씻고 침대에 누우면 나는 책도 읽어 주고, 옛날이야기도 해주고 자장가(한국 노래 불러 줌)도 불러 주었다. 그리고 8시가 되면 방을 나왔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잠이 들 때까지 침대 옆에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는데, 이모 K 씨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스스로 잠드는 연습도 필요하니까 시간이 되면 그냥 수면등만 켜놓고 나오라고 알려 주었다. 이모 K 씨는 초등학교 교사였기에 그녀의 말에 믿음이 갔고 아이들의 독립적인 수면 훈련도 필요하다는 부분에 공감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둘째 A가 기저귀를 뗐다. 그런데 자신의 '고추(성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모 K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어눌한 영어로 아이가 알아듣게끔 '고추'의 소중함을 설명하는 게 자신이 없었다. 나의 도움 요청을 듣자마자 이모 K 씨는 어린 A의 눈높이에 맞게 자세를 낮추고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봐. 너 커서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지? 아빠가 되려면 고추가 꼭 있어야 하는 거야. 그게 고장 나면 아빠가 될 수 없어. 지금은 쓸모없는 것처럼 보여도 네가 크면 그것의 사용 방법을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될 테니까 지금부터 잘 다루어야 해. 함부로 만지지도 말고 함부로 꺼내 놓지도 말아야 해. 다른 사람이 네 것을 만지게 내버려 두어서도 안돼. 이 말을 명심해야 해. 알겠지?'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첫째 M이 알은체를 하며 끼어들었다.
"고추 속에는 아기 씨가 있어. 너도 학교 가면 배울 거야"
그 이후로 A는 자신의 고추를 소중하게 다루었다. 나는 이모 K 씨의 성교육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설명은 간결했으며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캐네디언식의 아동성교육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루는 첫째 M이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반의 E라는 친구는 엄마가 두 명이예요. 나에게 없는 엄마가 E에게는 두 명이나 있다니. 너무 부러워요"
아마도 E라는 친구는 동성 커플 가정의 아동인가 보았다. 동성 결혼이 합법인 캐나다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린 A 가 말했다.
"난 아빠가 둘이면 좋겠어"
그러자 M이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빠한테 다른 아빠와 결혼하라고 하자"
나는 웃으며 듣고 있었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한쪽으로 치우친 편협한 사고를 가르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좋은 생각이구나. 그런데 너희 아빠가 다른 아빠를 좋아할지는 모르겠구나. 그건 너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아빠의 결혼은 아빠에게 맡겨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치?"
다행히 아이들은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함께 뒹굴며 놀고, 뛰고, 싸우고, 삐치고, 웃고, 울며 우리는 5년여의 시간을 함께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읜 둘째 A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고, 첫째 M에게도 엄마를 기억해 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한 번은 A가 동화 속 다정한 엄마의 그림을 보며
"엄마는 다 민재를 닮았어"라고 했다.
A의 말은 너무 슬프고 안타깝게 들렸다. 이 아이가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나는 창틀에 놓여 있는 S 씨의 사진을 들고 왔다. 사진 속의 S 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잘 보렴. 네 엄마는 눈이 아주 컸고 미소가 아름다웠단다. 젊고 똑똑한 분이셨어"
그날 밤, 우리는 각자가 기억하는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엄마가 조금씩 잊히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마음이 더욱 아팠다.
다행히 아이들은 명랑하고 밝게 컸다. 감사하게도 예의 바르고 공부도 잘했다. 그동안 아빠 B 씨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S 씨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만에 재혼을 한 것이었다. 이제 M과 A에게는 새엄마가 생겼고 동생도 생겼다. 그들은 여전히 300살이 더 된 크고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다.
어느덧 M은 17살, A는 15살이 되었다. M과 A는 내가 5년 동안 사랑으로 키운 나의 아들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M은 내 아들과 생일이 같다. 이쯤 되면 우연보다 더 큰 의미를 두어도 될 것 같다. 두 아이들을 만난 것이 내가 캐나다에 온 이유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내게 여전히 귀엽고 어린 작은 천사들이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조금 슬펐지만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