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편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모두 핼리팩스에 살았다. 영어에는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따로 구분하는 단어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거나 설명을 할 때 외할머니는 ‘엄마의 엄마 mom’s mom’, 친할머니는 ‘아빠의 엄마 daddy’s mom’라고 한다. 그리고 외가는 ‘엄마의 가족 mom’s family’, 친가는 ‘아빠의 가족 daddy’s family’이라고 한다. 내 남편은 두 할머니를 구분하기 위해 외할머니는 그냥 ‘할머니 Grandma’ 라 불렀고, 친할머니는 ‘미첼 할머니 Grandma Mitchell’이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다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내가 처음 남편의 친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 중에는 이렇게 남다른 할머니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할머니 다움’을 철저히 장착하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다며 손주를 사랑하고,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그런 ‘할머니 다움’에 너무 익숙해서였을까? 남편의 친할머니는 익숙한 할머니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미첼 할머니는 핼리팩스의 퍼블릭 가든 public garden이 내려다 보이는 콘도에 혼자 살고 있었다. 오래전에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넓은 집을 팔고 콘도로 이사 왔다고 했다. 할머니의 집에 들어서자 작은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왕왕 짖어 댔다. 화가인 할머니의 집에는 크고 작은 그림 액자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현관부터 복도, 거실, 각 방마다 할머니의 그림은 물론 다른 작가의 그림들이 마치 미술관처럼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그림이나 사진 액자로 가득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고풍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이 벽을 따라 길게 놓여있었다.
미첼 할머니는 녹색 팔걸이의자에 앉아있었다. 스타킹을 신고 가죽 구두를 신은 할머니의 발은 의자와 한 세트로 보이는 작고 낮은 녹색 발받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화장을 곱게 한 할머니의 붉은 입술이 푸른색 실크 블라우스와 비교되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는 할머니의 손에서는 여러 개의 반지가 반짝였고, 백금으로 된 팔찌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보석이 박힌 목걸이, 귀걸이, 브로치 등으로 치장한 미첼 할머니는 화려하지만 세련되고 우아해 보였다. 백발의 백인 할머니는 내 인사를 받고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미첼 할머니는 첫인상부터가 여느 할머니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나는 왕실 귀족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왕실 귀족 같은 품격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담소를 나누던 미첼 할머니는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손가락이 굳어서 리듬과 박자가 늘어지긴 했지만 정성을 다해 건반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노래했다. 그러나 호흡이 짧아진 자신의 노래 실력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와서 틀었다.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젊은 미첼 할머니의 고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첼 할머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어렸을 때부터 배운 성악과 피겨스케이트 실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시댁에는 미첼 할머니의 우아한 ‘스파이럴’ 장면이 찍힌 흑백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미첼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는 결혼 후에도 부유하게 살았다고 했다.
나는 오래전에 촬영된 미첼 가족의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화질이 좋지 않은 흑백 활동사진 같은 화면 속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바로 시아버지라고 했다. 1948년생인 시아버지가 3살이었다고 하니 1951년에 촬영된 비디오였다. 비디오는 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바닷가 도로를 달리는 장면과 정원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장면, 가족들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 등이 담겨있었다. 화면 속의 젊은 할아버지는 자신의 신형 자동차를 자랑하고 있었고,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쓴 젊은 미첼 할머니는 정원을 걷거나 와인을 마시며 가족들의 이야기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첼 할머니의 옛집 (미첼 할아버지가 설계하고 지었씀)
생활이 여유로웠던 미첼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하며 화가로써의 명성을 쌓았다. 요양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는데 작업하기 번거로울 텐데도 계속 유화를 고집했었다. 노바스코샤의 풍경을 주로 그렸던 미첼 할머니가 말년에 그린 작품 중에는 사람의 실물 크기 정도나 되는 ‘어머니’ 그림이 있다. 미첼 할머니, 당신의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청록색의 블라우스와 푸른 긴치마를 입고 손에는 풀꽃 한 송이를 들었고 고개를 숙여 꽃냄새를 맡고 있는 여인(남편의 증조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림 속의 하늘에는 노을빛을 머금은 구름이 떠있었다. 미첼 할머니는 그 당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흔들리는 풀꽃들, 옷자락의 주름과 스커트에 새겨진 잔잔한 꽃무늬까지 아름답게 묘사를 했다. 그림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 그림은 내가 미첼 할머니 그림 중 최고로 꼽는 걸작이다.
미술을 전공한 나는 미첼 할머니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신나고 재밌기만 했다. 그런데 남편은 나만큼 미첼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미첼 할머니와의 관계를 물어보니 이렇게 말했다.
‘미첼 할머니는 언제나 너무 부자였어. 그래서 어린 시절 내가 할머니집에 놀러 가면 '그거 비싸니까 만지지 마라. 그거 제자리에 놓아라. 가만히 앉아 있어라' 이런 말만 했어. 할머니 집에서는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했고 엄격한 식탁예절을 지키느라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맘이 편치 않았다고. 미첼 할머니와는 함께 놀아본 추억이 없어서 어색한 거야. 그렇지만 할머니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의 시어머니가 내게 해 준 말이 이해가 됐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시어머니에 대해 내게 딱 한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좀 달라. 그냥 그녀는 우리와는 좀 달라 She's different. She's just different from us"
미첼 할머니의 집에서 오래된 가족사진을 구경하던 나는 남편과 닮은 사람이 찍힌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물어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라 했다. 나는 미첼 할머니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 남편이 누굴 닮아 잘생겼나 했는데 이제 보니 할머니의 남편을 닮은 거였네요"
그랬더니 미첼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내 남편이 훨씬 더 잘 생겼잖아"
나는 그때 내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미첼 할머니의 어조는 분명했고 단호하기까지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반응에 난처해진 나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시어머니 말대로 미첼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는 달랐다.
남편은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는 외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한국에서 살 때의 어느 날, 남편이 갑작스럽게 직장을 옮겨야 할 상황이 생겼었다. 사택에서 살고 있던 우리 부부에게는 비상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직은 곧 이사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이참에 캐나다로 돌아가겠다고 쉽게 결정을 내렸지만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갑자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할머니는 지혜롭고 인자하셔. 그리고 언제나 나를 도와주었어.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청해야겠어"
그리고는 바로 노바스코샤에 사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자의 전화를 받은 할머니는 흔쾌히 자신의 집 반지하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고 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파킨슨 병증이 점점 심해져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라서 마침 잘되었다고 했다. 우리와 함께 살면 든든하겠다며 반겨주었다. 다만 할머니는 우리에게 1년이라는 기간만을 허락해 주었다. 자식들을 독립적으로 키우는 캐나다에서는 부모나 조부모와 함께 사는 일이 흔치 않다. 우리에게 함께 살 방을 내어 준건 아주 특별한 케이스에 속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더욱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캐나다 생활이 시작될 수 있었다. 할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의 캐나다 정착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를 위해 급하게 지하실 방을 꾸며주었다. 원래는 할아버지의 취미 공간이었던 곳인데, 우리가 한쪽 공간을 사용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침대를 들이고 옷을 정리할 수 있는 가구와 소파를 넣어주었다. 더블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침실과 3인용 소파와 책상 하나로 꽉 차는 거실과 화장실이 전부였지만 더없이 아늑한 우리 부부의 첫 캐나다 보금자리였다.
할머니는 내가 청소나 설거지를 하면 용돈을 주었다. 절대 공짜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손자라도 내 남편에게 그냥 용돈을 주는 법은 없었다. 이따금 할머니는 남편에게 ‘창문 닦기’나 ‘창고 정리’ 같은 일을 시키고 용돈을 주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창문도 깨끗했고 창고 정리도 간단한 일이었던걸 보면 용돈이 주고 싶어서 일을 시켰던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하고 느렸다. 엄청나게 놀랍고 충격적인 뉴스를 보면 최고로 놀란 표정으로, 그러나 목소리는 절대 높이지 않고 ‘오~마이! oh~my!’라고 했다. 할머니의 별명은 ‘엄지공주 Thumbelina’였다. 가뜩이나 키가 작은 할머니는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어서 키가 점점 더 작아졌다. 작고 왜소한 외모와는 다르게 할머니의 마음은 대서양보다 넓었고 목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불의에 맞서는 목소리는 크고 강력했다.
PEI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했고 딸 4명을 낳았다. 할아버지는 공군 비행기 정비사였다. 때문에 온 가족은 캐나다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고 했다. 여유 있는 형편은 못되었지만 할머니는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기부의 삶을 실천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외출을 했다. 일요일에는 성당에 갔고, 화요일에는 미장원을 다녀왔다. 수요일 오후에는 친구들과 빙고게임을 하러 갔고, 목요일에는 장을 보러 마트에 다녀왔다. 매주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을 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머리는 일 년 열두 달 한치도 변함없이 똑같은 스타일을 유지했다. 조금 더 길거나 조금 더 짧아진 할머니의 헤어스타일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의 모든 부엌살림은 꼭 맞는 제자리가 있었다. 마치 퍼즐 같았다. 사용한 그릇들은 어김없이 제자리에 놓이기 때문에 몇 달 만에, 혹은 몇 년 만에 할머니 집을 방문해도 내가 좋아하는 컵이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찾을 수 있다. 키가 작은 할머니를 위해 집안 곳곳에는 작은 디딤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외할머니의 집(남편은 그냥 할머니라고 부름)
할머니는 특별히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이민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 노력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남편과 말다툼을 하면 이따금 할머니에게 일러바쳤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편이면서 한편으론 남편 편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언제나 내편이었고, 당신의 손주인 남편에게는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할머니는 세상 모든 일을 조화롭게 다독여주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할머니>라는 한국말을 좋아한다. <할머니>의 발음이 영어 <harmony>의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에 외우기도 쉽고, 할머니는 harmony(조화, 화합)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한국말 <할머니>는 거의 국제공용어로 쓰여도 될만한 완벽한 단어라고 극찬을 했었다.
우리는 할머니 집에서 딱 1년을 살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우리가 독립한 얼마 후,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1년 넘게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간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할머니 스스로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이제 살만큼 살았다며 어서 할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의료 혜택이 무료인 캐나다에서는 암 치료도 물론 무료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의 늙고 노쇠한 몸을 위해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할머니는 증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면회를 가면 나올 때가 제일 힘들다. 병실에 들어갈 때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병실을 나올 때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인사가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안녕’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미첼 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들과 헤어질 때 했던 ‘안녕’이라는 말은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기에 할머니에게 ‘안녕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말이 거짓말이 될까 봐 늘 두려웠다.
2020년 어느 봄날, 아직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이 유독 따사로운 날이었다. 남편과 나는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면회를 갔었다.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할머니는 병색이 완연했지만 여전히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너를 사랑한단다. 매일 너를 위해 기도한단다"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남편과 나는 각각 할머니의 손을 한쪽씩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녕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인사말과 함께 긴 포옹을 하고 병실을 나왔다. 자동차에 타서 시동을 걸자마자 라디오에서는 <비틀스 The Beatles>의 노래 <Let it be>가 흘러나왔다. 햇살 눈부신 그날 남편과 나는 Let it be를 들으며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날 들은 Let it be는 내가 들은 Let it be 중 최고로 슬펐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가 할머니를 본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곧이어 닥친 팬데믹으로 모든 병원의 면회는 금지되었고, 얼마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팬데믹 중이라 가족 중 이모 2명만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할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에 통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남편과 나는 울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울면서 겨우겨우 ‘할머니 영원히 사랑해요. 당신을 잊지 않을게요. 굿바이’라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슬픔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할머니가 돌아가고 한동안 남편과 나는 눈만 마주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유행병이 잠시 가라앉은 틈을 타서 할머니의 묘소에 다녀오고 나서야 눈물이 조금 잦아들었다. 이제 우리 부부는 할머니 생각이 날 때마다 각자의 심장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는 언제나 여기 있어"
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을 했기에 나는 친할머니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내가 10살 때쯤 돌아가셔서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래서 남편의 할머니들은 나에게 더욱 특별했다. 우아하고 세련되고 개성 강한 미첼 할머니와 한없이 큰 사랑과 지혜를 가르쳐 준 외할머니, 이 두 캐네디언 할머니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