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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결혼식에 초대받았는데 왜 등산을 해?

민재 미첼 mj mitchell

24. 결혼식에 초대받았는데 왜 등산을 해?


남편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이킹 준비를 했다. 집안에서 러닝머신(treadmill) 위만 걷던 내게는 더욱 특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이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꼼꼼히 확인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각자의 배낭에 간단한 먹거리와 물병을 챙기고 갈아입을 옷을 구겨지지 않게 잘 접어 배낭에 넣었다. 남편은 하이킹화를 신었지만 나는 끈 없는 워킹화를 신었다. 남편이 내게도 하이킹화를 권했지만 ‘비교적 평탄한 걷기 좋은 길’로 되어 있다는 S의 말을 떠올리며 걷기 편한 운동화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의 결혼식장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신랑과 신부는 예정대로 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결혼식 장소는 <케이프 스플릿 Cape Split>이다. 노바스코샤에 이민 온 지 십여 년이 넘은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주립공원으로 지정된 <케이프 스플릿>은 일명 노바스코샤의 꼬리라고도 불린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펀디만 Bay of Fundy>의 바닷물이 바위 절벽을 깎아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 곳이다. 꼬리처럼 휘어져 나온 절벽의 끝부분이 조각나서 몇 무더기의 작은 섬처럼 바다에 떠있다. 이 케이프 스플릿 풍경은 <페기스 코브의 등대>와 함께 노바스코샤의 상징이기도 하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M과 신부 S는 이 멋진 장소를 자신들의 결혼식장으로 정했다.

케이프 스플릿 Cape Split

우리 부부는 하이킹 트레일 입구의 주차장에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객들은 일일이 악수를 하며 통성명을 했다. 신랑 신부를 포함한 30여 명 쯤되는 결혼식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배낭을 메고 신발 끈을 조여 맸다. 남편의 친구 P가 나의 워킹화를 보며 걱정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부 S가 한 말 ‘평탄하고 걷기 좋은 길’이라는 말이 여전히 나를 안심시켰다. 본격적으로 하이킹을 시작하기에 앞서 신랑 신부와 하객들은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사람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산악 동호회로 보일 뿐이지 결혼식 참석을 위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그날의 주인공 신랑과 신부도 등산복을 입고 배낭을 메고 있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하이킹이 시작되었다. 걸음이 느린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서둘러 출발했다. 주차장을 벗어나서 조금 걷다 보니 산길이 온통 진창이었다. 최근 며칠 동안 비가 오락가락했기에 길이 온통 진흙 천지가 되어 있었다. 끈이 없는 내 워킹화는 진흙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바닥은 미끌거렸고 진흙이 묻어 무거워지면 훌렁훌렁 벗겨지기도 했다. 남편과 P가 보낸 걱정의 눈빛이 생각나면서 그제야 하이킹화를 신지 않은 후회가 밀려왔다. 경사가 가파른 진흙길을 만나면 후회가 더욱 깊어졌다. 이 미끄럽고 가파른 길을 왕복으로 14km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신부 S가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하며 예식장까지 가는 길이 ‘비교적 평탄하고 걷기 편한 길’이라고 말할 때 나는 머릿속으로 아름다운 산책길을 떠올렸었다. 바닥에는 보행에 알맞은 나무 데크가 깔려 있고 중간중간 나무 계단이나 돌계단이 있는 그런 산책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나의 오해였다. 케이프 스플릿 하이킹 트레일은 날 것 그대로의 흙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단도 없는 흙길이었다. 그냥 야생이었다. 가파른 길을 돌무더기나 흙무더기를 밟고 올라야 했다. 취미가 하이킹인 S의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캐네디언이 하이킹 가자고 할 때는 ‘등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국어사전에서 ‘하이킹하다’의 뜻을 찾아보니 ‘심신의 단련이나 구경 따위를 목적으로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서 여행을 하다’라고 나온다.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서’라는 문장은 ‘가벼운 산책’의 의미를 풍긴다. 그렇다.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하이킹은 누가 들어도 ‘힘든 산행’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영어 사전에서 ‘Hiking’을 찾아보니 ‘두 발로 걸으며 하는 모든 여행’이라고 나온다. 즉 물리적 동력의 힘이나 밧줄 등을 이용하지 않고 두 발로 하는 ‘등산’이나 ‘등반’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 ‘Hiking’은 ‘등산’과는 다른 의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발로 산에 오르면 그것도 ‘Hiking’인 것이었다. 캐네디언들이 ‘하이킹화’라고 하는 것들이 한국에서는 ‘등산화’라고 불리는 이유를 그때야 알았다.


나는 결혼식장을 향해 계속 하이킹을 했다. 발은 자꾸 진창에서 허우적대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입고 온 바지가 흘러내렸다. 위수술을 한 후, 살이 빠져서 내가 가진 바지들이 모두 헐렁해졌다. 허리가 좀 커도 평소에 입고 다니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경사진 길을 오르려니 바지가 자꾸 엉덩이까지 흘러내렸다.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바지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미끄러운 길을 오르려니 땀이 비오 듯 쏟아졌다. 오랜만에 정성을 들여서 화장을 했는데 땀과 함께 줄줄 흘러내렸다. 게다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땅을 살피며 걷다 보니 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치료 중인 목디스크 증상이 심해져서 통증이 몰려왔다. 최악이었다. 이쯤 되니 ‘굳이 절벽 꼭대기에서 결혼식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터무니없이 힘든 예식장 가는 코스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 손을 잡아 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오를 수 있었다. 남편은 내 배낭을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했지만 나는 배낭을 내어주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내 몫은 내가 지고 가겠다는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미끄러운 신발과 흘러내리는 바지, 목의 통증과 배낭의 무게가 모두 고통이었다. ‘산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내 삶의 철학이 더욱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고행과 같은 등산을 하며 내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고 급기야 ‘젠장 뭐 이 따위 결혼식이 다 있담!’이라는 불평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남편이 아무리 잡아주고 끌어주어도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캐네디언들이 하나 둘 나를 추월해 갔다. 지친 기색 없이 나를 휙휙 추월하는 캐네디언들의 튼실한 허벅지가 부러웠고 그들의 건강한 척추가 부러웠다. 그날의 주인공인 신랑 M은 남편과 내가 낙오되어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된다며 우리를 뒤따르며 지켜주었다. 너무 힘들어서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를 응원해 주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발을 움직였다.

턱밑까지 숨이 차고 진흙 묻은 신발이 점점 더 무거워졌을 때, 이제는 정말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 졌을 때쯤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소식이 앞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케이프 스플릿!

케이프 스플릿 Cape Split

7km를 걸어 절벽 꼭대기에 도착했다. 2시간 정도의 산행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탁 트인 너른 풀밭이 있었고 그위에는 야생 풀꽃이 가득했다. 우리가 서있는 절벽은 푸른 바다로 사방이 포위된 듯 보였다. 눈앞에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절벽 끝, 바다 위에는 무리 지어 떠있는 작은 바위섬들이 보였다. 자칫 뻔하게만 보일 수 있는 바닷가 절벽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는 이 작은 바위섬들은 케이프 스플릿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에는 뉴브런즈윅주의 넓은 땅이 아득하게 보였다. 정말 절경이었다. 누구나 이 절경을 보는 순간 힘들여서 등산을 한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의 결혼식이라면 이해해 주기로 했다. 등산의 고단함이 가까스로 위로받는 순간이었다.

정상에 오른 하객들은 물을 마시며 잠시 쉬다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느새 간이 탈의실이 3개나 마련되었다. 던지면 펼쳐지는 탈의실용 텐트였다. 가져간 간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남편과 나도 옷을 갈아입었다. 산악동호회 같았던 우리들은 드디어 결혼식 하객의 모습이 되었다. 물론 도시의 하객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남자들은 등산할 때 입은 반바지나 등산 바지 위에 드레스 셔츠를 입었다. 주례를 맡은 P는 상의에 깔끔한 드레스 셔츠를 입고 양복 재킷을 걸쳤지만, 하의는 여전히 등산복 바지에 흙이 잔뜩 묻은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여자 하객들은 긴 드레스나 짧은 원피스를 입었고 샌들을 가져와서 갈아 신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처럼 흙이 잔뜩 묻은 신을 그냥 신거나 아예 맨발로 예식에 참석했다. 하객들이야 신을 신던 벗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의 발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바다를 닮은 푸른색 양복을 차려입은 신랑도 맨발이었다. 양말도 신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흰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입장할 때 살짝 들어 올린 치맛자락 밑으로 그녀의 맨발이 보였다. 화려한 웨딩슈즈를 신는 대신 맨발로 풀꽃 사이를 걸어 입장했다. 그날 내가 본 신부 S의 맨발은 그 어떤 신부의 웨딩슈즈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난생처음 보는 맨발의 신랑 신부가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아무 장식도 없는 절벽 위의 풀밭 결혼식장은 자유로운 그들에게 잘 어울렸다. 절벽 끝 쪽에 선 주례와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하객들은 반원형으로 둘러섰다. 야생 풀꽃이 결혼식장을 장식했고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축가를 대신했다. 산행을 할 수 없었던 연로한 가족들을 위해 결혼식은 휴대전화로 실시간 중계가 되고 있었다. 이날의 주례를 위해 ‘단기 주례 자격증’을 취득한 P에 의해 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간단한 주례사와 성혼선언과 키스,

결혼 서류에 사인하기 그리고 신랑 신부의 반지교환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모든 하객들에게 샴페인을 따라 주었고 다 함께 건배를 했다. 하객들 모두 진심을 다해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다. 예식은 간단하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사회자는 따로 없고 주례자가 진행, 주례, 법적 절차까지 도맡아서 했다. 하객들은 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은 후 풀밭에 앉아 가져온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나는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산길 7km를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가방을 뒤져 찾아낸 옷핀이 흘러내리는 바지의 허리춤을 단단히 고정해 주어서 다행이었지만, 여전한 목의 통증 때문에 하는 수없이 남편에게 내 배낭을 맡겼다. 배낭 두 개를 앞뒤로 지고 성큼성큼 걷는 남편이 고맙고 든든했다. 배낭이 없으니 목의 통증이 한결 잦아들었지만 미끄러운 진흙길은 내려갈 때도 무지하게 힘이 들었다. 조심조심 2시간여를 걸어 무사히 하산을 했다.

오후 8시에 결혼식 피로연이 식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등산으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피로연 참석을 포기하고 남편만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예식장에서 식을 마치고 하산 한 시간이 오후 3시쯤이었으니 하객들은 피로연이 열리는 8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집이 가깝거나 근처에 호텔을 잡아 둔 사람은 몇 시간 기다리는 것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하객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할지 난감할 것 같았다. 그런데 캐네디언 하객들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보였다. 남편은 피곤해서 끙끙대는 나를 집에 내려주고 피로연 참석을 위해 다시 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후, 피로연의 여러 가지 장면을 사진 찍어서 내게 보내주었다. 웨딩 만찬은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로 나왔고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 맛난 식사뿐 아니라 달콤한 디저트와 술과 댄스파티 등을 찍은 사진을 보니 나는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그날의 예식장 가는 코스는 춤 추기를 좋아하는 내가 댄스파티를 포기할 정도로 힘든 산행이었다.


신랑 M은 남편의 대학 후배이자 한 동네 이웃이었다. 그는 내가 만난 캐네디언 남자 중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잘 생겼고 더없이 친절한 남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애는 번번이 상처로 끝나고 말았었는데 역시 인연은 따로 있는가 보았다. M에게 드디어 임자 S가 나타났다. M과 S는 서로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고 그들은 여느 캐네디언 커플들처럼 사랑에 빠진 후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1년 여를 함께 한 그들은 결혼을 결심했고 케이프 스플릿을 예식 장소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캐네디언들은 동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진다. 이따금 결혼이라는 형식을 거부하며 혼인신고 없이 아이 낳고 평생을 함께 사는 커플도 있다. 2년 이상 동거한 커플은 ‘법적인 커플’로 인정되어 세금공제, 유산상속 등의 보장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는 가족관계 증명서 같은 공적 서류가 없는 대신 결혼식에서 사인한 혼인신고서가 거의 유일한 공적 서류다.

캐나다에서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결혼 전 쓰던 성(姓. family name) 대신 남편의 성을 쓰기도 하지만 요즘은 다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떤 가정은 남편과 아내, 아이들의 성이 각각 다르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의 성을 골고루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렇듯 자유로운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 캐네디언들은 예식에 대한 생각 역시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온전히 신랑과 신부가 되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주인공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식을 올린다. 축의금 문화가 없으니 정말 중요한 가족과 친구만 초대되고, 대부분의 식은 소박하고 검소하게 진행된다. 보통은 교회나 부모님의 집 정원에서 식을 올리기도 하지만 호숫가, 바닷가, 숲 등 어디라도 신랑 신부가 원하는 곳이면 결혼식장이 된다. 친구 J는 외딴섬 안에 있는 폭포수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의 여동생 H는 부모님 집의 정원에서 결혼했다. 나의 시동생 K는 신혼집 바로 옆에 있는 커뮤니티 센터를 빌려서 식을 올렸다. 따뜻한 하와이나 중남미의 나라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들도 많았다. 자메이카 여행 때 내가 탄 비행기에 함께 동승한 탑승객 중에는 구겨지지 않게 포장한 웨딩드레스를 가져가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자메이카 국제공항에서는 각국에서 온 웨딩드레스를 옮기는 많은 사람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방에 구겨 넣을 수 없는 길고 풍성한 흰 드레스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다. 내가 도착한 자메이카의 바닷가 리조트에는 아예 결혼식 전용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세계 각국에서 온 커플들이 결혼식을 올렸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결혼식에 참석한 후 한가로운 휴가를 즐겼다.

서양의 결혼식도 한국의 결혼식처럼 1부 예식, 2부 피로연으로 진행된다. 한국은 편리하게 한 건물 안에서 예식과 피로연 혹은 식사를 다 할 수 있지만, 서양식 결혼식은 예식과 피로연이 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피로연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형편에 따라 간단한 다과만 제공되기도 한다. 예전에 초대받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식이 끝난 다음 남편과 나는 따로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은 후 피로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결혼식장에서 식권을 받고 바로 밥부터 먹으러 가는 한국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다. 캐나다 결혼의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신랑과 신부가 부담하기 때문에 철저히 그들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서 결혼식이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 대접이 빠진 결혼식도 흔히 볼 수 있다. 축의금을 낼 필요 없는 하객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초대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축하를 보낸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친구나 친척들이 신랑과 신부에게 선물을 한다. 반듯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정성을 담은 소박한 선물이어도 충분하다. 각자의 사정에 걸맞은 규모로 치러지는 결혼식은 개성적이고 자유로워 보였다.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진짜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본격 이벤트가 피로연에서 시작된다. 가족과 친구들이 차례로 신랑과 신부의 앞날에 대한 축복의 말을 전한다. 가족이라면 누구나 앞에 나와 사랑의 말을 전 할 수 있다. 엄마나 아빠가 결혼하는 딸에게, 혹은 결혼하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꼼꼼하게 적어와서 낭독한다. 나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신랑의 아빠와 재혼한 새엄마가 결혼식장에서 신랑에게 이렇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네 아빠와 사랑에 빠졌을 때 이 남자의 가족과도 사랑에 빠졌단다. 너를 사랑한단다. 행복하게 살렴’ 새엄마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이런 축하의 인사말을 할 때, 그 자리에는 신랑의 친엄마와 새아빠도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뻘쭘할 만도 한데 그날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따뜻했고 감동적이었다. 피로연에서 사람들은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코끝 찡해지는 감동의 장면도 자주 볼 수 있다.

모든 축하의 말들이 오고 간 후에 신랑과 신부의 춤이 시작된다. 서양의 결혼 문화에서는 이 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새로운 커플이 첫 춤을 출 때는 다른 사람들은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 신랑과 신부의 첫 춤이 끝나고 나면 그때서야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 본격적인 댄스파티가 시작된다.


남편은 한국의 예식장을 ‘결혼 공장 wedding factory’이라고 불렀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같은 건물 안에서 많은 커플이 결혼식을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과 내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남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결혼 공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야외 장소를 알아보았으나 당시 한국에서 야외결혼식장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겨우겨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호숫가 식당을 찾았고 사장님이 흔쾌히 결혼식을 도와주었다. 이후에 우리가 결혼한 야외식당은 국제커플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그곳은 국제커플의 예식장으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스몰 웨딩 small wedding’ 이 유행한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변화가 반갑고 좋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자신들의 개성에 맞게, 자신들의 사정에 맞게 식을 계획하고 진행한다는 것은 색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일이다.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자신들의 경제사정에 맞게 식을 치러야 새롭게 출발하는 신혼부부도 부담이 없지 않겠는가. 결혼식이라는 일회성 이벤트를 위해 빚을 졌다는 이야기는 이제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산이 되었다. 축의금을 많이 받기 위해 자주 만나지도 않는 동창이나 먼 지인을 초대하는 결혼식은 혼주나 하객 서로가 불편할 수도 있다.

결혼식을 어디서 어떻게 올리면 어떻고 또 안 올리면 어떠랴. 문제는 역시 결혼식 이후의 삶이다. 예식 자체는 일회성 이벤트 일 뿐이고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어떻게 보이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부부가 마음을 모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본질임을 이해한다면 천편일률적인 결혼식 문화가 좀 더 다양한 형식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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