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만난 후 나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한국에서 살 때는 전 세계 영어권 나라에서 온 영어교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듣기에도 그들의 영어 발음이 조금씩 달랐다.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이 다르다는 것은 흔히들 알고 있는 것이라 놀랍지 않았지만,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시골 사투리 발음은 거의 영어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라서 깜짝 놀랐다. 한 번은 어떤 영국 시골 출신의 청년이 대화 중에 내게 ‘아조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염치 불구하고 몇 번을 다시 물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내게는 ‘아조다’로 들릴 뿐이었다.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종이와 펜을 내밀며 써보라고 했더니 글쎄 ‘Enjoy that’ 이거였다. 알고 보니 원어민 교사들도 수업 중에는 표준어로 말하지만 술 마시고 놀 때는 자연스럽게 고향 사투리가 나온다고 했다. 심한 영어 사투리는 같은 영어권 사람들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고 했다. 하기야 같은 한국말인데도 제주도 사투리는 딴 나라 말처럼 들리니까 영어라고 그런 사투리가 왜 없겠는가. 그러니 원어민들이 강조하듯이 영어발음에 너무 예민하게 굴 일은 아니었다.
이민자들의 나라 캐나다로 이민 온 후에는 국적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나는 이민 초기에 3개월 동안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영어학교를 다녔다. 이민자와 난민을 위한 무료 영어 학교였으며 인종과 국적, 종교 등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반에는 나를 포함해서 한국사람이 3명이나 있었고 이란, 중국, 대만, 일본, 러시아, 쿠바, 베트남, 네팔, 콩고에서 온 사람과 내가 국적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아랍, 아프리카, 남미, 유럽 등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20명 조금 넘는 인원이지만 작은 지구촌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어 학교에 간 첫날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학급 동료들과의 의사소통의 너무 어려웠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보니 의사소통은 영어로만 가능했다. 그런데 학급원들의 영어에는 각 나라 특유의 억양이 섞여 있다 보니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더구나 나는 캐네디언 남편 덕분에 완벽한 캐네디언 발음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도 어찌어찌 되묻거나 귀 기울여서 소통을 할 수 있었는데 유독 알아듣기 힘든 영어 억양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사람, 베트남사람들이었다. 성조가 있는 그들의 모국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특히 내 짝이었던 베트남인 W 씨는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내게 질문을 속사포처럼 하는데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의 영어에는 베트남어에 있는 6 성조가 다 섞여 있었다.
우리 학급의 콩고 민주공화국 출신 H 씨는 난민이었다. 불어를 사용하는 콩고인이 불어를 쓰는 퀘벡으로 가지 못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노바스코샤로 온 데에는 가슴 아픈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마을에 들이닥친 무장한 사람들에 쫓겨서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에 슬리퍼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고 했다. 며칠 밤 낯을 걷고 걸어서 겨우 유엔 사무소에 도착했지만 난민 신청을 한 그에게는 여유롭게 희망 국가를 선택할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마을을 떠날 때 총상을 입은 그의 어깨 부상이 심각해져서 수술이 필요했는데 마침 난민을 실은 다음 비행기가 캐나다 노바스코샤행이었기에 급한 데로 그 비행기를 타고 노바스코샤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노바스코샤주에 배정된 난민들이었기에 다른 주로 이동, 정착할 수 없없다고 했다. 그는 캐나다에 도착해서 어깨 수술을 받았지만 한쪽 팔의 장애를 피할 수는 없었다. 말이 없고 과묵했던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뿐이라고 했다. 그는 좀 울먹울먹 한 표정의 선한 눈빛을 가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보다 더 추위를 타서 실내에서도 항상 두꺼운 외투를 벗지 않았었다. 불어 발음이 섞인 그의 영어는 유난히 굵고 낮은 그의 목소리 때문에 더욱 우울하게 들리기도 했다.
네팔에서 온 청년이 있었다. 키가 작고 말랐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의 눈빛은 검푸르게 빛났다. 이민 오자마자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해맑게 웃었고 돈을 모아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캐나다로 데려오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보면 히말라야가 떠오르곤 했다. 식당일을 하느라 이따금 결석을 하기도 했지만 출석하는 날에는 검푸른 눈을 반짝이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하는 그의 영어에는 하루빨리 캐나다 시민권을 따서 가족들을 초청하고 싶어 하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
아프리카 출신의 수다스러운 청년이 있었다. 그는 늘 쾌활하게 수다를 떨곤 했다. 입속에서 혀를 끌끌 차는 듯한 소리가 종종 섞여 나오는 그의 영어는 신나는 박자와 장단을 가진 아프리카 전통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야기 도중 제 흥에 못 이겨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했다.
처음에는 각 나라 특유의 억양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던 영어가 한 달쯤 지나니까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영어 실력이 향상된 것도 물론 한몫을 했을 테지만 무엇보다 눈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각 나라 별로 특정 자음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모음의 소리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내 귀가 척척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역시 언어는 발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통의 문제였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개떡 같은 발음도 찰떡같이 알아듣게 된다. 언어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 잠실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다. 역사와 전통은 짧지만 신흥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소위 SKY라는 명문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했기에 강남 8 학군 중에서도 평판이 좋았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한민국에 자유화 바람이 불었다. 새롭게 들어선 신군부 세력은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의도적으로 '자유'를 강조했고 교육현장에도 '자유'를 반영하려고 기를 썼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복자율화’ ‘두발 자율화’가 실시됐었다. 나는 비싸게 맞춘 교복을 단 1년밖에 입지 못한 세대가 되었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이름 으로 새롭게 시도된 것이 또 있었다. 바로 '이동수업'이었다. 대학교처럼 학생들이 교과의 교실을 찾아 이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반 선택의 자율권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성적과 등수로 반이 나뉘었다.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었다. 줄여서 ‘우반’ ‘열반’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심각한 ‘야만적 정서 학대’ 교육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우등반과 열등반이라니! 교육당국이 경쟁을 부추기는 학습 분위기를 교정하지는 못할 망정 가뜩이나 성적이 부진해서 속상한 소녀들에게 ‘열등생’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다니! 게다가 교사나 학생 모두 당연하게 ‘야 열등생!’ 이렇게 불렀으니 정말 심각한 정서 학대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어 수학 모두 열등반이었다. 200% 예술, 문과형 두뇌를 가진 내게 수학은 외계언어 같기만 했고, 영어와는 영 친해질 수 없었다. 고1 때 나의 담임교사는 영어 담당이었다. 첫 학기 첫 시험을 끝낸 어느 날, 나를 과학실로 부른 담임은 무작정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대걸레 자루로 내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통 영문을 몰라서 얻어맞으면서 간신히 왜 때리냐고 물었다. 담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밖이었다. 첫 시험을 보고 난 후의 성적이 입학 때 성적보다 떨어져서 맞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때는 고교입학 국가고시가 있었다. 입학 때 보다 입학 후 시험 성적이 더 떨어진 건 알았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가 성적 때문에 맞아야 한다니, 세상에 맙소사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성적 때문에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서 맞아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다. 그 담임은 한국 최고의 명문여대 영문과를 수석 졸업했다고 소문이 자자 했었다. 나는 그날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교사의 자질에 몹시 실망했고 담임에 대한 복수심으로 영어책을 덮어 버렸다. 방과 후에는 그림을 그리고 소설책을 읽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소설책을 많이 읽은 덕에 다행히 국어와 국사 성적은 좋았다.
나는 나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영어 수업, 수학 수업을 듣기 위해 ‘열등생 반’을 찾아가야만 했다. 갈 때마다 내가 과연 열등생인가? 반문하곤 했었다. 나는 사람을 우열로 구분하지 말라고 배웠는데 내가 배운 것은 허상인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 당시에 한 학급에 60명에서 70명 정도 있었으니 적어도 한 학급에서 30여 명 정도는 열등생이 되어야 했다. 학급 인원의 반 수는 창피와 좌절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인데, 참으로 원시적인 교육방침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수업을 들으러 열등반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학과 영어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지한 20세기 교육정책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내가 영어와 수학을 싫어하게 된 데는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 크다.
캐나다를 찾아온 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내 남편의 직업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말고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라고 남편에게 당부한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즐겁게 영어를 익힐 수 있지 않겠는가. 나처럼 영어선생이 미워서 영어 공부와 담을 쌓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영어 울렁증’은 잘못된 영어 교육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적으로 줄 세우고 우열을 가리는 영어 공부 말고, 좀 더 재미있고 친근한 인문학적 접근으로 교육을 했다면 아마도 영어 울렁증 환자의 수는 현저히 낮아졌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남편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참 다양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국적만큼 각양각색의 사연이 있었다. 전쟁으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유학생들이 난민 신청을 하는 경우는 여러 번 보았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하루는 남편이 교실에 들어갔더니 중동식 머리카락 가리개인 <차도르>를 쓴 낯선 숙녀가 앉아 있더란다. 교실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선생님 저는 이 반의 학생 A예요. 남편의 허락을 받고 니캅을 벗게 되었어요"
라고 했단다. 알고 보니 눈만 빼고 온몸을 가리는 중동식 쓰개치마 같은 <니캅>을 착용했던 학생이 머리카락만 가리고 출석을 했던 것이었다. 그날은 남편과 학급 친구들이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날이 되었고 그녀에게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니캅없이 외출한 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입모양을 보며 발음을 고쳐줄 수 있게 되었다며 남편은 좋아했었다.
남편이 박사 논문을 쓰는 튀르키예 ( (구) 터키)에서 온 학생 S 씨를 한 학기 동안 담당한 적이 있었다. 남편에게 내 아내가 한국사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학생은 ‘오! 형제의 나라!’ 라며 반가워했다고 했다. 그 후에 나는 그 튀르키예 학생의 아내 Y 씨를 소개받았고 우리는 제법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두 명의 어린아이들이 있다. 우리 부부는 그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바닷가로 놀러 다니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학위를 따고 튀르키예로 귀국했지만 그들 가족은 이런저런 이유로 종종 핼리팩스에 들르곤 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친구처럼 친근하고 반갑다. 특히 한국에 대한 형제애가 남다르다. Y 씨와 나는 영어로 소통하는데 우리는 둘 다 영어가 서툴렀다. 예전에는 더듬더듬 답답하게 이야기를 했었는데 요즘은 인터넷 번역기가 잘 발달되어서 그 덕을 톡톡히 본다. 튀르키예말로 하든 한국말로 하든 상관없이 번역기가 알아듣게 번역을 해 준다. 오래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렇지만 역시 수다는 내입으로 직접 해야 제맛이다. 다행히 Y 씨와 나는 만날 때마다 우리들의 영어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행복했다. 역시 수다는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선생이다.
캐네디언 남편을 만나기 전에 영어는 내게 상관없는 먼 나라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과 결혼 후, 특히 캐나다로 이사한 후에는 ‘영어’에 대한 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내속에 가득하다.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학창 시절에 대한 후회, 좌절과 열등감만 안겨주었던 20세기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실망과 분노,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의 장점에 대한 흠모와 경외심, 열등감, 남편과 농담하며 깔깔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준 영어를 통한 감정의 교류, 영어가 통용되는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안타까움과 간절함 등등 수많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갖게 해주는 대상이 바로 영어다. 그야말로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두 개의 내가 존재한다. 한국말을 하는 수다스러운 나와 영어를 하는 과묵한 내가 있다. 나는 아직도 영어를 말하려면 머릿속에서 번역기를 작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어를 하는 나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과묵할 수밖에 없다. 답답할 때도 많지만 반대로 순기능도 있다. 침묵의 소중함을 알았고 열등감과 결핍 때문에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한다는 것도 순기능에 속한다고 본다. 사랑하고 증오하는 영어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이민자의 운명이다. 착잡한 심정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